대한민국 사랑

6월 무렵이면 불현듯 생각나는 노래

noddle0610 2007. 6. 6. 23:30

 

 

 

 

  6월 무렵이면 불현듯 생각나는 노래

 

                                                                                                                     

  

 

  해마다 6월 무렵이면, 특히 현충일(顯忠日)과 6월 25일이 찾아오면 불현듯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제목(題目)도 따로 없는 구전가요(口傳歌謠)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내가 임의(任意)로 《625 출정가(出征歌)》라는 제목을 붙여 혼자 부르곤 하는 6월의 노래다. 이 노래는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공터에다가 임시로 천막(天幕)을 치고 문(門)을 연 학교였기 때문에, 책걸상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볏짚으로 엮어 만든 쌀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사과궤짝을 책상으로 삼아 수업을 받자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산골 학교라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 2개(二個) 학년이 한 천막 속에 들어가 복식 수업(複式授業)을 했는데, 나는 6학년 형(兄)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998년에 상영(上映)한 이광모 감독의 영화(映畵) 《아름다운 시절》에 나오는 천막학교(天幕學校)와 흡사한 모습의 학교에서 말이다.

 

  강원도 내륙지방(內陸地方)의 학교는 전시(戰時)에 대부분 폭격을 맞았든지, 아니면 아군(我軍)과 적군(敵軍)의 군영(軍營)으로 번갈아 사용되어 학교가 정상으로 운영되지 못했던 까닭에, 휴전(休戰) 직후 다시 학교 문을 열었지만 막상 학동(學童) 전체가 학령 초과(學齡超過)에 해당하였다. 당시 문교부(文敎部)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한 학력(學力) 측정을 거쳐 학령(學齡)이 초과한 학생들의 월반(越班)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였는데, 나는 3학년에 편성이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고향 고을[郡內] 최고의 한학자(漢學者)이셨던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싸리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글보다는 《천자문(千字文)》부터 깨우쳤고, 《무제시(無題詩)》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떼고 《소학(小學)》까지 익힌 데다 비록 어깨너멋글이긴 하지만 한글 또한 완전히 해독(解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께서는 나를 면접(面接)하시자마자 선뜻 3학년에다 배치(配置)하셨다.

  나는 학령(學齡)을 그리 심하게 초과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한 살 아래의 육촌 동생(六寸同生)과 마주치기만 하면 원수지간(怨讐之間)처럼 매일 육탄전(肉彈戰)을 벌려, 이를 염려한 할아버지께서 교장 선생님과 상의하셔서 3학년에 편입시키셨고, 내 육촌 동생은 1학년 신입생이 되었다. 

  한글을 깨우치고 한자(漢字)를 공부한 저력(底力)이 있어 3학년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1~2학년 과정을 제대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셈본[산수(算數)]’ 과목과 자연(自然) 과목의 기초 학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족했던 나는 교실 수업에 흥미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천막 속이 너무 더워 학교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칠판을 비스듬히 매달아 걸고 야외수업(野外授業)을 하였는데, 그런 날은 수업 장소가 교실이 아닌 야외였던 까닭에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히 노래도 배우고 목청껏 합창도 할 수 있어서 무척 재미있어하였다.

 

  3학년 때 우리를 처음 가르치신 선생님은 눈매가 아주 무섭게 생기신 분이었는데, 야외수업 시간만큼은 우리를 마음껏 풀어 주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셨으며, 희한(稀罕)한 노래도 가르쳐 주셨다. 하도 세월이 오래 흘러 그 선생님의 존함(尊銜)은 잊었지만, 지금도 그분의 성씨(姓氏)가 지씨(池氏)이셨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상이용사(傷痍勇士)이셨던 지(池)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자주 전투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언제 들어도 신나는 것이 전쟁 이야기였으므로 우리는 수업 내용이 지루하게 여겨질 때마다 전투 이야기를 해 달라고 선생님께 떼를 썼다.

  아무리 참전용사(參戰勇士) 출신이라 하여도 그의 무공담(武功譚)에는 에필로그(epilogue)가 있게 마련이고 결국 이야기 밑천이 다 떨어지게 되어, 어느 날부터인가 선생님은 이야기 대신 우리에게 전쟁과 관련한 일련(一連)의 노래들을 가르쳐 주셨다.

  당시 시골의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특히 산간벽지(山間僻地)의 선생님들은 정규(正規) 사범학교(師範學校) 출신은 거의 드물었고, 임시 교원양성소에서 단기간(短期間) 동안 강습을 받고 준교사(準敎師) 자격을 획득한 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예체능(藝體能) 과목에 대한 기본 소양(基本素養)을 갖추지 못하여, 시골 아이들은 저학년(低學年) 시절에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다. 나 또한 4학년이 되어서야 정규 사범학교 출신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이하여 풍금(風琴) 연주를 들으며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고, 오선지(五線紙)에 그려진 악보(樂譜)를 보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1940년대 후반기에 태어나 625 사변(事變)을 거쳐 휴전(休戰)이 성립할 무렵에 유소년기(幼少年期)를 보낸 우리 세대(世代)는 제대로 된 동요(童謠)를 배우지도 못한 채 군가(軍歌)나 625 사변과 관련한 노래 아니면 전후(戰後)의 퇴폐적인 내용을 담은 구전가요(口傳歌謠) 세태가(世態歌)를 배우면서 자라난 세대, 즉 동요(童謠)를 모르는 슬픈 세대(世代)들이다.

  그건 그렇고, 임시 교원양성소 출신이신 지선생님께서는 풍금 연주도 못 하시고 악보(樂譜)도 못 읽으셨지만, 야외수업 시간에 씩씩한 군가(軍歌)와 요상(?)한 내용의 노래들을 자주 불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나지만, 그 해 6월이었던 것 같다. 625 사변일(事變日)을 며칠 앞두고서였다. 그 날도 야외수업을 했는데 선생님께 이야기를 해 달라고 떼를 썼더니, 중공군(中共軍)과 싸우다가 부대원(部隊員) 대부분이 전사(戰死)하고 겨우 선생님을 비롯한 전우(戰友) 몇 분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 날 선생님께서는 이야기 끝에 엉엉 우셨다. 우리 학생들도 선생님을 따라 덩달아 울었다. 

 

  지선생님은 928 수복(收復) 이후 국군이 북진(北進)할 때 압록강(鴨綠江)까지 진격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1‧4 후퇴 당시 중공군(中共軍)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밀려 고전(苦戰)을 했는데, 그들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긴 하셨지만 한쪽 눈을 잃으셨고, 팔 한쪽과 다리 한쪽에 심한 부상을 입으셔서 국군병원(國軍病院)으로 후송되었으며, 결국 상이용사로 제대(除隊)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불편한 팔과 다리를 흔들어 보이시며 칠판(漆板)을 걸어 놓은 소나무를 붙잡으신 채 우셨고, 우리는 선생님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선생님이 총상(銃傷)으로 지체부자유자(肢體不自由者)가 되신 것은 진작부터 일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한쪽 눈이 의안(義眼)인 것은 그 날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쪽 눈이 의안이시라 나머지 한쪽 눈으로만 사물(事物)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선이 그렇게 매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날 선생님께서는 본격적인 무공담(武功譚)을 이야기해 주시기 전에 새로운 노래 한 곡을 우리한테 가르쳐 주셨다. 당시 청년들이 군(軍)에 입대할 때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었다. 전투에 나가거나 최전방(最前方)에 배치되었을 때 부르기도 했다는데, 노랫말이 쉬우면서도 너무 비장(悲壯)하였고 곡(曲)도 아주 애절하였는데, 대체로 빠른 트롯트(trot)여서인지 금방 우리 가슴을 파고드는 구전가요(口傳歌謠)였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골에 저는 갑니다.

 

  38선을 돌파하고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백골(白骨)이나 돌아오리다.  

   

  전쟁에 나가는 젊은이의 고뇌와 각오를 담은 일종의 출정가(出征歌)였다. 당시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알던 군가(軍歌) 《전우(戰友)의 시체를 넘고 넘어(전우야 잘 자라)》가 공식 행사장 (公式行事場)에서 많이 부르고 연주한 행진곡(行進曲)이라면, 지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노래는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암암리(暗暗裡)에 눈물을 흘리며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 노래다.

 

  지선생님에게서 《625 출정가(出征歌)》를 배운 이후 우리는 가끔 그 노래를 부르며 등하교(登下校)를 하곤 하였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선생님의 처절했던 마지막 전투 장면과 전우(戰友)들의 죽음, 선생님의 한쪽 눈에 흘렀을 피, 총상(銃傷)을 입은 팔과 다리를 연상(聯想)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눈과 팔다리에만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고, 더 심한 전상(戰傷)을 입으셨다는 것을 우리 학교 학생 모두 알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고 마지막 전투에서 전우(戰友) 대부분이 전사(戰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렵사리 생존한 것에 대한 죄의식(罪意識)과 지체부자유자(肢體不自由者)가 된 사실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겹쳐, 선생님은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정신질환을 남 몰래 앓고 계셨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업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이른바 간질(癎疾)증세까지 보이셨다. 

  오늘 날과 달리 교사(敎師)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임시 교원양성소에서 부족한 인원을 충원(充員)해야 했던 1950년대(年代)라서 지선생님은 직무수행(職務遂行)에 여러 가지로 애로(隘路)가 많으셨지만 군대(軍隊)에서 제대하신 지 얼마 안 되어 벽지학교(僻地學校)에 임용(任用)되셨고, 우리 학교에 부임(赴任)해 오신 후에도 그런대로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나 점차 병세가 악화되어 경련(痙攣)과 의식 장애 등(等)의 발작(發作)을 되풀이하는 빈도(頻度)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고, 어느 날 야외수업 도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시는 바람에 산에서 밑으로 굴러 크게 다치셨는데, 더 이상 교단(敎壇)에 설 수 없을 정도의 부상(負傷)을 입으셨다.

 

  1950년대(年代)에는 우리 나라 모든 학교가 해마다 4월 1일을 전후하여 입학식과 개학식을 하였고, 이듬해 3월 중순께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지선생님은 내가 3학년에 편입하던 해 4월 초하루에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오셔서 그 해 7월 말에 지병(持病)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셨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선생님을 기다려 주신 예쁜 사모(師母)님이 계셨으나, 그분은 막상 상이용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선생님을 보시고는 어디론가 도망을 치셔서, 선생님은 우리 동네 청년들이 마련한 담가(擔架 : 들것)에 누우신 채 쓸쓸한 모습으로 소양강(昭陽江)을 건너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서너 달 정도로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담임(擔任)을 맡아 주셔서 지금은 선생님 존함조차 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지선생님이 625 참전용사(參戰勇士)이자 상이용사(傷痍勇士)이셨다는 점과 야외수업 시간에 산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무공담(武功譚)들은 아직도 나와 동기생(同期生)들의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사람들은 보훈(報勳)의 달을 떠올리고, 아아, 잊으랴!로 시작하는 《625의 노래》를 떠올리지만, 나는 보훈(報勳)의 달과 더불어 국민학교 3학년 시절 담임이셨던 지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625 출정가(出征歌)》를 불현듯이 떠올리곤 한다. 

  만약 선생님께서 아직껏 살아 계신다면 이미 춘추(春秋) 팔십을 훌쩍 넘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의 좋지 않은 건강상태와 가정환경 등(等) 여러 가지 여건(與件)들을 감안(勘案)한다면, 냉철하게 판단해 보건대 선생님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실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현충일이 찾아오면, 당일(當日) 오전 10시에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사이렌(siren) 소리와 동시에 호국영령(護國英靈)들에 대한 묵념(念)을 올릴 때, 지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추모(追慕)의 시간을 갖곤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임의(任意)로 제목을 붙인 《625 출정가(出征歌)》를 혼자 허밍(humming)으로 불러 보며, 현충일을 맞이하여 애틋한 마음으로 지선생님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골에 저는 갑니다.

 

  38선을 돌파하고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백골(白骨)이나 돌아오리다. 

   

  아아, 이제 《625 출정가(出征歌)》 2절(二節)과 3절(三節)의 노랫말은 생각이 잘 안 난다. 그래도 내 가슴은 작년 재작년 현충일(顯忠日) 못지않게 여전히 울먹울먹 아프다.

 

 

2007 년 6 월 6 일 현충일 저녁에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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