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차(省墓次) 찾아간 내 고향
성묘차(省墓次) 찾아간 내 고향
━ 1970년대 초(初)에 수몰(水沒)된 고향 마을을 돌아보며 ━
사진 ‧ 글 / 박 노 들
☞ ‘소양강(昭陽江) 댐(dam)’ 만수(滿水) 이후(以後)에 새로 생긴 ‘상수내리(上水內里) 안마을’ 나루터.
☞ 예전의 논밭이 나루터로 변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實感)케 한다.
☞ 지금은 수몰(水沒)이 되었지만, 흰색 부표(浮標)가 있는 곳이 옛 성황당(城隍堂 : 서낭당) 터.
성황당(城隍堂)이 수몰되기 전까지 저 곳에는 상수내리에서 가장 크고 수령(樹齡)이 오래 된 ‘오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바로 그 나무 그늘 아래에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인 ‘서낭신’을 모신 당(堂)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堂) 안에는 북어(北魚) 몇 마리가 새끼줄에 꿰진 채 매달려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아, 행실(行實)이 짓궂은 아이들도 감히 범접(犯接)할 생각을 못 했다. 성황당 바로 뒤로 흐르던 개울물은 오리나무의 무성한 나뭇가지들에 가려져서 아주 넓게 그늘져 있었기 때문에 항상 주변이 어둑어둑했으며, 여름철에도 물이 몹시 차가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 호수 건너편 ‘안산(案山)’ 기슭에 난 길은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 수산리(水山里)’로 가는 길이자 어엿한 국도(國道)이다.
☞ 호수 건너편 ‘안산(案山)’ 기슭의 흙투성이 ‘벼랑길(낭떠러지 길)’은 예전에 나무꾼들이 산 위에서 산 밑으로 나뭇짐을 굴려 보내던 이른바 ‘썰매장’의 흔적(痕跡)이다. 다시 말해 저 곳은 ‘나뭇짐 썰매장’인 것이다.
예전에 저런 ‘나뭇짐 썰매장’은 높은 산 곳곳마다 있었는데, 지금은 상수내리에서 거의 사라졌으나, ‘안산(案山)’ 기슭의 썰매장과 더불어 옥산동(玉山洞) 옆 ‘새장터’ 위의 ‘작은덕[소덕치(小德峙)]’ 골짜기에 아직 그 흔적이 좀 남아 있다.
50여 년 전, 겨울철에 눈이 내리면 그제서야 저 썰매장은 비로소 이름 그대로 ‘눈 썰매장’ 이 되었다. 용기 있는 나무꾼들은 땔감나무를 지게에다 잔뜩 묶어 실은 후에 ‘지게 발목’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썰매장 한가운데서 직접 미끄럼을 타고 산 밑으로 향했다. 모험심(冒險心)이 많은 청소년들은 물푸레나무나 대나무를 불에다 살짝 구운 다음에 그 끄트머리 부분을 약간 휘게 하여 원시적인 스키(ski)를 만들어, 양쪽 발에다 노끈으로 칭칭 감아 신고, 지게 작대기 두 개를 스틱(stick) 삼아 양 손으로 휘두르며, 가파른 썰매장 길을 신바람 나게 내리닫곤 했다.
강원도(江原道)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에는 썰매장과 관련한 애달픈 사연의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는 불명(不明)이지만, 어느 한 옛날에 강원도 ‘기린(麒麟)’ 고을 어떤 집에 서로 사이가 너무 좋은 나무꾼 부자(父子)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나무꾼 아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저녁나절이 되자 그의 늙은 아버지가 썰매장 어귀로 마중을 나갔다. 아들이 워낙 효자(孝子)여서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정리(情理)가 유난히 두터웠던 터라, 평상시에 늙은 아버지가 당신 아들 마중 나가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사고(事故)가 일어난 그 날, 나무꾼은 한겨울에 아버지 방(房)을 따뜻하게 해 줄 장작(長斫)들을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이 준비하려고 높은 산에 올라가, 날이 이슥하도록 많은 나무들을 베고 잘라 냈다. 날이 껌껌하게 저물어 오자, 나무꾼은 하루 종일 베고 자른 통나무들을 썰매장 꼭대기에서 산 밑으로 내리굴렸다.
다른 날보다 날이 훨씬 더 저물었는데도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무꾼의 늙은 아버지는 썰매장 어귀로 평소보다 더 바싹 다가갔다. 노안(老眼) 때문에 썰매장 입구(入口) 한가운데 버티고 선 채 노인은 썰매장 위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나무꾼은 자기 아버지가 썰매장 어귀 한가운데 있는 줄 몰랐기 때문에 길게 자른 통나무들을 연신 산 밑으로 내리굴렸다. 나이가 너무 들어 눈만 침침한 것이 아니라 귀까지 어두웠던 노인은 산 위에서 썰매장을 통해 굴러오는 통나무들의 쿵쾅쿵쾅하는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결국 노인은 평소 효자로 이름 높던 당신 아들이 굴려 보낸 통나무 토막들에 깔려 죽었다.
이 사고(事故)의 경위(經緯)를 알게 된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아무리 아들이 아비를 고의(故意)로 죽게 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자식으로서 부친을 죽게 한 것이므로 “불효(不孝)의 죄(罪)를 묻지 않을 수 없다”하여, 나무꾼을 사형(死刑)에 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이 아비를 죽게 한 불효자(不孝子)를 배출한 고을이라 하여, 당시까지만 해도 관내(管內)에 수십 개 마을을 거느린 채 ‘사또(使道)’가 다스리던 ‘기린(麒麟)’ 고을을 없애고, 모든 동네를 인근(隣近)의 춘천(春川)-양구(楊口)-인제(麟蹄) 등(等) 각 고을 관하(管下)에 갈기갈기 찢어 새로 편입(編入)을 시켰다고 한다. ‘사또(원님)’ 께서 공무(公務)를 집행하시던 동헌(東軒)과 관아(官衙)가 있었던 동네는 인제(麟蹄) 고을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런 사고(事故)만 없었다면 오늘날 기린(麒麟)은 인제군(麟蹄郡)에 소속된 ‘기린면(麒麟面)’이 아니라 ‘기린군(麒麟郡)’으로 발전해 있을 것이란 풍설(風說)도 전(傳)해 내려온다.
이 기린(麒麟) 고을의 ‘썰매장 애화(哀話)’는 그 사실(事實) 여부(與否)를 떠나 인근(隣近) 고을 백성들에게 수백 년 동안 전설(傳說)로 전해졌는데, 그래서인지 예전에 양구(楊口)-인제(麟蹄)에 살았던 나무꾼들은 산에 올라가 썰매장으로 나뭇짐을 내려 보낼 때마다 항상 ‘기린 고을’의 나무꾼 부자(父子)를 떠올리며 조심 또 조심을 했다고 한다.
이 ‘썰매장 애화(哀話)’를 필자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나뭇짐 썰매장’ 밑을 지나갈 때, 직접 할아버지한테서 들었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지금까지도 썰매장 근처를 지나치거나 그 곳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짠해지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 ‘소양강(昭陽江) 댐(dam)’이 생기기 전에 옥답(沃畓)으로 유명했던 ‘강남소(江南沼) 들판’이 지금은 ‘잉어’를 비롯한 온갖 물고기 떼의 낙원이 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무상감(無常感)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하는 곳이다.
사진 속 12시 방향에 보이는 높은 산이 ‘일어서기’ 이고, 그 밑에 펼쳐졌던 넓은 들이 ‘강남소(江南沼)’ 평야(平野)이며, 사진에는 안 나타나 있지만 9시 방향으로 가면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 수산리(水山里)가 있고, 3시 방향으로 가면 필자의 모교인 ‘수내국민학교’가 위치한 ‘난뿌리[난근동(蘭根洞)-난근호(蘭根乎)]’가 바로 지척(咫尺)에 있다.
사진 속 왼쪽 산, 즉(卽) 9시 방향에 보이는 산모퉁이는 다른 산들의 모퉁이보다 그 지세(地勢)가 상당히 뾰족한 편이라서 그런지 그 이름이 ‘된-모퉁이’었는데, 이를 우리 고향 어르신들께서는 전형적인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 방언(方言)으로 ‘된-모테이’라고들 발음(發音)하셨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바로 저 ‘된모퉁이’를 돌아 ‘수산리(水山里)’로 가는 방향에 ‘춘성군(春城郡)’에서 흘러와 소양강을 향해 흘러가는 제법 큰 개울이 있었고, 그 개울을 건너가기에 앞서 바로 신작로(新作路) 옆에 필자(筆者)의 집에서 경작(耕作)하던 ‘논배미’들이 일렬(一列)로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그 개울 건너편의 기름진 평야(平野)가 바로 ‘강남소 들판’이었다.
여담(餘談)이긴 하지만, 아득히 먼 옛날, 상수내리 마을이 처음 형성될 당시의 입향조(入鄕祖)들께서 동네 이름을 처음 지으실 적에 먼 훗날 20세기(世紀)에 소양강 댐에 의해 마을 대부분이 물에 잠길 것을 미리 내다보셨는지 마을 이름을 ‘수내리(水內里)’라 명명(命名)하신 것과 ‘강남소 들판’ 의 명칭을 한자(漢字)로 ‘江南沼’라 하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다.
‘수내리(水內里)’가 무슨 의미인가. 한자(漢字)를 풀이해 보면, ‘물 속 마을’이란 뜻이 된다. 옛 어른들께오서 오늘날의 상수내리(上水內里)와 하수내리(下水內里) 두 마을의 운명(運命)을 어찌 그리 신통하게 예견(豫見)하셨는지 모르겠다.
‘강남소(江南沼)’의 한자(漢字)를 풀이하면 ‘소양강(昭陽江) 남쪽의 늪’이란 뜻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 댐(dam)에 의해 수몰(水沒)되기 전까지만 해도 ‘늪’이 아닌 멀쩡한 ‘들판’이었던 땅을 옛 조상님들은 신기하게도 일찌감치 ‘강남소’라 부르셨다.
마을의 비극적 운명을 미리 암시(暗示)하고 있는 ‘수내리(水內里)’와 ‘강남소(江南沼)’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필자(筆者)의 마음은 오늘도 암연(暗然)히 수수(愁愁)롭다.
☞ 춘성군(春城郡)과 양구군(楊口郡)의 경계선 일대(一帶)에 자리한 상하수내리(上下水內里) 최고의 준봉(峻峰)인 ‘일어서기’ 산봉우리에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무(烟霧).
☞ 필자(筆者)의 고조부(高祖父)이신 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할아버님 산소(山所)를 모신 상수내리 최고의 명산(名山) ‘일어서기’ 산봉우리 위용(威容).
☞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山) 중턱의 바위가 바로 한(恨) 맺힌 사연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장수(將帥)바위’다.
옛날 한 옛날에 어느 훌륭한 장수(將帥)가 불운(不運)하게도 전쟁에 패하여, 부상을 입은 몸으로 이곳 바위동굴에 피신(避身)하였다가 결국 죽고 말았는데, 죽은 후에도 그의 혼백(魂魄)이 바위동굴에 남아 수시로 전고(戰鼓 : 전투할 때 치는 북)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느 날 부모님 상중(喪中)이었던 한 상제(喪制)가 호기심 때문에 동굴의 문(門)을 열어 본 이후 이른바 부정(不淨)을 탄 그 ‘바위의 문’은 영원히 닫혔다고 한다.
상수내리(上水內里)가 수몰(水沒)되기 전(前)까지 마을에 사셨던 노인(老人)들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가끔씩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면 이곳 장수바위에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동네에까지 들려온다고들 하셨다. 필자(筆者) 역시 어린 시절에 장수바위 쪽에서 “둥둥!” 북소리 비슷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환청(幻聽)이었겠지만 말이다.^^*
☞ 필자(筆者)의 선산(先山)이 있는 옥산동(玉山洞)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깨끗한 옥수(玉水).
☞ 옥산동(玉山洞) 골짜기에 밤낮없이 콸콸 퐁퐁 흘러넘치는 맑고 시원한 간수(澗水).
☞ 할아버님 산소 가는 길 한편에 고즈넉이 열매를 맺은 복분자(覆盆子).
☞ 할아버님 산소로 가는 길섶에 맺힌 산딸기(覆盆子).
☞ 할아버님 산소 가는 길 한쪽에 한창 익어가고 있는 중인 토종(土種) 산딸기 ‘복분자(覆盆子)’.
저 산딸기로 술을 담가 두었다가 매일 끼니때마다 반주(飯酒)로 한 잔씩 마시면, 한겨울 깊은 밤중에 요강에다 오줌을 눌 때, 오줌발이 너무나 세차서 방바닥에 있던 요강단지가 뒤집어진다고 했으렷다!…… 그래서 옛날 조상님들께서 산딸기를 가리켜, ‘뒤집힐 복(覆)’-‘동이 분(盆)’-‘어조사(語助辭) 자(子)’로 표현하셨다는데, 필자(筆者)는 건강 때문에 술을 끊은 지 오래 되어 이제는 ‘복분자(覆盆子) 술’을 시음(試飮)해 볼 기회조차 없다.^^*
☞ ‘밀양 박씨(密陽朴氏)’ 문중(門中) 선산(先山).
☞ 필자(筆者)의 할아버님 산소(山所).
☞ 필자(筆者)의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 마리아 여사(女史)’를 모신 산소(山所).
☞ 필자(筆者) 어린 시절에 친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서당(書堂)의 학동(學童)들과 매일 뛰놀던 옥산동(玉山洞) 산기슭의 속칭(俗稱) ‘잔디버덩’ 자리.
저 곳은 생가(生家) 바로 뒤편 언덕에 있다. 금잔디 무성하던 그 ‘버덩’ 자리에 지금은 온갖 초록빛 작물(作物)들만 무성하다.
옛날 중국의 성현(聖賢) ‘기자(箕子)’님께서는 은(殷)나라가 망(亡)한 후에도 ‘보리’가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장탄식(長歎息)을 하셔서, 그 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한탄하는 것을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 하였다는데, 오늘 초록빛 작물(作物)이 무성한 고향 언덕에 올라 수몰(水沒)된 마을을 보고 장탄식하는 필자의 경우를 후세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할까. 병약(病弱)해빠진 어느 이름 없는 선비가 무자년(戊子年) 여름을 맞아 저 곳에 어렵사리 다녀간 것을 알기나 할까. 아아,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유구(悠久)할 소양호(昭陽湖)만은 잔잔히 기억해 주리라.
2008 년 8 월 16 일
고향 마을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