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의자(倚子)
아버지의 의자(倚子)
글 / 박 노 들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여의어서 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아버지 있는 친구들이 부럽긴 했지만 술주정뱅이 오입쟁이 투전(投錢)꾼 싸움꾼 백수건달(白手乾達) 아버지를 둔 고향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 없이 시골에서 자란 나는 열다섯 살에 무작정 상경(上京)하여 서울 사람이 되었는데, 출세(出世)한 자기 아버지 덕(德)에 고생을 모르고 살던 서울 친구 몇몇이 부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그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고 나 홀로 씩씩하게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조차 전혀 없는 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에 아버지 없는 외로움도 전혀 모른 채 살았다. 아버지 없이 사춘기(思春期)를 보내고 아버지 없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나는 삼십 대(三十代) 중반에 비로소 ‘아버지’가 되었는데,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눈곱만큼도 없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므로 때늦게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설프고 서툴렀다. 일시적인 성취에 우쭐하여 남들 앞에 교만(驕慢)했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 남들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써 보았지만, 아버지 없이 산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좋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세 아이의 아비가 되어 환갑(還甲) 나이를 넘길 때까지 바삐 살아왔지만, ‘아버지’라는 자리는 아직도 버겁게 느껴진다. ‘아버지’라는 의자(倚子)는 이제 내게 익숙해졌을 만도 한데 요즘도 그 자리가 낯설고 두렵다. 인륜(人倫)과 사회 풍습 때문에 숙명적(宿命的)으로 아버지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늘 편안하지가 않다. 더더구나 사십 대(四十代) 중반에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남들보다 빨리 늙고 병들어 골골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아직도 어린 내 자식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없이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나는 열다섯 살에 무작정 상경해 홀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비교적 남들보다 성공적으로 살아왔지만, 내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 하나도 없어 세 아이를 슬하(膝下)에 거느린 지금도 이름만 허울 좋은 ‘아버지’다.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조차 전혀 없는 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에 아버지 없는 외로움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왔지만, 지금은 불현듯 너무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 다음 내세(來世)에선 내 자식들 다 키울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우리 아이들한테는 아주 넉넉한 아버지가 되어 오순도순 살고 싶다.
2009 년 9 월 초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