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상등병이 된 우리 아이
[창작 시조(時調)]
해군 상등병이 된 우리 아이
늦둥이 막내 녀석 해군(海軍) 간 지 어언(於焉) 한 해.
면회 한번 못 갔는데 상등병(上等兵)이 되었단다.
아해(兒孩)야, 해풍(海風) 또 불면 억새처럼 견디렴!
2011 년 4 월 1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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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저녁때 제 아들 녀석이 전화로 이번 달에 ‘해군 상병(上兵)’으로 진급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제가 마흔 살이 훨씬 넘어서 늦둥이로 얻은 막내 아들 녀석이 작년 봄에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해군에 입대(入隊)할 때만 해도 언제 2 년 동안의 복무기간을 다 마치려나 했는데, 어느새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에 들어섰으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40여 년 전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國防部時計)는 돌아가게 마련이다.” “x퉁소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라는 자조적(自嘲的)이면서도 자위적(自慰的)인 유행어가 졸병(卒兵)들 사이에 널리 회자(膾炙)되곤 했는데, 이 말이 지금도 우리 군대에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세월은 흘러가게 마련되어 있나 봅니다.^^
제 아들아이는 일찌감치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을 했었고, 대학교 1 학년을 마치기가 무섭게 작년 봄에 해군 수병(水兵)으로 입대하였는데, 그 까닭인즉슨 제가 사십 대(四十代) 중반에 ‘만득자(晩得子)’로 얻은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제가 아비 노릇을 다 못하고 자식 놈과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고뇌 끝에 결정한 일련(一連)의 조처(措處)였습니다.
이제야 고백하거니와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2010년 4월 12일 날짜로 제 슬하(膝下)의 ‘2녀 1남’ 중 막내인 아들 녀석을 군대에 보내 놓고 나서 저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심적 갈등 내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몇 해 전에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져 심장(心臟) 전체의 삼분지(三分之) 이(二)가 괴사(壞死)하는 아주 위험한 고비를 겪어야 했던 저는 언제 사랑하는 식구들과 결별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죽기 전에 우리 막내가 무사히 군대 생활과 학창 생활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이었답니다.
그래서 철부지 아들을 살살 부추겨 해군에 자원 입대하도록 조치했는데, 하필이면 입대를 한 달도 안 남긴 즈음에 백령도(白翎島) 앞바다에서 ‘천안함(天安艦) 폭침(爆沈)’ 사건이 터졌고, 이로 인해 저희 아이가 수병(水兵)으로 입영하던 4월 12일 전후는 물론이요 그 이후 4월 한 달이 다 가도록 대한민국 전체가 통곡하고 분노해야 했습니다.
작년 4월은 우리들 모두 그렇게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4월 한 달을 눈물로 정신없이 보내고 나서 그 소회(所懷)를 그믐날 저녁에 저의 블로그(blog)에다 다음과 같이 시조(時調)로 옮겨 적기도 했지요.
4
월은 간다
먼산 밑 아지랑이
아른아른 춤추던 날
4월은 꿈결처럼
급히 다녀가시느라
금년엔 꽃만 피우고
말씀없이 가셨다.
2010년 4월 30 일
어쨌거나 작년 이맘때 TV나 라디오에서는 밤낮으로 ‘천안함 폭침 사건’ 경위와 더불어 46위(位)의 순국용사(殉國勇士)들에 대한 추모(追慕) 방송을 했는데, 철부지 저희 아들 녀석은 입영(入營)하기 전까지 매일 밤 친구들과 송별의 술잔을 나누느라 너무 바빴을 뿐더러 낮에는 밀린 잠을 자느라 다행히 방송 청취를 거의 안 했기 때문에 저희 부부(夫婦)만 가슴을 졸이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간절히 기원했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에게 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아들내미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해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천행(天幸)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난 우리 아들놈에게 큰절을 올리겠소.”
“우리 아들이 아빠한테 큰절을 해야지, 어째서 당신이 그애한테 큰절을 올리시겠다는 거예요?……”
“고마워서요. 무사히 제대해서 고맙고, 애비 말 거역하지 않고 해군에 자원 입대해서 고맙고, 애비 원망 안 하고 군대 생활 끝까지 잘 견뎌 줘 너무 고마워서요. 난 그 녀석이 제대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그 다음 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소.”
“…….”
저는 스물세 살 때 대학교 3 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했는데, 그 당시 저희 어머니 앞에서 그예 눈물을 보이고 군문(軍門)에 들어섰습니다만, 겨우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한 우리 막둥이는 저에게 큰절을 한 후에 보무(步武)도 당당히 뚜벅뚜벅 걸어서 ‘입영 열차(入營列車)’를 타고 ‘신병 훈련소(新兵訓鍊所)’가 있는 진해(鎭海)로 갔습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저는 편모슬하(偏母膝下)의 무녀독남(無女獨男) 외동아들이었고, 저희 아들내미는 2녀 1남의 막내이자 외동아들이지만 우리 부부의 사랑 아래 외롭지 않게 잘 자랐기에 그토록 씩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년 이맘때 시국(時局)이 하도 불안하고 어지러워 당시 우리 부부는 밥이 목구멍으로 잘 안 넘어갈 만큼 몹시 애가 탔고, 아들 녀석이 입영한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야 했지요.
사십여 년 전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는 문자 그대로 ‘일각 여삼추(一刻如三秋)’란 말이 실감(實感) 날 만큼 세월이 안 가는 것 같았는데, 제가 제대하고 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세월의 빠르기는 문자 그대로 유수(流水)와 같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바로 엊그제 햇병아리 해군 수병이 된 것 같은데, 어느새 ‘일등병’ 계급장을 떼고 ‘상병’으로 진급했다니 더더욱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제 아들 녀석은 저와 달리 정반대로 세월이 너무 느릿느릿 흘러간다는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있겠지요.
지난겨울에 짧은 휴가(休暇)를 받아 집에 온 아들 녀석은 종전(從前)의 앳된 모습에서 벗어나 아주 건강하고 억센 사나이로 변해 있었습니다. 몸무게도 입대 전보다 훨씬 더 불어나 있었는데, 그 까닭인즉슨 항상 고속정(高速艇)을 타고 온 바다를 누비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뱃멀미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끼니때마다 육상 근무(陸上勤務)하는 군인들보다 특별히 칼로리(calorie)를 고려한 식사 즉(即) 양질(良質)의 특식(特食)을 제공받고 있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집에 온 아들 녀석은 자기 어미가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물어도 별로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 사십여 년 전의 우리나라 군대 시절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아시아(Asia)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던 우리 대한민국, 저 동남아시아(東南Asia)의 필리핀(Philippines)이나 태국(泰國)보다 훨씬 가난했던 그 시절 우리나라 군대의 급식 상황은 아주 최악이었습니다. 매일 꽁보리밥에다가 변변한 반찬 한 가지 없이 오로지 콩나물국만 먹어야 했던 그 시절을 아련히 회상해 보았습니다. 고깃국이 나오게 되어 있는 날도 그저 애오라지 고기 국물뿐이었고 아무리 숟가락으로 은색(銀色)의 ‘알루미늄 식판(食板)’ 밑바닥을 휘저어도 고기는 단 한 점도 건져지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운수 좋은 날 고기 한 점 걸리면 그 당시 시쳇말로 ‘왕건이’ 건졌다고 환호작약(歡呼雀躍)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졸병 시절에는 용케 차지한 ‘왕건이’를 선임병(先任兵)이나 고참병(古參兵) 식판에 넌지시 자진 상납(自進上納)해야 까마득하게 남은 군대 생활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아들놈이 요즈음 군대에서 먹는 것만큼은 아주 잘 먹고 지낸다니, 저희 부모로서는 적잖이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우리 해군은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延坪島) 피격(被擊) 사태’의 여파(餘波)로 작년 한 해 동안 거의 대부분 잦은 비상(非常) 근무와 한미(韓美) 합동 훈련을 비롯한 각종 훈련에 참가하는 등(等) 항상 긴장된 상태에서 고된 복무를 하여야 했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시원찮을 정도로 사랑하는 자식들을 해군에 보낸 이른바 우리 ‘군부모(軍父母)’들은 항상 텔레비전 뉴스(TV News)에 귀 기울여야 했고, 일 년 내내 마음고생을 많이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육상 근무가 아닌 해상 근무(海上勤務), 그것도 고속정(高速艇) ‘참수리호’를 탄 채 삼면(三面)의 바다를 누비고 다니느라 기항지(寄港地)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아들 녀석 면회하기도 힘든데다가, 긴 시간 동안 자동차나 기차를 탈 수가 없을 정도로 저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아들아이가 ‘자대 배치(自隊配置)’를 받은 이래(以來) 저희 부부는 여태껏 면회를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때때로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 부모를 둔 다른 해군 수병들에 비해 늙고 쇠약해 빠진 아비를 둔 우리 막둥이가 측은하게 여겨져 자괴감(自愧感)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끔 아들내미가 어렵사리 휴가를 얻어 집에 온 적도 있긴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아 늘 아쉬웠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육군은 3년 복무 기간 동안에 정기 휴가(定期休暇)가 세 번 있었는데, 한 번의 휴가 기일(期日)이 무려 25일이나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짧게 여겨졌었습니다. 철책선(鐵柵線 : DMZ)에서 근무를 하는 군인들의 경우는 3년 복무 기간 동안에 정기 휴가가 15일씩 여섯 차례 주어졌지요.
지금은 군대 복무 기간이 3년이 아닌, 2년 이내로 줄었기 때문에 예전보다 휴가 횟수(回數)나 기일이 줄어든 것은 당연하지만, 휴가가 끝날 때 부모 자식 사이에 오가는 석별(惜別)의 정(情)을 이성적(理性的)으로 억누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더이다.
이러구러 여러 가지 사건으로 다사다난했던 경인년(庚寅年)에 대한민국의 해군 수병이 된 우리 아들내미는 신병(新兵)과 일등병 시절을 대과(大過) 없이 잘 겪고, 바로 그저께 대견하게도 ‘해군 상병’으로 진급했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작년 이맘때 해군 수병이 될 때만 해도 미성년자(未成年者)였는데, 올해 신묘년(辛卯年)에 우리 막둥이는 드디어 스무 살 성년(成年)을 맞이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의 상등병이 되었습니다.
늠름한 대한민국의 해군 상병이 된 우리 아이를 하루 빨리 만나 보고 싶습니다.
2011년 4월 3일 일요일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