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 장끼전
<고전(古典)의 패러디-1970년 초(初) 세태풍자 소설>
異變 장끼傳
朴 노 들
건곤(乾坤)이 배판할 제, 만물이 번성하여 귀할손 인생이요, 웃길손 사람이라. 작금에 이르러 인구 삼십억이요, 인종도 여러 가지라. 그를 볼작시면 검둥이, 흰둥이, 누렁이, 키 큰놈, 작은놈들 숱하게도 생겨나서 걸핏하면 티격태격이니 조화옹(造化翁)인들 심금이 편할소냐?
윤리가 있되 이제는 폭삭이요, 내쇼날리즘이 제법 깡뚱 횡행하나, 동(東)이 서(西)인가 서(西)가 동(東)인가 분간할 길 없어라. 동방예의지국이 언제부터 이렇듯 되단 말가. 남들이 왕창왕창 하는 사이 얼혼이 빠졌는지, 우리난 공자님 말쌈을 까마득히 잊었구나. 살기가 어려워 전통마저 잊어시니 말하여 무삼하리.
이 중에 ‘구(具)장끼’라 부르는 사람이 살았으니, 그 역시 재주 넘어 안면 바꾸고 출세하였것다. 건듯 양심이 쿡쿡 폐부를 찔렀으되, 수유(須臾)에 지나지 않는지라. 천하일색 까토리 여사로 부인 삼고 십남매 아들 딸년 낳아 길러시니, 아유! 만신 풍채(滿身風采) 장부 기상 좋을시고! 구한말(舊韓末) 주영공사(駐英公使) 지냈다는 제 애비의 형용(形容) 쭈욱 빼낸 양자(樣姿)ㅣ 개기름이 게걸게걸, 그 애비의 그 아들이라.
까토리 여사 치장 볼작시면 비단이 비단이 실크(Silk) 양장(洋裝)이라, 어느 제는 잔누비 속저고리 폭폭폭(幅幅)이 잘게 누벼 변화무쌍하게 상하의복 갖추 입고, 어서 가자! 바삐 가자!…… 환락의 거리로, 꿈의 사교장(社交場)으로 줄줄이 퍼져 가며, 널랑 저기 가 놀고 우릴랑 이 쪽으로 가서 놀겠으니, 어서 가자! 바삐 살자!……
십 남매 아들딸들 부모 덕에 자알 논다. 짝짝꿍 끼여 자알들 논다. 그 부모에 그 아들놈 딸년이라, 자알 돌아간다. 세월아, 네월아! 세상이 뱅글 돈다한들 무삼 상관 있을까. 귀하신 분, 사모님이라 부르는 소래, 거참 듣기 좋다.
이리 돌아가는 적에 하루는 구장끼 군(君)이 까토리 여사더러 M동(洞) ‘달라스 홀’에서 대대적인 파아티를 배설(排設)하겠다 한다.
까토리 여사 하는 말이,
『아직은 하지 마소. 낭군 고혈압에 신경을 쓰시면 백해무익(百害無益)이라, 게다가 음주 고성방가로 이로울 일 없삽네다. 다시금 살펴보사 장충동(奬忠洞) 새 집이나 완성 되거던 한판 놀아 봅시다. 제발 덕분 첩(妾)의 말을 듣소.』
장끼 군(君) 그 말 듣고 하는 말이,
『네 말이 미련하다. 이 때를 의논하건대 양춘가절(陽春佳節) 아니던가. 장충동 새집은 네년 치맛바람이지, 내 맘으로 짓는 거냐? 싯가 사억 원(四億圓)짜리 집 쓰는 사람 팔도(八道)에 걸쳐 무릇 기하(幾何)이뇨? 내사 모르것다. 놀기는 놀아야것다.』
까토리 여사 애걸복걸, 새 집 짓거든 이봐라 하고 자랑삼아 널찍한 정원에서 가아든 · 파티 배설하고 여왕(女王) 되어 보자 무수히 권고하나 장끼 군의 고집을 어찌 꺾을손가. 우이독경(牛耳讀經)이요, 마이동풍(馬耳東風)일러라. 간밤의 흉몽(凶夢)을 풀이하되, 일갈(一喝)하여 웃어 버리네. 옛 성현 말쌈 고사(故事)를 들어가며 누누이 타이르니 무슨 소용 있을랑가. 아녀자는 약한 것이라, 사옹(沙翁) 말쌈 생각난다.
까토리 여사 그만 경황없이 물러서니, 장끼 군 하는 일 좀 보소. 뒷날 ‘옐로 페이퍼’에 등장하리만큼 핑크 색 잡탕 파아티를 고명한 ‘달라스 홀’에서 열기는 열었것다. 물 찬 제비처럼 쭉쭉 빠진 일등 미녀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까토리 여사 옆에 에스코트하야, 그저 희희 낙락 아무려나 좋기는 좋았것다. 구김살이 질소냐. 부어라, 마셔라! 고혈압은 젠장 문화병이란다. 구더기 무서워 장(醬)조차 못 담글소냐? 여어, 손님들요! 기분이 좋습네다. 다 같이 놀아 보세.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든 못 하리라.
그러하나 알 수 없난 일은 인명(人命)인지라. 거나하게 취한 장끼 군이 까토리 여사를 안고 음률에 발맞추어 ‘달라스 홀’ 가운데를 이리 저리 노닐었것다. 한참 어화둥둥 돌아가는 적에 갑자기 장끼 군이 들입다 나가떨어지며 아무 소래 없다. 이상히 여겨 본즉 이미 변통 없이 숨이 진(盡)하여 있구나. 좌중이 놀라는 소래 ‘달라스 홀’이 옴죽한다. 주치의(主治醫) 급히 불러 물으니 잠시 진맥한 후 고혈압으로 비롯한 심장마비라 단정하네. 아차, 술을 너무 꼴깍 하시더니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는가? 문화병이라 이르던 것에 명부(冥府)의 부름을 받아시니, 얄궂기도 하여라. 춘추 사십여 세에 혈압은 왜 그리 높돗던고.
까토리 거동 볼작시면, 카페트 바닥에 자락머리 풀어 놓고 당굴당굴 궁글면서 가슴치고 일어 앉아 바닥을 쥐어뜯어 애통하며 두 발로 땅땅 구르면서 붕성지통(崩城之痛) 극진하니, 십 남매 아들딸과 친구 벗님네들도 불쌍타 의논하며 조문 애곡(弔問哀哭)하니, 가련하다. 샹들리에 불 빛 아래 울음 소래 뿐이로다.
까토리 여사 슬픈 중에 하는 말이,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양약(良藥)이 고구(苦口)나 이어병(利於病)이요, 충언(忠言)이 역이(逆耳)나 이어행(利於行)이라 하였으니, 이 내 말 들었으면 저런 변(變) 당할손가. 답답하고 불쌍하다. 우리 양주(兩主) 금실 눌더러 말할소냐. 사대조(四代祖) 시할아버님도 시할머님 말쌈 안 듣고서 콩음식 잡수시다 제 명(命)에 못 돌아가셨다더니, 어쩌면 내력이 그렇게도 같을소냐. 부전자전(父傳子傳) 모전여전(母傳女傳) 역시 옳은 얘기로다. 애고애고 내 팔자야. 미망(未亡)일세. 미망(未亡)일세.』
한참 이리 통곡하나 죽은 사람 들을 리 없다.
까토리 여사 망극한 가운데서도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야 절차를 갖추고 성대히 장례식을 치른 연후(然後), 선산(先山) 양지 바른 곳에 장끼 군을 고히 묻었것다. 공산야월(空山夜月) 두견성(杜鵑聲)의 슬픈 회포 뉘라서 모르리요만, 독수공방 지킬 일이 눈앞이 캄캄하여 짓느니 한숨이요, 흐르느니 눈물뿐이더라.
그러나 저러나 억울한 건 고인(故人)일세. 그다지도 애통하여 푸드득 몸부림하던 까토리 여사 상부(喪夫)의 설움도 잊을 만하였는지, ‘구(具)장끼’ 군 생존시와 별다름 없이 다시 바깥나들이 시작한다. 삼단 같이 검은머리 양어깨에 물결 쳐 흐르고 백옥 같이 고운 양자(樣姿) 선글라스로 더욱 돋보이네. 하얀 소복 양장(素服洋裝)에 짧은 미니(mini) 자락으로 곱게 뻗은 두 다리가 요염도 할시고!……
여사(女士)가 가는 길엔 뿌리나니 화제요, 던지나니 염문이라. 묵묵부답(默默不答) 아랑곳 않고 잘도 돌아다닌다. 어딜 가든 굽신굽신 ‘레이디 퍼스트’ 소래 이제사 실감나네. 남편 생존시 각광받던 사교계(社交界), 여기서도 여왕이요. 십 남매 아들딸 제각기 집어넣은 사립학교(私立學校) 거기서도 여왕이라. 자모회(姉母會) 회장 감투는 도맡아 쓰셨것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여기서도 치맛바람, 저기서도 치맛바람!…… 아름답고 젊은 미망인이라 흠모가 대단ㅎ다.
조석간(朝夕刊) 신문은 날이면 날마다 까토리 여사 재혼(再婚) 여부로 이리 들먹 저리 들먹 하는데, 미소 짓는 여사 속셈을 뉘라서 짐작할까? 모국(某國) 대사(大使)로 가 있던 ‘갈(葛)가마귀’ 씨 오랜만에 귀국하여 잠시 여사를 방문한 것도 와그르 와그르 떠들썩하는구나. 운종룡(雲從龍)하고 풍종룡(風從龍)하며 여필종부(女必從夫)라, 개가 의사(改嫁意思) 전혀 없다 해도 웃기지 말라 하네. 왜정시(倭政時) 훈작(勳爵) 받았던 모씨(某氏) 자제 ‘오리(吳利)’ 군(君)과 동반하여 고도(古都) 유람 다닐 적에 세상 사람 모다 열이면 열이 제멋대로 짐작ㅎ더라. 그 통에 신난 것은 당대의 미남 배우(美男俳優) ‘부(夫)엉이’ 군(君)이라. 한몫 끼어 인기승세(人氣勝勢)하고 그 통에 야단난 것은 모씨(母氏) 자제(子弟) 오리(吳利)뿐이라. 무안(無顔)함이 이에서 더할손가?
이 때로 말하면 까토리 여사 친정 쪽 동생뻘 되는 여식(女息) 하나히 있어 ‘까치’ 양(孃)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리 깡퉁 저리 깡퉁 잘도 까불거리고 다니다가 숱한 사내 울린 통에 제 오라비 울화통을 슬쩍 건드렸것다. 어느 강가 길옆에서 말 안 들어 죽임 당한 때일러라. 까토리 여사 이 통에 덩달아 이름이 회자(膾炙)하니,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껑충 뛰어오르고, 까치 양(孃) 데리고 놀던 사나이들 까토리 여사 또한 모르는 배 아니라, 새삼 행동거지를 조심하더라.
이러할 즈음에 홀연 재일교포(在日僑胞) 몸으로서 광범한 해외무역을 벌여놓던 ‘신(辛)장끼’라는 사람이 있어, 까토리 여사 상부(喪夫)했단 사실 때늦게 조문(弔問)할 겸 여차여차(如此如此)하여 귀국했네. 까치 양 생존시 그녀와 스캔들 활짝 피어 측근 권고 받아들인 까토리 여사ㅣ 중개차(仲介次)로 ‘신(辛)장끼’ 군(君) 만났다가 ‘구(具)장끼’ 군 호통으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더니, 그 남편 영결(永訣)하자 이제사 또 만났네. 감개가 무량ㅎ구나. 일본(日本)은 좋다더라. 해외무역 하시느라 오락가락 노닐면서 천지간에 좋은 경개(景槪) 죄다 구경하실 테니, 그러한 생애가 당신밖에 또 있는가. 이 내 사연 들어보소. 귀 따가워 못 살겠소. 이 곳처럼 말 많은 곳 두 번 다시 있으려나!……
여사가 묵은 신문 가져다가 신(辛)장끼 군에게 뒤져 보이니, 거기에 하였으되,
『까토리 여사 葛가마귀 大使와 밀회』
『명문 吳利家와 비밀혼담 진행 중』
『까토리 여사 미남 배우 夫엉이 君과 그렇고 그런 관계?』
신장끼 군 이를 보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한다.
까토리 여사 앵돌아진 표정 얼굴 가득히 지어 보이네. 신문들 못 쓰것소. 신문들 때문에 못 살것소. 아녀자의 사생활을 이렇도록 침해하단 말가. 해외(海外)로 도피하여 사생활을 즐기자니 남편 잃은 미망인이 명분이 서지 않고,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길을 가히 알 길 없삽네다.
신장끼 군 까토리 여사 심정 대충 눈치 채고 이리 슬쩍 저리 슬쩍 마음을 떠본 연후(然後), 호감을 사기에 전력투구(全力投球)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리하여 까토리 여사 솔깃 신장끼 덕에 해외 나들이나 훌쩍하야 바람이나 실컷 쐬고 이국 정서(異國情緖) 맛보고저 신장끼 올 적마다 맞는 태도 극진하다. 극진하면 자주 보게 되고 자주 보니 정(情)드는 법이라. 정들면 떨어지기 힘드나니, 장끼 군 본심을 털어논다.
『이 내 몸 한거(閑居)한 지 삼년이 되었으되 마땅한 혼처(婚處) 없더니, 오늘에 그대 홀몸 되자 내 위로차(慰勞次) 와서 천정배필(天定配匹)을 천우신조(天佑神助)하였으니, 우리들이 짝을 지어 유자생녀(有子生女)하고 남혼여가(男婚女嫁)시켜 백년해로(百年偕老)하리로다. 일본 여성 조오타 하나 고국 여성 더 좋으이. 까치 양 보기 미안하나 그대 사랑 버릴손가. 말 많은 여길 떠나 세계일주 횡행하며 어화둥둥 사랑하세!』
까토리 여사 하는 말이 걸작이라,
『죽은 낭군 생각하면 개가(改嫁)하기 박절하나, 당신 자주 보니 수절(守節)할 마음 전혀 없고 「예-스」대답 나오려 하네. 홀아비가 예서제서 통혼(通婚)하나 마침 당신이 일본 여성 싫다 하여 고국 여성 취한다니, 이것이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까토리가 장끼 배필 됨은 의당당(宜當當)한 상사로다. 아모커나 살아보사이다.』
그러나 까토리 여사 신장끼 군과 연령차가 격심함을 한편 걱정하였으되, 그 죽으면 억만(億萬) 재산 차지하고 이국생활 즐기다가 좋은 남자 만나리라 몰래 몰래 작정하고 스리살짝 미소짓네. 어서 뜨자. 여길 뜨자. 부호 배필(富豪配匹) 맞이하여 만리타국(萬里他國) 간다 한들, 거기 가면 여기 잊고, 여기 잊으니 걱정하여 무삼하리!……
장끼 군 펄쩍펄쩍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몹시 기뻐한다. 고금(古今)을 찾아보아도 이성지합(二姓之合)은 백복지원(百福之源)이라.
며칠 지난 뒤에 까토리 여사 재혼(再婚) 결정 온 세상에 알려지니, 염문 있던 갈(葛)가마귀, 부(夫)엉이, 오리(吳利) 무안(無顔)에 취하여서 다만 까토리 여사 행복(幸福)만 빌겠다 한다.
구(具)장끼 군 소생(所生)들도 짹짹짹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저귀었다.
『이부종사(二夫從事) 않겠다고 철석같던 우리 모친 별수없이 꺾이었네.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약한 것은 역시 여자(女子)뿐이로세. 사옹(沙翁) 말쌈 야속하이.』
어찌하였건 간에 이럭저럭 하여 까토리 여사 천덕일덕(天德日德) 합하여서 좋은 날 택일한 연후 왁자하게 식(式) 올리고, 숱한 보석 예물 받아 ‘부관(釜關) 페리호(號)’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가니, 어야노야 어야노야 양주부처(兩主夫妻) 좋을시고!……
자고(自古)로 만물이 번성하여 흔할손 사람이요, 웃길손 인생이로되, 장끼 부처(夫妻) 볼작시면 세상 사람들 심금이 이상야릇 싱숭생숭 하나니, 건곤(乾坤)이 배판할 적부터 내외자웅(內外雌雄)결합한 걸 새삼스레 시비(是非)하여 어찌 하잔 말인가.
━ 출전(出典) : 『중앙문화』, 1970년호, PP. 281~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