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남편
나는 행복한 男便
나는 행복합니다.
조선시대와 다름없는 아내의 공경과 사랑 속에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으니 말이오.
내 아내는 전직(前職)이 중학교 과학교사였으나
지금은 전업주부죠.
결혼 조건으로 내가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이나 잘 하라고 했더니,
내 결정에 순순히 따르더군요.
결혼 전에 나는
자취생활을 15 년이나 했지만,
결혼 후에는 부엌일이나 가사(家事)를
제대로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쩌다가 가끔 아내가 힘들어하면
자청해서 가사를 도와준 적은 있지만,
미리 역할분담을 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도와준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월급봉투 100% 다 가져다 아내에게 줍니다.
외박 한 번 해 본 일 없습니다.
집에 와서 술주정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도 없습니다.
내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第一) 착하고 헌신적이고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내가 착해서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아이들 교육문제만은 부부가 머리를 마주 대고
오순도순 의견을 나누어 처리합니다.
나는 아내에게 언제나 조선시대 양반들처럼 경어를 씁니다.
극존칭은 아니지만 '하오체'를 씁니다.
내 아내 또한 나에게 높임말을 씁니다.
지금껏 아내가 나한테 오빠나 아빠라는
근친상간적인 용어를 쓴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고,
밥맛 없는 "자기야!……" 란 소리를
쓴 적도 없습니다.
항상 조용한 미소와 함께 다소곳이
"저기요, 있잖아요!……" 하며
아내가 나를 부르면,
나는 "여보, 나 불렀소?" 하며
아내를 바라본답니다.
부부가 너무 근엄하다고요?
천만에, 너무 다정해서 이웃이 질투를 할 지경이랍니다.
매일 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30분 내지 한 시간씩 커피타임을 갖으며
오붓이 대화를 한답니다.
하루도 대화 없는 날이 없습니다.
결혼 생활 20여 년에 크게 부부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도 나한테 극진한 내 아내가 고맙고 사랑스러워,
다음 세상에도 꼭 그녀와 함께 일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내 아내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외동아들인 나한테 시집와서
중풍에 걸린 시할머니와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홀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임종을 지킨 효부(孝婦)이기도 합니다.
난 아내가 너무 고마워 장인을 모셨고,
장인이 돌아가신 후에는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장모님과 어머니가 함께 한 집안에 사셨습니다.
두 분은 사돈지간이 아닌
형제처럼 지내셨고요.
이 글을 읽는 님이시여!……
아내가 아내답게, 남편이 남편답게 처신하며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깟 '집안 일 도와주기'로 인해
서로 티격태격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얼마 전 31년 동안의 긴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명예퇴직하여
집에서 늘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부모님들도 안 계시고 자식들도 제법 커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낮에는 우리 부부만 집에서 지내며
신혼부부처럼 깨가 쏟아지게 살고 있습니다.
오랜 직장생활 때문에 못 누린 부부의 재미를
뒤늦게 맘껏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만,
이 행복은 우리 부부가 그 동안 서로의 본분을 지키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리는
하느님의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지간(夫婦之間)에
"페미니스트(feminist),
마초이즘(machism) 신봉자,
양성(兩性) 차별,
남존여비사상……"
운운(云云)하며
서로 시비(是非)를 따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부부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해 주기를 요구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서글픈 일입니다.
님이시여!……
아내를 진정 사랑한다면
투정하지 말고,
짜증내지도 말고, 후회할 일도 하지 말고,
님의 남자다움과 대범함을 보이십시오.
때로는 사나이의 넉넉함을, 때로는 사나이의 박력을,
그리고 수시로 정열과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방금 우리 집 세 아이가
모두 등교(登校)를 하여,
이 고즈넉한 아침 나절에
나는 오늘도
아내와 손을 잡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월드컵 공원에
산책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산책길에 오랜만에 아내와
'야자 타임'(경상도 말로 '말까기 타임')을 갖으며
웃어 볼까 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003 년 12 월 22 일 동짓날
박 노 들
☞ 추신(追伸) : 제 아내와 저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기 때문에, 저의 눈에는 50살이 훌쩍 넘어버린 아내가 지금도 소녀처럼 귀엽게만 보인답니다.[;;^-^;;] 결혼을 30대 중반에 늦게 하는 바람에 30대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애아버지가 되었고, 셋째 막둥이는 40대 중반에 늦둥이로 얻어, 친구들은 벌써 손주도 보았는데 저는 아직 학부형이올시다. 늦게 얻은 행복이라서,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