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三年) 만에 찾아간 고향 집 정경(情景)
사진 ‧ 글 / 박 노 들
☞ 옥산동(玉山洞)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필자(筆者)의 생가(生家) 터.
상수내리(上水內里) 마을 전체가 거의 ‘소양강 댐(dam)’에 의해 수몰(水沒)이 되었지만, 저 생가 터만은 용케 보전(保全)되고 있다.
필자가 태어난 집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지어진 집으로서, 필자가 1950년대(年代)에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았으며, 그 후 생가 건물은 헐리고 밭이 되었는데, 여러 해 지난 후에 필자의 당숙(堂叔)께서 다시 집을 지으셨고, 소양강 댐(dam)이 완공(完工)되어 마을 주민이 모두 팔도강산(八道江山)으로 흩어진 다음에 필자의 ‘재종(再從) 아우’가 현재의 주택을 지어 지금까지 고향과 선산(先山)을 지키고 있다.
저 집터에는 광복(光復) 이듬해인 1946년부터 1956년까지 필자의 할아버님께서 서당(書堂)을 개설하시어, 10년 동안 동네 청소년들에게 한문(漢文)을 가르치셨다. 국민학교조차 없던 마을 유일의 교육기관 구실을 톡톡히 해낸 저 곳에서 필자도 서당방(書堂房) 학동(學童)들 틈에 끼여 할아버님으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면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및 ‘명심보감(明心寶鑑)’과 ‘소학(小學)’을 배웠다. 그러니까 필자는 마을에 국민학교가 생기기 전(前)까지 집안 환경에 의해 한글 ‘기역(ㄱ)’ ‘니은(ㄴ)’보다 ‘하늘 천(天)’ ‘따 지(地)’로 시작하는 한자(漢字)들을 먼저 배웠으며, 종이와 연필(鉛筆)보다 ‘분판(粉板 : 한문 붓글씨를 익히던 기름칠한 널조각)’과 ‘황모(黃毛 : 족제비 털)’로 맨 ‘붓’을 먼저 손에 잡았던 것이다.
1950년대 중엽, 마을에 정식으로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가 세워지기 이전까지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던 바로 저 곳에서 아주 지근거리(至近距離)에, 1970년대에 ‘수내국민학교 분교(分校)’가 새로 세워진 적이 있다. ‘소양강 댐(dam)’에 의해 동네의 대부분이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자, 주민 대부분은 팔도강산으로 흩어져 갔으나 일부는 마을의 산 중턱에 잔류하게 되어, 교육청의 조처로 ‘부평국민학교(富平國民學校)’에 통합하기로 했던 수내국민학교가 분교(分校)일망정 동네 주민들을 위해 새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유일의 교육기관이었던 서당방이 있던 자리의 바로 근처(近處)에서 1970년대 이후 여러 해 동안 마지막 국민학교 분교로서의 기능을 다 하던 ‘수내분교(水內分校)’도 동네 주민들과 취학(就學)할 아동들의 숫자가 대폭 감소하게 되자 결국 교문(校門)을 닫아걸고 말았다. 하지만 수내국민학교 졸업생들은 해마다 이곳에 찾아와 총동문회(總同門會) 모임을 열고, 고향과 모교(母校)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수내국민학교 동문들에게 이곳은 물에 잠긴 모교를 대신한 일종의 정신적인 ‘메카(Mecca)’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산 중턱에 외따로 자리잡고 있지만, 6070 카수(歌手) ‘남진(南珍)’ 군(君)의 히트송(hit song) ‘님과 함께’의 노랫말에 나오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처럼 예쁘게 지은 집이다.
☞ 필자(筆者)의 ‘재종(再從) 아우’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로 지은 집으로서, 집 전체가 주변의 자연 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고향 집 마당의 느티나무.
느티나무 밑의 넓은 그늘은 평소에는 가족(家族) 공동체(共同體)의 넉넉한 휴식 공간이다. 저 그늘은 매년 성묘(省墓) 때마다 회동(會同)하는 우리 가문(家門)의 ‘아고라(agora)’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고, 몇 가구(家口)에 불과하긴 하나 아직도 고향 마을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주민(住民)들의 ‘쉼터’이다, 또한 지금은 동네가 거의 없어져서 폐교(閉校)가 된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 졸업생들이 해마다 고향을 찾아와 총동문회(總同門會)를 여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 고향 집 마당에서 필자(筆者)의 재종손(再從孫) ‘민준’이의 재롱을 보고 즐거워하는 우리 마눌님^^*
☞ 재종손(再從孫) ‘민준’이가 필자(筆者)를 향해 재롱부리는 모습은 요즘 들어 ‘인기 짱!’인 아기 모델(model) ‘문(文) 메이슨’군(君)보다 훨씬 더 귀엽다.
☞ 올해에도 고향 집 마당 대추나무에 ‘사랑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네그려!
☞ 동생 집 뒤란에 열린 ‘개복숭아’를 오랜만에 보니, 그리 먹음직스럽게 영글진 않았지만, 어쨌든 반갑다.
☞ ‘개복숭아’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에서는 ‘개복상’이라고 부른다. 복숭아 자체의 맛은 별로 없지만, 그 열매로 술을 담가 먹는다.
☞ 동생 집 뒤란에 열린 ‘돌배’를 실로 오랜만에 보긴 하지만, 그리 탐스럽진 않다.^^*
☞ ‘돌배’는 시금털털하여 맛은 별로 없지만, 열매로 술을 담가 먹는다. ‘돌배술’이 ‘개복숭아술’보다는 훨씬 술맛이 좋다. 아마 술 이름에 ‘개~’ 자(字)가 안 붙어서인가 보다.^^*
☞ 개량종 ‘머루’가 크게 덩굴줄기를 이루어 고향 집 마당을 죄다 덮을 기세(氣勢)이다. 예전에는 산(山)에나 가야 머루랑 다래랑 따먹고 신명나게 “얄리 얄리 얄랑셩!……”을 외칠 수 있었는데 말이다.
☞ 아! 내 고향 팔월은 ‘머루’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시절!……
☞ 고향의 맑은 공기와 햇볕이 알알이 ‘머루송이’에 들어와 박혀, 우리의 고운 꿈조차 영글게 하네.
☞ 예전에 우리 어린 시절에는 머루 잎줄기도 따먹었는데, 군것질거리가 풍부한 요즘 아이들이 머루 줄기의 그 새콤한 맛을 어찌 알랴!……
머루는 가을철의 ‘서리 맞은 머루’가 가장 달콤하고 맛있다. 어찌 서양(西洋)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온 포도(葡萄) 따위가 토종(土種) ‘머루’의 진미(眞味)를 따를 수 있으랴. 필자(筆者)는 고향 강원도의 ‘서리 맞은 머루’의 맛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도 포도를 그리 즐겨 먹지 않아 마눌님한테서 종종 ‘눈 흘김(^0^)’을 받곤 한다.
☞ 고향에 와서 여러 해 만에 콩밭을 보니, 그 옛날 은비녀 꽂고 깔끔하게 쪽을 찐 머리 위에 흰색 수건을 두르신 채 온종일 고랑이 긴 콩밭에서 김을 매시던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난다.
☞ 동생 부부(夫婦)가 밭에 심어 놓은 고들빼기가 싱싱해 보인다.
옛날에는 야생(野生) 고들빼기만 호미로 캐서 먹었는데, 지금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누구나 밭에다 고들빼기를 재배(栽培)하여 실컷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고들빼기까지 직접 심어 먹는 동생 부부(夫婦)의 근면함에 머리가 숙여진다.
야생종(野生種) 고들빼기는 사람이 손수 기른 것보다 그 맛이 무척 쓰다. 그래서 야생종 고들빼기 ‘날것’을 누구나 다 즐겨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자(筆者)는 한 입 베어 물면 흰색 진액(津液)이 나오는 자연산(自然産) 고들빼기 날것을 뿌리째 고추장에 찍어 먹기를 즐기곤 한다. 고들빼기로 담근 김치도 즐겨 먹기는 하지만, 들판이나 야산(野山)에서 금방 캐어 온 고들빼기, 그것도 아무런 가미(加味)도 하지 않은 고들빼기 ‘날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필자의 식성(食性)을 다른 사람들은 엽기적(獵奇的)으로 보기까지 하지만, 옛 어른들은 모두 필자와 같은 방식으로 고들빼기를 즐겼다. ‘외가(外家)집의 지체가 높은 사람’이 입에 쓴 고들빼기를 잘 먹는다는 말까지 곁들여 가며, 옛날 어르신들은 당신(當身)들의 외가댁(外家宅) 신분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방금 밭에서 캐 온 고들빼기를 양념도 전혀 안 한 채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열심히 잡수셨다.
그런데 필자의 아들딸 세 녀석은 한결같이 고들빼기를 싫어한다. 아마 자기들 엄마의 친정(親庭) 집안이 친가(親家)인 박씨 문중(朴氏門中)보다 지체가 낮음을 본능적으로 터득(攄得)하였나 보다.^^*
☞ 동생네 텃밭에 심어 놓은 고추가 다닥다닥 열매를 맺었다. 가을이 다가와서인지 벌써부터 바알갛게 익어가는 고추들이 상당히 눈에 띈다. 올해 여름 날씨가 순조롭지 않아서인지 모양새는 별로 예쁘지 않고 엉털멍털하게 보인다. 아무려면 어떠랴! 어서어서 주렁주렁 풍성한 결실(結實)을 맺어, 고추장 담그기에 부족하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닌가.
☞ 필자(筆者) 어린 시절에 친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서당(書堂)의 학동(學童)들과 매일 뛰놀던 옥산동(玉山洞) 산기슭의 속칭(俗稱) ‘잔디버덩’ 자리. 저 곳은 생가(生家) 바로 뒤편 언덕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바로 저 ‘잔디버덩’ 언덕에서 서당방 형(兄)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두 다리를 벌리고 ‘목말’을 타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필자의 눈에 아물거린다. 금잔디 무성하던 그 ‘잔디버덩’에서 뒹굴던 학동(學童)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 버리고, 지금 그 자리에는 온갖 작물(作物)들만 무성하다.
2008 년 8 월 16 일
고향의 동생네 집 앞에서
'아, 그리운 내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0) | 2009.03.18 |
---|---|
성묘차(省墓次) 찾아간 내 고향 (0) | 2008.08.24 |
내 고향 옛 동산에 올라 (0) | 2008.08.21 |
중학교 때 찍은 사진에서 떠올린 이런저런 추억(追憶) (0) | 2008.05.03 |
수내국민학교 동문 카페(Cafe) 회원 가입 인사 (0) | 2008.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