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地名] 유래

우리 고향 난뿌리(蘭根洞)와 옥산동(玉山洞)의 땅 이름 유래(由來)

noddle0610 2015. 7. 18. 22:00

 

 

우리 고향 난뿌리(蘭根洞)와 옥산동(玉山洞)의 땅 이름 유래(由來)

 

 

 ☞ 소양강댐 완공 후에 물에 잠긴 '난뿌리(蘭根洞)' 버덩(소양호 오른쪽)

 

 

  지금은 소양강댐(昭陽江Dam) 속으로 사라진 우리 고향 상수내리(上水內里)에서 제가 유소년기(幼少年期)를 보내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던 곳 난뿌리와 간신히 수몰(水沒)을 피하고 살아남아 아직도 묵묵히 고향 땅을 지켜 주고 있는 옥산동(玉山洞)의 유래(由來)에 대해 언급해 보렵니다

 

  난뿌리는 강원도(江原道) 양구군(楊口郡) 남면(南面)의 상수내리(上水內里)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소양강 건너 쪽 야트막한 산기슭과 그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버덩(높고 평평하며 풀만 우거진 거친 들판) 일대(一帶)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地名)입니다. 이 난뿌리상수내리(上水內里) 마을에서도 가장 전형적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를 띤 이른바 명당(明堂) 터였습니다. 그래서 이곳 산기슭에는 예로부터 원근(遠近)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러 집안의 묘(墓)가 많이들 모셔져 있었지요.

  애초에 난뿌리는 그 땅의 형세가 마치 난초(蘭草)의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한자(漢字) 난초 난(), 뿌리 근(), 마을 동(), 난근동(蘭根洞)으로 표기했지요. 우리말로는 난뿌리라 불렀는데, 난뿌리를 빨리 발음하면 우리 귀에 남뿌리로 들렸습니다. 그 까닭은 국어 문법상(國語文法上)으로 받침이 의 첫소리 의 영향을 받아 자음동화 역행동화 불완전동화 현상이 한꺼번에 일어나 으로 발음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입으로 말할 때는 보통 남뿌리라고들 했지만, 정작 공식문서(公式文書)에는 난근동 난뿌리라 표기(表記)했습니다.

 

  이제는 난뿌리가 소양강댐(昭陽江Dam) 속으로 잠겨 버려서 지도상(地圖上)에서도 그 정겨운 뉘앙스(nuance)의 낱말이 사라진 지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아직도 상수내리(上水內里) 마을에 살다가 전국(全國)으로 흩어진 실향민(失鄕民)들의 가슴 속엔 남뿌리라는 토속적 명칭으로 생생히 살아 있으며, 그들의 집안에 보관되어 전해지는 족보(族譜) 속에는 상당수 선영(先塋)의 소재지(所在地)로서  난근동(蘭根洞)이란 기록이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소양강댐(昭陽江Dam)의 완공과 더불어 난뿌리산기슭과 드넓은 버덩(높고 평평하며 풀만 우거진 거친 들판)에 흩어져 있던 각 문중(門中)의 묘(墓)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일부 무덤들은 주인공의 집안이 몰락해서 그 후손들의 소재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6.25 동란 때 이곳 전투에서 죽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무덤은 본래 봉분(封墳)조차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1970년대 초에 소양강댐(昭陽江Dam) 속에 영원히 잠기고 말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저희 조상님 중 몇 분의 묘지가 난뿌리 산기슭에 모셔져 있었는데, 그분들은 시제(時祭)를 지낼 때만 우리 박씨 문중(朴氏門中) 전체가 찾아 뵈었던 조상님들이니까 저에겐 5대조(五代祖) 이상의 할아버님 할머님들이십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집안에서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서인지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중반에 난뿌리 기슭에 모셔져 있던 조상님들을 우리 마을의 다른 산으로 이장(移葬)해 새로 모셨습니다. 지금부터 40여년 전에 엮은 밀양박씨(密陽朴氏) 충헌공파(忠憲公派) 대동보(大同譜)에는 그때까지 난뿌리 기슭에 모셔져 있었던 저희 조상님들의 묘지 소재지를 난근동(蘭根洞)이라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남뿌리의 어원(語源)이 난뿌리이며, 공식적 지명(地名)이 한자(漢字)로 난근동(蘭根洞)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상수내리(上水內里) 마을의 옥산동(玉山洞) 산등성이.  

  

 

 

 수몰(水沒)을 피해 호젓이 살아남은 옥산동(玉山洞) 산기슭의 기와집. 이 집은 전국(全國)에 흩어진 수내국민학교  졸업생들이 1년에 한 번씩 총동창회를 열어 상봉(相逢)의 정()을 나누는 곳이다.      

 

 

  제 고향 상수내리(上水內里)에는 옥산악골이란 곳이 있는데, 마치 산악(山嶽) 전체가 옥(玉)처럼 빼어난 자태를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만, 그 공식적 지명(地名)은 옥산동(玉山洞)이라고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옥산동(玉山洞)을 우리말로 옥산악골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부분 억산악골이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즉, 억센 산악과 산골짜기라는 뜻이겠지요. 예전에 심미안(審美眼)을 지닌 벼슬아치들이나 선비님들의 눈에는 산악 전체의 모습이 옥(玉)처럼 빼어난 자태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매일 매일 험준(險峻)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땔나뭇짐을 지게로 힘겹게 나르던 나뭇군들이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아낙네들에겐 너무도 억센 산악이자 산골짜기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느낌 그대로 억산악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옛날 관가(官家)에서는 부정적 이미지의 억산악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긍정적 이미지의 옥산악골의 뜻을 살려 옥산동(玉山洞)이라고 공식적인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여, 오늘날 정밀지도(精密地圖)에는 옥산악골이 아닌 옥산동(玉山洞)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사람들의 입에 익숙하게 오르내리는 땅 이름을 정작 공식 문서에선 구어체(口語體)가 아닌 문어체(文語體)의 한자어(漢字語)로 표기하는 관습(慣習)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시대(朝鮮時代)의 한양(漢陽) 서울에서 노들나루  노량진(鷺梁津),  검은돌 흑석동(黑石洞),  붓동네 필동(筆洞),  먹골 묵동(墨洞)삼개 마포(麻浦),  애오개 아현동(阿峴洞),  배오개 이화동(梨花洞),  독바윗골 응암동(鷹岩洞),  새문안길 신문로(新門路),  되넘이고개 돈암동(敦岩洞)따위로 표기했듯이 말이지요.

 

  어쨌거나 오늘날 저희 고향 상수내리(上水內里)마을 전체는 소양강댐 속으로 잠겨 버렸지만  옥산동(玉山洞)만은 수몰(水沒)을 피해 지금도 마을 원주민(原住民) 몇 분이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전형적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를 띤 이른바 명당(明堂) 터였던 난뿌리는 오히려 1970년대의 산업화(産業化) 시대의 도도한 물결을 피하지 못하고 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당시까지 겨우 집 두어 채만 있었던 두메산골  옥산악골옥산동(玉山洞)은 현재 행정구역이 강원도 양구군에서 인제군(麟蹄郡) 남면의 관할(管轄)로 바뀌긴 했어도 상수내리(上水內里)마을을 존속 시키는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옥산동(玉山洞)은 전국으로 흩어진 실향민(失鄕民)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아오는 만남의 장소이자 상수내리(上水內里)유일의 교육 기관이었던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 졸업생들이 해마다 한 번씩 찾아와 동창회를 여는 일종의 메카(Mecca) 구실을 해내고 있습니다.

 

  저는 1940년대 후반기에 상수내리(上水內里)마을의 옥산동(玉山洞)에서 태어나 1950년대 후반기에 우리 동네를 관통해 흐르던 소양강을 매일매일 나룻배를 타고 건너  난뿌리산기슭 바로 밑에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를 띤 채 6.25 동란 직후에 세워진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를 다녔습니다.

 

  1970년대 초에 소양강댐의 완공과 더불어 사라진  난뿌리버덩의 수내국민학교(水內國民學校)와  상수내리(上水內里)마을의 정겹던 인정(人情)들, 그리고 제가 태어난 옥산동(玉山洞)산기슭의 고즈넉하면서도 준수(俊秀)한 모습이 저에겐 지금 이 시간에 너무나 너무나 그립습니다.  

 

 

2015 년 7 월 18 일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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