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讀後感)

[독후감] 열하일기(熱河日記)

noddle0610 2006. 7. 30. 19:23

 

    

     [독후감(讀後感)]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통칭(統稱) 기행문(紀行文)의 반열(班列)에 두어 버리기에는 어딘가 서운한 느낌이 들 만큼 집필자(執筆者)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의 번뜩이는 예지(叡智)와 해박한 학식(學識), 종횡무진(縱橫無盡)한 문재(文才)와 역량(力量)이 그 특유(特有)의 신선(新鮮)한 문체(文體)로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는 일세(一世)의 명저(名著)이다.


국가(國家)사회(社會)인륜(人倫)정치(政治)경제(經濟)ㆍ외교(外交)ㆍ문화(文化)ㆍ학술(學術)ㆍ종교(宗敎)ㆍ사상(思想)ㆍ풍속(風俗)ㆍ역사(歷史)ㆍ문학(文學)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병사(兵事)ㆍ기술(技術) () 망라(網羅)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관심을 두고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한 연암(燕岩)의 전부(全部)가 그의 생애(生涯)에서 비로소 클로즈업(close-up)되어 나타난 저술(著述)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임에랴!


완고(頑固)한 성리학(性理學)과 숭명사상(崇明思想)으로 무장(武裝)한 부유(腐儒)들만이 행세(行勢)할 수 있었던 연암(燕岩) 당시(當時)의 우리나라는 서양(西洋)의 새로운 자연과학(自然科學) 정신(精神)과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조류(潮流)에 의해 바로 이웃 나라 중국(中國)에까지 밀려와 정체(停滯)의 긴 잠에서 깨어나도록 요구(要求)받고 있던 중대(重大)한 전환기(轉換期)였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세계 대세(世界大勢)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 아니 오히려 헛된 주자학적(朱子學的) 명분(名分)과 봉건적(封建的) 신분제(身分制)에 얽매여 실생활(實生活)을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ㆍ이용후생(利用厚生)ㆍ경세치용(經世致用)의 문제(問題)는 애써 외면(外面)한 채, 수구(守舊)의 동면(冬眠)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있었던 어둠의 시대(時代)였다.  그러나 중국(中國)의 속방(屬邦)이라는 멍에로 인(), 숭명멸청(崇明滅淸)을 외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청국(淸國)과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던 조선(朝鮮)으로서는 자연(自然)스레 청조(淸朝) 문화(文化)의 자극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ㆍ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ㆍ성호(星湖) 이익(李瀷)ㆍ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ㆍ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 일군(一群)의 학자(學者)들이 줄을 이어 나타나, 반보수적(反保守的)이면서 혁신(革新)을 요구하는 신사조(新思潮)를 부르짖을 만큼 근대(近代)의 여명기(黎明期)에 접어든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背景)으로 태어났기에 연암(燕岩) 역시 수구(守舊)와 신사조(新思潮)의 갈등(葛藤) 속에서 그 생애(生涯)를 고단하게 살아야만 했다.


연암(燕岩)의 많은 저작물(著作物) 가운데 가장 대표적 명저(名著)인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그가 44(-) 되던 1780년 경자(庚子 : 正祖 4) 5 25일 삼종형(三從兄)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수행(隨行)하여 청()의 건륭황제(乾隆皇帝) 고종(高宗)의 칠십수경(七十壽慶) 진하사절(進賀使節)로 연행(燕行)하였을 때, 6 24일부터 동년(同年) 8 20일까지의 입연(入燕) 도중(途中)이나 북경(北京)ㆍ열하(熱河) 등지(等地)에서의 견문(見聞)ㆍ담론(談論)ㆍ소감(所感)ㆍ삽화(揷話) ()을 일기(日記)로 쓴 것이다. 그러나, 열하(熱河)로부터 연경(燕京)에 돌아올 때까지는 일기체(日記體) 기행문(紀行文)으로 기술(記述)하고, 그 후()는 단지 기행문 형식으로 구성(構成)하였다.


장마가 그친 후의 압록강(鴨綠江)을 편주(扁舟片舟)로 건너는 위험한 장면(場面), 중국(中國) 산천(山川)의 기후(氣候) 및 풍속(風俗)ㆍ제도(制度)ㆍ문물(文物)의 우수성(優秀性)과 가옥(家屋)ㆍ도로(道路)ㆍ다리ㆍ배ㆍ말[] 따위의 뛰어남에 대()한 묘사(描寫), 중국(中國) 마술(魔術)에 대한 호기심, 몽고인(蒙古人)과의 대작(對酌), 서장(西藏) 라마교() 교주(敎主)와의 면접(面接)에 대한 해학적(諧謔的) 표현, 열하(熱河)의 황제(皇帝) 피서지(避暑地) 건물(建物) 규모에 대한 경탄(驚歎), 태학관(太學館) 체재시(滯在時) 중국(中國) 명사(名士)들과의 교유기(交遊記)—— 천하(天下) 고금지사(古今之事)에 관한 담론(談論)ㆍ도학(道學) 토론(討論)ㆍ우주관[宇宙觀 : 지구(地球) 공전(公轉) 및 자전(自轉)에 대한 견해]ㆍ음악(音樂) 논의[論議 : 중국 음악에 관한 소감(所感) 및 조선(朝鮮) 아악(雅樂) 비평(批評)] —— () 역사ㆍ지리ㆍ풍속ㆍ습상(習尙)ㆍ고거(考據)ㆍ건설(建設)ㆍ인물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ㆍ문학ㆍ예술ㆍ고동(古董)ㆍ천문(天文) () 각 부문(各部門)에 걸쳐,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重點)을 두어, 특유(特有)의 발랄(潑剌)ㆍ신선(新鮮)한 문체(文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 전() 26 ()으로서,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가운데 단연(斷然) 백미적(白眉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본()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애초 명확한 정본(定本)이나 판본(板本)이 없이 수많은 전사본(轉寫本)만이 유행(流行)하여 그 편제(編制)의 이동(異同)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래(近來)에는 연암(燕岩)의 수사본(手寫本)ㆍ수택본(手澤本)을 근거로 삼되 빠진 부분은 몇 십종(十種)의 이본(異本)들을 대조(對照)하여 판본(版本)이 나오기도 하고, 특히 최근에는 국역본[國譯本 : 李家源 , 熱河日記, 韓國名著大全集, 大洋書籍, 1973年版)까지 나타나 한문(漢文) 독해력(讀解力)이 부족한 독자(讀者)들과 연암(燕岩)과의 거리(距離)를 좁혀 주고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독파(讀破)하고 나서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연암(燕岩)의 위대(偉大)한 실학 정신(實學精神)과 생기(生氣) 있는 문장(文章)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알레르기(Allergie)적 반발(反撥)에 봉착(逢着)—— 연암(燕岩)을 갈릴레오(Galileo)적 갈등에 빠트려—— 그의 정신이 발전ㆍ계승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은사(隱士)의 나라’ 조선(朝鮮)을 모처럼 만에 활짝 개화(開化)시킬 기회를 유실(遺失)—— 일본(日本)보다 낙후(落後)하게 만든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점()이며, 연암(燕岩)의 위대한 사상이 그 몽매(蒙昧)의 시대에 외따로 꽃을 피웠다는 데 대한 경탄(驚歎)과 현대인(現代人)으로서도 압도(壓倒)될 만한 그 폭()넓은 식견(識見)에 대한 후학(後學)으로서의 부러움, 그리고 이백 년 전(二百年前)의 그가 비판적으로 술회(述懷)한 내용들 가운데 상당 부분(相當部分) 오늘날과도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1980 7 월 그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