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시(祝詩)-기념시

4월에 부치는 혈시(血詩)

noddle0610 2006. 4. 21. 02:26

 

 

 

4월에 부치는 혈시(血詩)

4.19혁명 제9주년을 맞아

                                                                          

 

                                   

 

               어허, 세월 참 빠르이.

 

               이 지음 청계천 하늘길로

               부르릉 드라이브도 못하는 슬픔,

 

               창경원 수정궁 앞에

               그미와 보트를 못 타는 것꺼정

 

               도대체 세월이 아쉬워, 아쉬워!

 

               지난 삼동(三冬)에 진눈깨비 내리더니

               아소, 4월인가.

 

               진달래 아름 따다

               내게 안겨 주는 백의(白衣)의 손길이

 

               차라리 고맙네.

               그미는 이제 잊어버릴라.

 

               추억과 열망을 뒤섞는 4월에

               나는 그미를 잊어야 해.

 

               붉은 꽃을 피우고 숨져 가던

 

               아하, 나의 피를 뜨겁게 하던

               호흡들이여.

 

              4월은 잔인한 달

               ……………………

               겨울이 오히려 따스했다.

  

               악다구니로 대들던 무리들과

               붙어 싸우던 우리를

 

               이젤랑은 모두 몰라

               사랑꺼정 몰라.

 

               아으 다롱디리, 조국!

               우리들의 조국이여!

 

               개나리 진달래랑

               함빡 핀 4

               …………………… 

         

               잃어버린 내 젊음을

               보상(補償)하라.

 

 


1969419

 

 


 

                   

  뒤늦은 창작 후기(後記) 

 

  2006419!……

  어느 사이에 4.19혁명 제46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덧없이 빠르다는 옛 선인(先人)들의 말씀을 새삼 실감(實感)합니다.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역사 전개와 함께  의 궤적(軌跡)을 나란히 밟아 온 저는 제1공화국 자유당(自由黨) 정권(政權) 때 초등학교를, 제2공화국 민주당(民主黨) 정권(政權)과 5.16 군정(軍政) 기간에 중학교를, 제3공화국 시절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고, 제4공화국인 유신(維新)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였으며, 제5공화국 시절에 만혼(晩婚)을 하여 첫딸을 얻었고, 제6공화국 1기(期) 노태우 정부 시절에 둘째 딸을 보았으며, 제6공화국 2기 김영삼 정부 때 불혹(不惑)의 나이가 지났지만 농장지경(弄璋之慶)의 행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저의 만득자(晩得子)는 6공(六共) 3기인 김대중 정부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4기 노무현 정권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으며, 저는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에 31년의 공직생활(公職生活)을 접고 은퇴하여, 현재 집에서 푹 쉬고 있습니다.


  각설(却說)하고…….


  제 인생의 황금기(黃金期)는 대학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유신(維新) 이전(以前)인 제3공화국 때 대학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김대중(金大中) 전대통령(前大統領)도 한동안 제3공화국 헌법(憲法)을 민주공화국 헌법의 전형(典型)으로 생각하여, 유신헌법이나 5공 헌법 개정 운동 당시 집권층을 향해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3선 개헌(改憲)을 기도(企圖)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제3공화국 시대는 더 길어졌으리라 생각하며,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만개(滿開)할 수 있었으리라 사료(思料)됩니다.

  4.19 혁명 때 젊은 학생들이 흘린 숭고한 피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제3공화국 시절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를 연인(戀人)처럼 소중하게 사랑하면서도 그 민주주의가 혹여 추호라도 변색(變色)할까 염려한 나머지, 공화당 정권의 졸속적인 한일수교(韓日修交) 추진과 6.8 부정선거를 규탄하였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3선 개헌 추진을 반대하면서 20대(代) 시절을 보냈습니다.

 

  강원도 산골 출신인 제가 서울에 유학(遊學)하여 대학교를 다니던 1968년도에 우리 나라는 1.21사태프에블로호(號) 납치 사건을 겪었고, 울진 삼척 무장공비(武裝共匪) 사건을 겪은 바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1969년 봄이 되었을 때도 우리 나라는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시국(時局)이 격랑(激浪)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 해 봄 4.19혁명 9주년에 즈음하여 [10주년을 1년 앞둔] 국내 각 신문(新聞)과 방송에서는  회고조(回顧調)의 기사(記事)들을 대대적으로 보도(報道)하였습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기사는 4.19 혁명 와중에서 부상(負傷)을 당해 장기입원(長期入院) 중인 젊은이들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꿈과 낭만을 안고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불의(不義)를 보고 참지 못해 거리로 나섰던 그들은 중상(重傷)을 입어 10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하여야 했고, 긴 병에 효자(孝子) 없다는 옛말 그대로 친구와 애인(愛人)마저 그들 곁을 떠나가 버려 외로운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거의 잊혀진 채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 서울에는 청계천이 복개(覆蓋)되고 바로 그 위에 스카이웨이(skyway)가 길게 놓였습니다. 신성일(申星一)과 엄앵란(嚴鶯蘭)이 청계천 고가도로(高架道路) 위를 드라이브(drive)하는 장면이 촬영되어 아카데미극장국제극장 국도극장등에서 영화로 상영되었으나, 4.19 상이(傷痍) 학생들에게는 막상 구경할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필리핀(Philippines)보다 훨씬 더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당시 서울 시민들에게 지금은 없어진 창경원(昌慶苑)의 벚꽃놀이와 수정궁(水亭宮) 앞 호수(湖水) 위에서의 보트(boat) 놀이가 봄철의 행락(行樂)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만, 4.19 상이(傷痍) 학생들에게는 역시 구경 갈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장기입원(長期入院) 중인 젊은이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저는 가슴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격정(激情)을 억제하지 못해 그 소회(所懷)를 원고지(原稿紙)에 써 내려갔습니다.


  당시(當時) 제 딴에는 피를 토(吐)하는 심정으로 썼기 때문에 제목을 4월에 부치는 혈시(血詩)라 했던 것입니다.

          

 

2006년 4월 19일

 

박   노  들  

 

 

 

39691

 

 

'축시(祝詩)-기념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모곡(思母曲)  (0) 2007.05.08
아가를 위한 서시(序詩)  (0) 2006.06.12
아직도 남은 이야기는 많으나  (0) 2006.03.23
가을꽃에 취하여  (0) 2006.01.18
짙은 꽃향기를 남기시고  (0) 200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