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안방에 ‘워낭’이 있는 까닭은
우리 집사람 손에
들려 있는
‘워낭’이
내 귓가에 다가와
맑은 소리를 내면
몽롱(朦朧)한 상태로
잠들어 있던
내 영혼이
조용히 깨어나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워낭 소리’는
언제 들어도
밝은 소리로
바가지를 긁는
아내의 음성과
어울려서
짤랑짤랑 ♬♪
쟁쟁(琤琤)하다.
농사짓던 고향을
떠난 지
어언(於焉) 오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워낭을 아직껏
버리지 않고
집에다 간수한 까닭은
내가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우리 집 소
‘왕눈이’의
맑은 눈과
녀석이 육중(肉重)한
고갯짓으로
짤랑짤랑 ♪♭
들려 주던
워낭소리에 대한
짙은 그리움
때문이다.
워낭을 아직껏
버리지 않고
집에 간수한 까닭에
농사짓던 고향을
떠난 지
어느새 오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농사꾼 자식임을
잊지 않을 수 있었고
늘 분수(分數)를 지키며
살 수 있었다.
소처럼 우직하고 조용히
농군(農軍)처럼 겸손히
워낭소리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단 한 번도
자기 주인(主人)을
거스른 적 없이
묵묵히 일만 하다가
마침내 병들어 죽은
우리 집 누렁소
왕눈이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내 아내는
도회지(都會地)
출신이지만
농촌 출신 총각에게
시집와서
세 아이를 낳고 살더니,
지금은 저 인디아(India)의
‘힌두교’ 신자(信者) 못지않게
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집사람은
단 한 번도 소를
키운 적은 없지만
집에 있는 워낭을
깨끗이 손질할 때마다
소에 대한
낭만적 상상(想像)을
그녀 나름대로
펼치기도 한다.
맑은 목소리를 지닌
내 아내와
청아(淸雅)하고
쟁쟁(琤琤)한
워낭소리는
서로 잘 어울린다.
우리 집사람 손에
들려 있는
워낭이
가끔씩 장난스럽게
내게 다가와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면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내 동심(童心)이
고개를 반짝 들고서
아내와 함께
벙글거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농사짓던 고향을
떠난 지
하마 오십 년이
다 되어 가건만
나는 오늘도
한낱 놋쇠 덩어리에
불과(不過)한
워낭을
우리 집 안방에다
고이 모셔 놓고
지낸다.
2009 년 5 월 4 일
※ 하마 : [부사] ‘벌써’의 사투리. 강원도-경상도-충청북도 지방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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