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私信) 모음

큰조카딸에게 보내는 편지

noddle0610 2005. 9. 26. 14:10

 

 

 

 

 

 

 

 

큰조카딸에게 보내는 편지

 

 

  요새 어머니 전시회(展示會) 때문에 고생이 많지?

  그러나 어머니가 얼마나 자랑스러우시냐?

 

  아름다운 은퇴생활(隱退生活)을 하시는 너희 어머니가 존경스럽구나.

 

  직장생활을 접기는 하셨지만 오히려 지금이 너희 어머니의 삶에서 가장 보람스러운 절정기(絶頂期)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24일 저녁때, 인사동(仁寺洞) '경인미술관(耕仁美術館)'에 가서 전시회 오픈(Open) 전(前)에 미리 게시(揭示)된 그림들을 죽 둘러보았단다.

 

  특이한 것은 한결같이 전시된 작품들의 테마가 ''이었다는 점이었어.

 

  흔히 전시회를 가 보게 되면, 잡다(雜多)한 소재(素材)들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式)으로 다루고 있음을 구경하게 되는데, 너희 어머니 김화백(金畵伯)께옵선 꽃에 대한 집중적인 접근과 표현을 수십 점(數十點)의 그림들을 통해 일관성 있게 보여 주시더구나.

 

  언제 그렇게 많은 작품들을 준비하셨는지, 또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셨는지, 그리고 작품 한 점(點) 한 점(點)에 배어 있는 정성과 조화미(調和美), 정갈한 미학(美學)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단다.

 

  마치 이 가을 들녘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처럼 너희 어머님의 꽃그림들이 갤러리(gallery) 안에 활짝 만개(滿開)한 채, 미술에 문외한(門外漢)인 나같은 사람에게조차 그 은은한 향기에 취(醉)하게 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해 주시더구나.

 

  봄여름 마다하고 가을에 고즈넉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젊은 시절에는 오로지 너희 자매를 부양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시느라 고스란히 숨겨 놓으셔야 했던 재능을 이제서야 고즈넉하게 꽃피우시는 것 같아, 나는 너희 어머니 자체가 '가을꽃 여인(女人)'이라고 느꼈단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춘풍(三月春風) 마다하고

  낙목 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옛 선인(先人)의 시조(時調) 한 수(首)가 떠오르더구나.

 

  그러면서 내 가슴속에도 너희 어머니 이미지(image)와 꽃 그림 이미지가 오버·랩(Overlap)되면서 이런저런 감상(感想)들이 시(詩)처럼 보글보글 떠올라, 그 즉시 미술관(美術館) 정문(正門)께로 나아가 메모지를 꺼내어 들고 누가 보건 말건 몇 자(字) 끼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 날 저녁 전시장에서 느꼈던 단상(斷想)들을 '가을꽃에 취하여'란 제목으로 다듬어서, 너에게 메일(e-Mail)로 보냈으니까 꼭 읽어 보렴.

 

  참 유치(幼稚)하지?
  너무 센티멘털(sentimental)해 보이지? 

 

  그치?……^^* 

 

  본디 대상(對象)을 처음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으면, 그 순간만은 누구의 글(感想)이라 할지라도 거의 모두들 유치하고 센티멘털해 보이느니라.

 

  좀 더 다듬어서 훌륭하게 퇴고(推敲)한 글을 너한테 보내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러면 너무 가식적인 글이 되고 말 것 같아, 진솔하게 처음 느꼈던 단상(斷想)들을 맞춤법만 조금 고쳐서 걍(^-^) 너한테 보낸다.

 

  언제나 믿음직한 조카따님!……

 

  훌륭하신 어머님 못지않게 너 또한 직장생활에도 충실해야 하겠지만 너의 재능을 찾아 갈고 닦으렴. 


  너 또한 나름대로의 꽃을 피워야 하지 않겠니?

  충분히 해내고 말리라고 믿는다.


  너한테 처음 보내는 편지(Mail)에 내가 너무 중언부언(重言復言)했나 보다.

 

  요새 이 못난 이모부(姨母夫)가 불면증 때문에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해서 공연히 조카한테 횡설수설하며 주접을 떨었구나.

 

  이제 곧 날이 밝아 오면 우리 부부(夫婦) 결혼 21주년 기념일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늦잠이나마 자리에 누워야 할 것 같아 여기서 글을 맺으련다.

 

  자, 그럼 오늘밤에 고운 꿈 많이 꾸렴. 

 

  너와 윤씨 가문(尹氏家門)에 항상 하느님의 사랑과 가호(加護)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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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스무 엿샛날 새벽 3시 40분에

 

부덕(不德)한 여섯째 이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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