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자
조 병 화 시(詩)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세대교체(世代交替)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담담(淡淡)하면서도 진지한 어조(語調)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이자 제재(題材)인 ‘의자(椅子)’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기구’, 즉(卽) ‘인간의 존재성’을 의미합니다.
이 시 첫 연(聯)에 보이는 ‘아침’은 ‘새 세대, 새 역사, 희망,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새 세대, 새 역사, 희망, 이상을 우리 기성세대가 가로막아서는 안 되겠지요.
이 시에 나타나는 ‘어느 분’이 어느 날 ‘나’에게 선선히 의자를 물려준 선세대(先世代)였듯이,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나’는 나보다 나이는 어린 사람이지만 약동하는 신세대(新世代)에게 선선히 자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어린이, 아니 ‘어린 분’들이지만 그들은 인생의 아침을 맞아 티 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희망의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눈에 집어넣어도 시원찮을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 아이들의 인생에 우리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못다 한 새 역사를 꾸밀 새 희망의 신세대를 위해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언젠가는 기꺼이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물러나야 할 때가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오면, 우리 기성세대는 ‘자리바꿈’을 서운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펼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期待感)의 표현으로 ‘의자’에서 얼른 일어나 반갑게 그들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 젊은 날 우리에게 자리를 물려준 어느 분처럼 말입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다면, 우리 후배들에게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물려줄 그날을 경건하게 기다리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가 그 동안 앉아 있던 ‘자리’에 대한 모든 미련을 떨치고 마음 정리를 하여 둡시다.
늦둥이를 둔 어버이가 자식들이 어서 빨리 자라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여 주기를 바라듯이, 우리 후배들에게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기성세대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유능한 후배들이 어서 빨리 벗겨 주기를 기대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과연 그들이 우리만큼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은 기우(杞憂)입니다. 우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신 과거 선배님들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듯이,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더 좋아질 테니까요. 너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면, 그것은 자칫 현재의 자리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세대교체는 역사의 필연이자 당위이고, 천리(天理)이자 운명입니다. 누가 운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여러분!
우리 인간의 유한적(有限的) 존재에 대한 인식, 천리(天理)에 대한 순명(順命)과 달관(達觀)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 지금 이 순간부터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합시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누군가 노래하였듯이, 추하지 않고 기품 있게 우리가 앉아 있던 그 ‘의자’를 비워 줍시다.
새로운 세대가 펼쳐나갈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 그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며 뜨거운 격려를 해 주십시다.
2005 년 10 월 6 일
아침 여섯 시
박 노 들
▶추신(追伸) : 젊은 시절 한때 사사(師事)한 적이 있는 고(故) 조병화(趙炳華) 선생님의 대표시(代表詩) ‘의자(椅子)’를 평소 즐겨 애송하곤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소생(小生) 또한 31 년의 긴 공직생활(公職生活) 동안 앉아 있던 ‘의자’를 후진(後進)들에게 미련 없이 물려주고 은퇴하여, 지금은 누옥(陋屋)의 연구실에서 독서 및 집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