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나루 새우젓축제 구경

제7회 마포나루 새우젓축제를 다녀와서

noddle0610 2014. 10. 28. 09:14

 

 

 

7회 마포나루 새우젓축제를 다녀와서 

최광천(崔廣川) 선생님 () 상서(上書)

 

 

 

 

 

 

 

 

 

 

 

 

 

 

 

 

 

 

 


 

 

 



선생님! 


  선생님을 오랜만에 모시고 회포(懷抱)를 푼 것이 바로 어제 같사온데, 어느새 열흘이 훌쩍 흘러가 버렸군요 


  그간 별고 없으셨겠지요? 


  해마다 한두 번씩은 이 못난 후생(後生)을 잊지 않고 꼭꼭 챙겨 주시는 선생님께 무엇이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직장생활을 접고 은퇴한 지 십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가까운 친구들도 하나 둘씩 이승을 하직하거나 병상(病床)에 눕게 되고, 불초 소생(不肖小生) 또한 친구들보다는 병원을 더 자주 찾게 되니, 근년(近年)에 저의 신세는 사실상 너무 외롭고 서글프기 짝이 없었사온데, 그래도 선생님께옵서 저를 기꺼이 찾아 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 몇 해가 흐른 2006년 정월(正月) 어느 날 소생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경(死境)을 헤맬 때도 선생님이 저의 곁을 지켜 주셨고 신속히 대학병원으로 후송시켜 주셨기에 이 몸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렇게 살아남아 있사옵고, 그 이후 선생님에게서 받은 재생지은(再生之恩)은 늘 잊지 않고 저의 가슴에 아로새겼사오나, 아직껏 선생님께 각별히 감사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채 저의 병약(病弱)한 처지만 비관하면서 근근득생(僅僅得生) 지냈사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제가 생명의 은인(恩人)이신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것은 저의 출생지(出生地)가 본디 낯가림을 심하게 하고 부끄러움 잘 타기로 유명한 강원도 오지(奧地) 사람이라서 그러려니 생각하시고 허허허 그저 웃어 넘겨 주소서   


  하여, 오늘은 차마 선생님을 대면(對面)하고서는 제 얼굴이 뜨거워서 드리지 못한 말씀들을 용기를 내어 이 자리를 빌려서 이렇게 전해 올리나이다.   


  그건 그렇고요. [;;^0^;;] 


  올해 시월상(十月上)에는 제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에서 해마다 열리곤 하는 마포나루 새우젓축제에 선생님과 함께 참가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소생(小生)은 올해로 이미 일곱 번째 열리는 마포나루 새우젓축제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가했사온데, 작년에 저의 블로그(blog)에 게재한 졸고(拙稿) 마포나루 새우젓축제(http://blog.daum.net/noddle/13417117)를 읽으신 선생님께옵서 갑오년(甲午年 : 2014)부터는 이 행사에 동참하기를 원하신다는 글을 저에게 메일(mail)로 주신 바 있기에 감히 연락을 드렸던 것이오며, 곧바로 선생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무척 기뻤사옵니다 


  저의 전공(專攻때문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에 우리나라의 옛것들을 좋아하여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지 탐방 또는 민속 행사나 고서화(古書畵) 전시작품들의 관람을 몹시 즐기는 편이온데, 동호인((同好人친구들이 저의 주변에서 한두 명씩 병마(病魔)로 인해 쓰러지거나 사라져서 근래엔 거의 혼자 쏘다니곤 했습니다만, 마음이 통하는 벗님들과 더불어 안복(眼福)을 누리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사옵니다 


  목련꽃이 막 피던 지난봄에는 우리 집 늦둥이 막내아들 녀석을 거의 반강제적(半强制的)으로 이끌고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DDP)에서 가서 간송미술문화재단(澗松美術文化財團) 설립 기념전을 관람했는데, 오랜만에 그곳에 나들이 나온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같은 대작가(大作家)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고, 언제 보아도 관람객들을 은연중에 홀리게 하는 백자(白磁)와 청자(靑瓷) 작품들까지 실컷 감상할 수 있어서 그날은 제 자신의 품격이 저절로 높아지는 듯한 착각에 하루 온종일 빠져 들기도 했사옵니다.    


  젊은 시절부터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감상하는 것을 평생의 취미로서 즐기던 저의 아내가 요즘에는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망가져서 저의 바깥 나들이에 동참을 거의 못하고 있고, 저는 혼자서 긴 시간 동안 외출할 수 없는 지병(持病)을 갖고 있어서 좋은 영화나 전시회를 보고 싶을 때는 늦둥이 아들녀석을 반드시 동반하곤 한답니다. 그 대신에 아들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해야 하고 영화 구경까지 시켜 줘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만만찮습니다. !……^^*         


  이런저런 사정에 처해 있다가 시월상(十月上)달을 맞아 선생님과 오랜만에 해후(邂逅)하여, 새우젓축제를 관람하고, 선생님의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는 충청도 광천(廣川) 토굴(土窟)에서 담근 새우젓을 그것도 아주 싱싱한 육젓을 구입하게 되어 저의 가슴은 마냥 뿌듯했었사옵니다. 


  저는 해마다 이 축제마당에 와서 새우젓을 구입했는데, 그날 선생님께옵서도 목격하셨듯이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새우젓들 이를테면 오젓-육젓-추젓, 그중에서도 광천 토굴에서 담근 새우젓을 파는 임시 점포(臨時店鋪)가 인파(人波)도 가장 많이 붐볐고 가장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좋은 품질을 보장하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거금(巨金?)을 투척해서 큰 병()에 꾹꾹 눌러 담은 광천 독바위토굴 육젓을 구입했습니다 


  김치를 맛깔스럽게 잘 담그는 저의 아내는 올해도 제가 사다 준 광천 토굴에서 담근 육젓으로 올가을 첫 김장을 담글 것입니다. 저는 김치 없이는 단 한 끼도 식사를 못하는 토종(土種)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아내가 새로 담글 김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다 설렙니다.   


  아마도 집에 새로 사온 새우젓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저는 매() 끼니 때마다 반찬으로 새우젓을 곁들일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새우젓을 반찬으로 먹을 때에는 깨소금이나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을 버무려 먹는 편인데, 저희 집은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고 눈처럼 흰 깨끗한 본래의 새우젓만을 밥숟가락에 얹어 먹는답니다. 또는 감자를 으깨어서 거기에다가 새우젓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요 


  어린 시절 봄날에 우리 고향 앞산과 뒷산에 함박송이처럼 더부룩하면서도 아주 탐스러운 진달래꽃들이 만산(滿山) 가득히 피어나곤 할 때, 동네의 형()들을 좇아 산()에 올라가 그 진달래꽃들을 한아름 따서 집에 돌아오면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탐스런 진달래꽃잎에 흰밥이나 잘 익은 감자를 으깨서 그 위에다 새우젓을 살짝 곁들여 먹는 이른바 진달래꽃쌈밥을 즐길 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 내륙지방 산골마을에는 김장철 무렵에 새우젓 장수가 지게에다가 길쭉한  새우젓독(새우젓항아리)을 짊어지고 찾아와서 새우젓을 바가지에다가 한가득 담아서 아낙네들에게 팔았는데, 당시만 해도 주로 현찰 거래(現札去來)가 아닌 쌀이나 잡곡류 따위의 곡물(穀物)과 물물교환(物物交換)을 했습지요.    


  대개는 새우젓을 몇 바가지 정도 구입들을 했지만, 본디 손이 큰 편이신데다가 마음 씀씀이 통도 크셨던 저희 어머니께옵선 아예 새우젓 항아리째로 몽땅 구입을 하셔서, 저희 집에 들른 새우젓 장수는 더 이상 다른 집이나 마을로 행상(行商)에 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가 워낙 새우젓을 즐겨 먹어 한 바가지씩 새우젓을 구입하면 금세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아예 새우젓을 한 항아리(한 지게) 분량을 구입해서 오랜 기간 동안 두고두고 잡수셨던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시내 우리 집에는 6.25 사변 이후 1960년대까지 저희 어머니께옵서 항아리째 구입했던 새우젓을 다 잡수신 연후(然後)에 그 항아리들을 돌아가실 때까지 김칫독이나 쌀독 따위로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시다가 1990년대 어느 날 아들 부부에게 골동품 삼아 잘 보관해 두라시며 남겨 주시고 가신 새우젓독 두어 개가 대추나무그루 곁에 자리를 잡은 채 십수 년 전에 선종(善終)하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직도 저희 집 마당을 그윽이 지켜 주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그  새우젓독들을 바라볼 때마다 이십 대(二十代) 초반에  미망인(未亡人)이 되신 채 시부모님 모시고 어린 외아들을 키우시면서 천생(天生) 주부(主婦)로서 아주 열심히 사시다가 돌아가신 생전(生前)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고 처연(凄然)한 심정으로 제 어머니를 추모(追慕)하곤 한답니다 


  해마다 새우젓을 항아리 통째로 구입하게 되면 촉촉하고 싱싱한 새우젓뿐만 아니라 새우젓 국물도 항아리 속에서 풍부하게 퍼내어 각종 음식을 만들 때 육수로 사용할 수 있어 좋았고, 가끔씩은 항아리 속에서 새우 말고도 제법 맛깔스럽게 염분(鹽分)에 잘 절여진 생선들도 건질 수 있었는데, 그 생선 건더기들을 군인(軍人)들로부터 익히 전해 들은 토속적인 은어(隱語)왕거니라고들 부르면서 젓가락으로 집어 밥숟가락에 얹어 먹기도 했습니다.           


  왕거니란 말은 제가 성년(成年)이 된 후 제3공화국(第三共和國)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정권 시절에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다시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적 사정은 아세아(亞細亞)에서도 꼴찌였을 정도로 가난해서 군인들의 급식(給食)깡보리밥콩나물국이 식단(食單)의 전부였을 정도로 반찬 따위는 애당초부터 없었는데, 어쩌다가 고깃국이 나오는 날 병사(兵士)들은 기대에 부풀어 숟가락으로 식판(食板)의 국그릇을 휘저었지만 고기는 거의 건져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혹 가물에 콩 나듯이 운이 좋은 병사의 식판에서 고기 건더기가 건져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병사들은 야호, 왕거니 걸렸다며 환호작약(歡呼雀躍)하였습지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고, 왕거니는 발견한 병사의 입에 들어가지 않고 대부분은 내무반(內務班) 선임병사(先任兵士)의 알루미늄 식판 위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 당시의 관행(慣行)이었습니다. 


  1971년 봄이었던가요? 공화당(共和黨)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신민당(新民黨)의 김대중(金大中) 후보(候補)맞부딪친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던 날 아침 식탁에서 저는 진짜 왕()처럼 토실토실한 살코기, 왕거니를 발견했습니다만, 이내 저희 내무반의 최고참(最古參병장(兵長)에게 왕거니를 슬그머니 상납(上納)해야만 했습니다. 아주 더러운 기분으로 대통령 선거장에 가서 투표를 했기 때문에 지금도 저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신기하게도 당시 제가 주둔해 있던 ○○기지(基地)의 국군 장병들은 군부대(軍部隊) 즉 영내(營內)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지 않고 부대 밖 영외(營外)로 나가 공명정대하게 치른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영내(營內)의 중대본부(中隊本部) 인사계(人事係) () 아무개상사(上士) 책상 앞에서 투표를 하고 임상사(任上士)의 명령에 의해 그의 책상 서랍 속에 투표용지를 넣어야 했지요. 


  어쨌거나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일 저는 군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왕거니를 건졌다가 자발적인 의사가 아닌 타의(他意)에 의해 상납해야 했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귀향한 후에는 통이 크신 우리 어머니 덕분에 다시 우리 집 새우젓항아리에서 왕거니를 맘껏 골라 먹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 복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이후 저희 고향은 1970년대 전반기에 소양강(昭陽江) 다목적 댐(Dam)이 완공 되어 마을 전체가 수몰(水沒)되어 사라져서 다시는 귀향(歸鄕)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고, 제가 제2의 인생을 펼치게 된 서울에서는 새우젓장수가 새우젓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다니는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은 새우젓 더미 속에 묻힌 왕거니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올해 저는 선생님과 함께마포나루 새우젓축제에 참석했던 날, 광천(廣川) 토굴(土窟) 새우젓을 파는 점포(店鋪) 앞에서 유심히 장막(帳幕) 안을 살펴 보았답니다. 혹시나 새우젓을 가득 담아 놓고 판매하는 커다란 드럼통(drum) 안에 왕거니들이 묻혀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지요. 혹시나 왕거니를 발견하게 되면, 바로 그 왕거니까지 담아 달라고 간청할 속셈이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새우젓 국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광천 독바위토굴 육젓을 구입했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옵서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어리굴젓을 재빨리 구입하셔서 저에게 선물로 주셨사온데, 바닷가 출신이 아닌 강원도 내륙지방 출신인 저는 그날까지만 해도 어리굴젓의 진미(珍味)를 전혀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귀가(歸家)하자 선생님의 선물을 전해 받은 저의 아내는 본디 부산(釜山) 출신이라 그런지 어리굴젓을 시식해 보고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어리굴젓을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달랑 새우젓만 사서 집으로 온 남편을 한심하다는 듯 눈을 곱게 흘겨 주면서, 아내는 센스(sense) 넘치는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전해 달라고 저에게 여러 차례 당부를 했습니다.    


  저도 난생처음으로 강원도 철원에 사시는 재종(再從)형님께옵서 보내 주신 오대쌀로 지은 흰 햅쌀밥에다가 선생님이 사 주신 어리굴젓을 쓱쓱 비벼 먹었사온데,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저녁밥이었습니다. 


  육십 대(六十代) 후반(後半)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어리굴젓의 진미(珍味)…… 그 동안 남의 집 식탁에서 가끔씩 눈요기는 했지만 그 맛을 몰랐기에 저의 밥숟가락에는 한번도 오른 적이 없었사온데, 선생님 덕분에 이번에야어리굴젓맛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 


  올해에도 예년(例年)에 열린 것과 마찬가지로 월드컵공원 경내(境內평화의 광장일원(一圓)에서 열린 왕년에 번성했던 마포나루의 재현(再現모습, 특히나 난지(蘭芝) 연못에 띄운 황포 돛대를 단 새우젓배 3()의 모습이며, 새우젓 장터 재현과 옛 생활문화 전시, 전통공예 체험, 한의사 진맥, 쑥뜸 체험, 황포 돛대 만들기, 새우젓 경매, 김장 담그기, 전국 각지의 지역 특산물 판매장 운영 등 매우 흥성흥성(興盛興盛)한 모습은 제법 장관(壯觀)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일일이 제대로 다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유감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새우젓축제 관람이 끝난 후 선생님과 더불어 난지(蘭芝) 연못 안에 띄운 황포돛단배 촬영 및 월드컵 공원 경내 숲 속 산책, 그리고 바위에 앉아 선생님과 오랜만에 고답적(高踏的)인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눌 수 있었던 그 고즈넉한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잡다하고 골치 아픈 집안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서 이 얼마 만에 누리는 그야말로 느긋한 시간들인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예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와는 다른 대화(對話)의 주제(主題)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선생님보다 후학(後學)임을 망각한 채 너무 잘난 체하며 이야기의 물꼬를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잘못 틀지나 않았는가 해서 부끄럽기도 하옵니다만, 선생님께옵선 저의 수다스러움까지도 너그러이 수용하시리라 믿습니다. 


  저희 동네 바로 옆인 월드컵 공원에는 평화공원, 노을 공원 ()도 있고, 하늘 공원의 억새 숲도 굉장히 볼만합니다만, 하루에 다 보여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내년으로 미루면서, 내년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올해보다 더 흐뭇하고 뿌듯한 만남의 시간을 마련할 것을 약속 드리고자 합니다    


  요사이 환절기를 맞이해 아침저녁 일교차(日較差)가 너무 극심해 감기가 널리 유행하오니, 독감(毒感) 예방 주사 꼭 맞으시고, 이왕 내친 김에 폐렴(肺炎) 백신까지 꼭 접종하소서.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는 구청(區廳) 관할 보건소(保健所) 등지(等地)에서 폐렴 백신을 무료로 접종한다고 해, 소생(小生)도 다음 주()에는 구청 보건소에 가서 공짜로 주사(注射)를 맞아볼까 하옵니다  


  제가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산여해(如山如海)이오나 오늘은 예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선생님과 영부인(令夫人) 두 분 모두 갑오년(甲午年) 가을에 알찬 결실(結實) 이루시고, 항상 존체만안(尊體萬安)하시기를 축수(祝手)하나이다. 


2014 10 28 (화요일) 


못난 후생(後生) 


박 노 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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