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童詩)-동요(童謠)

구전동요(口傳童謠) 『고모네 집에 갔더니』

noddle0610 2018. 9. 22. 00:35








- 전래 동요(傳來童謠)-


 

고모네 집에 갔더니


 

고모네 집에 갔더니 


암탉 수탉 잡아서

나 한 그릇 안 주고 


혼자만 맛 있게

먹더라! 


우리 집에 오면은


수수팥떡 해서

--!

 


1968 3 15



구술(口述) : 고() 한()마리아(1931~1995) 여사

채록자(採錄者) :    

  






동심(童心)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해학성(諧謔性)


 

동요(童謠) ‘고모네 집에 갔더니’는 빈부(貧富)의 차이가 극심하게 존재했던 옛 시절에 널리 회자(膾炙)한 노래다


이 동요를 어린이들이 부르며 박자에 맞춰 유희(遊戱)를 한다. 방바닥에 앉아서 가랑이와 가랑이 사이로 서로의 두 다리를 집어넣고 방바닥과 다리를 연달아 때리며 이 동요를 부르는데,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부를 때 다리를 먼저 접게 되는(노래가 끝나는 다리를 먼저 접는) 어린이가 이기는 유희다. 


이 노랫말의 내용을 음미하다 보면, 가난한 시절에는 고모(姑母)와 친정 조카 사이, 즉 아주 가까운 친척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자기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대접할 때 차별(差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노래는 고모가 출가외인(出嫁外人)임을 은연중(隱然中)에 시니컬(cynical)하게 풍자(諷刺)하고 있다.


고모네 집은 암탉에다 수탉까지 한꺼번에 잡아 먹을 만큼 친정(親庭)집에 비해서는 부자(富者)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찾아온 친정 조카를 도외시(度外視)한 채 자기 집 식구들끼리만 닭고기 요리를 해 먹는 것을 보면 재산이 그리 넉넉한 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나이 어린 친정 조카에게 닭다리 하나 안 건네줄 만큼 인색(吝嗇)한 이른바 ‘샤일록형(Shylock)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노랫말 중에 ‘나 한 토막 안 주고’가 아니고 ‘나 한 그릇 안 주고’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고모네가 먹고 있던 닭 요리 메뉴(menu)는 오늘날 많이들 먹는 ‘통닭구이’ 종류가 아니고 ‘삼계탕(蔘鷄湯)’이나 ‘닭죽’ 또는 ‘백숙(白熟)’ 중 한 가지였던 성싶다.  


노랫말에서는 고모님이 ‘혼자만 맛 있게 먹더라’ 했지만 그건 화자(話者)인 아이가 자기 고모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힘주어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실제(實際)로는 고모님 혼자 암탉 수탉을 다 독차지해 잡수셨다는 게 아니라 고모를 포함해서 고모네 시댁(媤宅) 식구들끼리만 ‘암탉 수탉 잡아서’ 다 먹었다는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고모님이 친정 조카 몰래 자기 식구들끼리만 닭고기 요리를 해 먹은 것인지, 아니면 친정 조카가 사전(事前) 예고(豫告)도 없이 우연히 식사 시간에 들렀기에 닭고기 여분(餘分)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조카녀석을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맛 있게 먹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거나 고모네 집에 놀러 갔던 어린 조카녀석은 닭다리 한 개도 얻어먹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여


 “우리 집에 오면은 


수수팥떡 해서

--!


라며, 자기 고모를 향해 혼잣말로 앙알거린다. 


엔간하면 “수수팥떡 해서 안 준다”고만 했을 터인데, 이 아이가 ‘스타카토(staccato)’로 한 음()씩 끊어서 “안--!”고 힘주어 강조한 것은 그만큼 고모님에 대한 반발심(反撥心) 내지 원망(怨望)이 대단했음을 의미한다.


이 마지막 대목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옛 시절에 자기 집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귀한 음식 중 하나인 수수팥떡을 고모님이 친정에 올 경우 “안--!”고 입을 앙다물며 자위(自慰)하는 소박한 동심(童心)이 배어 있다. 아마 옛날 어른들은 동네 아이들이 노는 곳을 지나치다가 이 마지막 대목을 듣고서 가슴이 짠해지는 기가 막힌 해학성(諧謔性 : humor)을 느낀 나머지 피식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가난했던 옛날 시절에 ‘수수팥떡’은 상당히 귀()한 음식이었다.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들 생일 때나 해 먹는 ‘수수경단(瓊團)’ 음식 아니면 해마다 자기 집 집터를 지키는 귀신, 즉 ‘터주[地神]’에게 고사(告祀)를 지낼 때 바치는 이른바 ‘시루팥떡’을 노나 먹을 때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경단(瓊團)’이나 ‘시루떡’에는 공()히 ‘팥’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예로부터 자주색(紫朱色)이나 붉은색을 띤 ‘팥’에는 재앙(災殃)을 막아 주는 주술적(呪術的) 의미가 깃들어 있어서 우리나라 옛 조상님들은 해마다 돌림병이나 사고(事故)로 어린애들이 허망하게 죽는 것을 예방하고 아울러 집안에 액운(厄運)이 끼는 것을 막고자 팥고물을 묻힌 떡을 만들어 이웃과 함께 먹었다.  


어린애들 생일에 수수경단을 해 먹는 것은 10살까지였고, 그 이후에는 관례식(冠禮式)을 치른 성인(成人)이 될 때까지 더 이상 생일에 수수팥떡 구경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대체적(大體的)으로 서민(庶民)의 집안 자식(子息)들은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님들이 아예 생일상(生日床)도 차려 주지 않았다


나 또한 1940년대 후반에 강원도의 전통적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몸이라서 열 살까지만 어머님이 차려 주신 생일상을 받았고,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내게 ‘생일’이 다가와도 그날을 모르고 지나쳤다. 더구나 평소에 양력(陽曆)으로 일상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어머니가 알려 주신 음력(陰曆) 생일 날짜를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어머님께옵서는 당신의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해마다 아들 생일이 다가오면 집에서 손수 찹쌀과 누룩을 버무려 이른바 ‘동동주’를 빚어 생일상을 차려 주시곤 했다. 1960년대 후반기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식량난(食糧難)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방침에 의해 가정에서 술을 담가 먹는 것을 법으로 엄금했지만, 남편 없이 외아들을 키워 대학생으로 만드신 우리 어머니의 모성애(母性愛)를 박정희 대통령이 말릴 수는 없었다.


난 생일 때마다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 통행금지 시간이 넘도록 술을 마셔댔다.


우리 어머님은 내 친구들이 군대(軍隊)에 갈 때마다 동동주를 담가 손수 아들 친구녀석들의 환송연(歡送宴)을 베풀어 주시곤 했으며, 그때마다 난 친구들한테 은근히 뻐기곤 했었다


어쨌거나 나의 어린 시절엔 일반적으로 청소년들의 나이가 열 살이 넘으면 생일 잔치 같은 것은 없었고, 그러니 요새 청소년들 사이에 생일을 맞는 친구를 축하한다는 미명(美名) 아래 주먹으로 때리는 이른바 ‘생일빵’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아예 일어날 수도 없었다


열 살이 넘으면 비록 생일날 ‘수수경단’ 구경은 못하지만, 그래도 해마다 토속신앙(土俗信仰)을 믿는 가정(家庭)에선 해마다 ‘텃고사(-告祀)’들을 지냈기 때문에 제사상(祭祀床)에 올려졌던 그 귀한 ‘시루팥떡’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텃고사를 지낸 집에선 그 시루떡을 으레 이웃집들과 노나 먹었고, 새로 이사 온 집들도 고사떡을 만들어 이웃에 돌렸던 것이다.  


서울 시내의 경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이웃에 새로이 이사를 오면 시루떡을 돌리곤 했는데, 요새는 이웃에 새로 이사를 오는 집들이 오히려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늘어 가고 있지만 시루떡 따위를 돌리는 가구(家口)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해서 그에 대한 나의 소회(素懷)는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매우 씁쓸하다. 과거 농경(農耕) 중심의 정착민(定着民)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훈훈한 인정(人情)들이 유목민(遊牧民)처럼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하는 현대사회(現代社會)에 들어와 점차 메말라 가는 듯해서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수수경단이나 시루팥떡은 그것들이 수천(數千) 년 동안 지니고 있었던 주술적 의미의 퇴색(褪色) 때문에, 그리고 먹을 것이 많아지고 그 종류도 다양한데다가 입맛이 고급화 된 현대인들 때문에 머지않은 장래(將來)에 우리들 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 시대상(時代相)의 급격한 변화 추세(趨勢)를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나 스스로도 그동안 시대와 사회의 변화 추세에 적응하며 바삐 사느라 수수팥떡을 맛을 못 본 지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우리 집 서재(書齋)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구전동요(口傳童謠)를 적어 놓은 노트(Note)에서 ‘고모네 집에 갔더니’를 발견한 나는 한참 동안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탄 채 시간 여행(時間旅行)을 떠나야 했다


요새 아이들은 생일날을 맞이하면 어른이 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생일 축하 노래를 듣는 가운데 다양한 모양과 맛을 지닌 고급 케이크(cake)를 자르고, 맛 있는 고급(高級) 요리(料理)를 먹으며, 값비싼 선물들을 교환하는데, 예전의 우리들은 어떠했던가


오늘 머리글로 소개한 구전동요(口傳童謠) ‘고모네 집에 갔더니’는 1960년대 후반기 대학생 시절에 어머님께서 내게 구술(口述)해 주신 전래 동요(傳來童謠). 그 시절 우리나라는 아시아(Asia)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한 나라였기 때문에 나는 노랫말의 내용에 절절(切切 )히 공감하면서 어머님이 구술(口述)하신 내용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였다.  


요즈음 들어서 나는 요새 아이들이 부러우면서도, '고모네 집에 갔더니'의 노랫말에서 읽혀지는 그 옛날 가난했던 시절의 동심(童心)과 그 당시의 소박한 인정세태(人情世態)를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빙긋이 미소를 짓곤 한다 


‘그때 그랬었지!……  


이제는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순간에 옛 추억들이 가슴 아프게 떠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니, 어찌 저절로 웃음이 안 나오겠는가. 그 당시와 현재의 우리나라 발전상을 비교해 보건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안도(安堵)의 미소,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의 기색이 만면(滿面)에 번지는 미소를 번갈아 지을 수밖에!……  

 


 2018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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