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첫눈을 맞아 본 적 있으십니까
강원도에서 살아 본 적 있으세요?
아니면 거기서 하룻밤 묵으면서
첫눈을 맞아 본 적은 있으신가요?
저는 강원도가 고향이랍니다.
열다섯 살까지 소양강 상류 깡촌에서 살며
해마다 겨울이면 첫눈을 맞았지만
늘 보아 온 눈이면서도
온 산에, 들에
온 동네…… 마을 어귀
저 너머까지 내리 퍼붓는
함박눈에
강아지처럼 껑충껑충 뛰며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보아 온
산과 강(江)…… 들판을 보며
하품을 하다가
첫눈이, 그것도 함박눈이
쏟아지면
작년, 재작년에도
본 적이 있는 눈송이지만
일 년 만에 처음 보는 눈이라서
강아지처럼 팔딱팔딱 뛰며
마냥 좋아했었지요.
세상에 흰 눈보다 더 하얀 것이 있을까요?
세상에 눈송이보다 더 깨끗한 것이 있을까요?
그보다 더 부드럽고 포근한 것이 있을까요?
1950년대(年代)까지만 해도
전혀 오염되지 않은 내 고향 강원도에서
맞는 첫눈은
애어른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정갈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밤새껏 온 동네에 내려
우리를 푸근하게 해 주었답니다.
사람 키로 한 길이 넘게 첫눈이 쌓이면
새해 보리풍년이 올 거라며
어른들은 화롯불을 뒤져
희망의 군밤을 구우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고요.
그런 날 밤새 내린 눈은
잘 녹지도 않고
꽤나 오래도록 동네에 남아
마을 가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철부지 아이들은
학교 안 가게 되어 좋다며
온종일 집 주변에 창애를 놓으며
참새를 기다렸고
꿩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들이 죄의식 없이
오솔길에 설치해 둔 올무에
산토끼가 걸려들거나,
고라니나 멧돼지가
산(山) 썰매장을 지나다가
낙상(落傷)한 몸으로
눈 속에서 어른들한테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열다섯 살까지 강원도에 살며
해마다 제가 맞았던 첫눈의 기억은
아스라하지만 지금도 신비롭고 정갈하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올 겨울엔
서울 지방(地方)에
눈다운 눈이
아직껏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눈다운 눈이 내린다 할지라도
어릴 때처럼 가슴 설레며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오랜만에 눈이 내리겠다는
기상 예보(氣象豫報)라도 들을라치면
추워질 날씨와 빙판 길 낙상 사고(落傷事故),
깨끗하기는커녕 얼룩지고 시커멓기만 한 잔설(殘雪),
교통사정 혼잡, 농수산물 가격 인상…… 등등(等等)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만 생길 것 같아
눈이 내린다는 것이 영 달갑지가 않습니다.
성탄절(聖誕節)이 다가오면
정갈하고 신비로운 순백(純白)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질 만도 한데,
언제부터인가
도시(都市)의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요란한 캐럴…… 흥청거리는 백화점과
인파(人波)만 있습니다.
아, 올 겨울엔
참으로 오랜만에
조용하고 경건하고 정갈하고
순백(純白)한 성탄절이
흰 눈과 함께 기다려집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더러운 발길과
자동차 기름으로 얼룩진 잔설(殘雪),
미끄러운 빙판 길 걱정 때문에
눈이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소심한 도회인(都會人)이기를
용기 있게 거부하고,
한 길이 넘게 내리는 눈 속에서
보리 풍년을 꿈꾸던 옛 어른들처럼
여유롭게 겨울 밤을 보내고 싶습니다.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정갈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습니다.
제가 열다섯 살까지 소양강 상류 깡촌에서 살며
해마다 겨울이면 맞았던
…………
그 세상을 말입니다.
2004 년(甲申) 12 월 11 일 토요일 오후
박 노 들
☞ 출처(出處) : 졸고(拙稿), 코리아닷컴, e-Room, 토크토크>일상다반사>
중년의 쉼터, 2005-12-04 오전 2:32:11
☞ Photo 출처 : 외우(畏友) ‘제비’군(君)의 Daum planet ‘하얀까마귀’,
국내여행, 겨울의 진수 백설의 환희, 200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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