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과 한음처럼 나이를 초월한 친구는 없을까
오성(鰲城)은 바로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명종 11-광해군 10) 선생이며, 그의 아호(雅號)는 백사(白沙)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서, 장인(丈人)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더불어 전란(戰亂) 극복에 힘쓴 결과, 호종(扈從) 1등 공신(功臣)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어,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그를 오성대감(鰲城大監)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최종 벼슬은 영의정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廢位)를 적극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死後)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입니다.
오성(鰲城)이 함경도로 귀양가는 길에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인 철령(鐵嶺)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時調)를 지어 읊어, 후일(後日)에 이 시조 내용을 광해군(光海君)이 듣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령(鐵嶺) 노픈 봉(峰)에
쉬여 넘난 져 구룸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사마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다리.
━━━━ 출전(出典) : 진본청구영언 103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절친한 친구가 바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입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명종 16-광해군 5) 선생은 아호가 한음(漢陰)이며,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명군(明軍)이 오자 그들을 맞이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서울 수복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옹호한 죄(罪?)로 파직되어 병사(病死)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들은 광해군(光海君)은 울면서 한음(漢陰)을 복관(復官)시켰다고 합니다. 한음(漢陰)의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입니다.
일찍이 한음(漢陰)이 명(明)나라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러 갈 때 그와 오성(鰲城)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성(鰲城)은 친구 한음(漢陰)을 전송(餞送)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우리나라 의주(義州)]에서 찾게나." 한음(漢陰)은 대답하기를, "아닐세. 만일에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거든 자네는 나의 시체를 노룡[蘆龍 : 명나라 황성(皇城)]에서 찾도록 하게." 말을 마친 두 사람을 굳은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고 합니다.
서로의 사후(死後)까지 부탁하며 비장하게 작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友情)과 우국지정(憂國之情)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제거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출 사건(廢黜事件)을 일으켰을 때 이를 반대한 대표적 충신들이었는데, 오성(鰲城)이 탄핵을 당해 북청(北靑)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자, 평생의 지기(知己)를 잃게 된 한음(漢陰)은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진 후 연일 귀가(歸家)할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합니다.
이 때 그가 지은 시조(時調)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큰 盞(잔)에 가득 부어
醉(취)토록 머그며서
萬古英雄(만고영웅)을
손고바 혀여보니
아마도 劉伶(유령) 李白(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100
이렇듯이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은 서로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났지만 평생토록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유별나게 돈독했던 우정에 관한 숱한 일화(逸話)들은 지금까지도 야담(野談)으로 각종 책(冊)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객지(客地)에서 만난 사이에 서로 마음이 통하면 10년 미만(未滿) 차이의 범위 내에서 벗으로 지냈으며, 10년 차이가 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兄)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는 공자(孔子)님과 주자(朱子)님도 인정하신 관례[※十年以長則 兄事之 : 십년이장즉 형사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전통을 오래도록 지켜 내려왔습니다.
특히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는 동갑내기 출생이 드물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 입학하면 다섯 살 정도 차이 나는 동급생(同級生)이 많아 서로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고,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장기간 존속했던 군사 문화(軍事文化)의 영향으로 군대에서 군번(軍番) 순서를 따지듯이 요즘에는 친구도 한두 살 차이 범위 내에서만 사귀게 되어, 그 이상만 차이가 나면 무조건 형(兄)이나 선배(先輩)로 깍듯하게 대접하는 신풍토(新風土)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우스운 것은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시어머니 언행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70년대와 80년대의 이른바 386세대의 운동권 출신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면서도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선후배 사이에 일일이 학번(學番)을 따져서 한 학년이라도 차이가 나면 마치 군대(軍隊)의 고참(古參)과 졸병(卒兵) 관계처럼 서로를 상대(相對)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관행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386세대가 젊은이들의 주류(主流)가 되면서부터 보다 널리 일반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아무리 대학교 입학 선배라 할지라도 후배가 선배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는 요청을 하기 전에는 선배가 함부로 후배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30년 군사문화의 잔재(殘滓)는 역설적으로 민주화 운동권 학생들의 선후배간 질서에까지 심대(深大)한 영향을 끼쳤고, 입학년도(入學年度)의 학번(學番)이나 나이 한두 살 차이 때문에 양자(兩者)가 종속관계 내지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악습(惡習)은 이제 너무 일반화(一般化) 내지 고착화(固着化)한 감(感)이 있습니다.
아, 정녕코 현대인들은 민주화(民主化)가 이루어진 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면서 우리의 선인(先人) 오성(鰲城)과 한음(漢陰) 두 분처럼 서로 마음에 맞으면 나이 차이 크게 따지지 않고 평생지기(平生知己)로서 지낼 수 없단 말입니까?……
2005 년 10 월 19 일
박 노 들
☞ 원고 출처 : 졸고(拙稿 : ID ‘한림학사’), Daum portal site ‘신지식 홈’,
‘사회, 공공> 신화, 전설’, 2005-10-19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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