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신앙

신앙고백-『당신과 함께라면』

noddle0610 2006. 1. 12. 15:04

  

 

    신앙고백         

당신과 함께라면   

/  박   노   들  

      

 

 

  집사람(세실리아)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저의 삶은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의 불안(不安)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원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살며, 그래도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늘 무엇인가를 찾아 항상 헛헛해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시골 양반(兩班)의 후손으로 늘 공자(孔子) 맹자(孟子)님만 찾으시던 할아버님의 영향으로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학자(國學者)로서의 대성을 꿈꾸었을 뿐, 종교는 신기루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공공연히 교인들을 매도(罵倒)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특은(特恩)을 입기 이전의 사도(司徒) 바오로가 크리스천을 박해했듯이 저는 사도 바오로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존재로서 감히 크리스천을 매도하였으니, 그 대죄를 앞으로 어찌 다 씻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 때문에 죄만 지으며 이리저리 방황하던 제가 집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5월 초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1년 중 5월달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곧 새 가정(家庭)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당에서의 혼인예식(婚姻禮式)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집사람은 수많은 시간을 고통과 희생의 눈물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곧 태어날 첫 아기를 위해 만삭이 된 집사람과 역촌동 성당(驛村洞聖堂)에서 때늦은 혼인 미사(missa)를 드렸으니, 그 동안 미사 때마다 영성체(領聖體)를 하지 못한 집사람의 가슴 속이 어떠했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 해 늦여름 첫 아기가 태어나고 이어 유아영세(幼兒領洗)까지 시켰습니다만, 저 자신은 세례(洗禮)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해에 비록 지방대학(地方大學) 시간강사(時間講師)이긴 하지만 난생 처음 대학에 출강(出講)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럭저럭하다가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저는 집사람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예비신자(豫備信者) 교리 강좌(敎理講座)를 역촌동 성당에서 받게 되었습니다만, 그마저도 충실하게 적극적으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해 5월 교황(敎皇) 요한 바오로 2세 성하(聖下)께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 및 103위(位) 성인 시성식(諡聖式)을 주재하시고자 우리 나라를 방문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 귀밑에 허옇게 어루러기가 생기는 백납(白蠟)이란 피부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외선(紫外線) 요법(療法)을 장기간 받아야 나을 수가 있는 병인데, 자칫하면 환부(患部)가 번져 심지어는 전신(全身)이 얼룩송아지처럼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은 특이한 점이 자각증상이나 고통이 전혀 없으며, 생명에 지장을 주거나 사회 활동에 지장은 전혀 없지만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아, 심할 경우 흉한 외모로 인해 대인관계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고, 때로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장기간 치료 받을 작정을 하였는데, 1984년 5월 6일 여의도(汝矣島) 광장에서 거행된 103위(位) 시성식에 참례차(參禮次) 갔다가, 교황 성하에 대한 경호(警護) 관계상 지정좌석(指定坐席)을 떠날 수 없어 하루 종일 햇볕을 등 뒤에 받으면서 제단(祭壇)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게 된 결과, 저의 귀밑 환부가 태양의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집중적인 천연(天然) 자외선을 받는 바람에, 그로부터 한달 이내에 백납(白蠟)이 깨끗이 나아 버렸습니다.

 

  담당 의사(擔當醫師)가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하는 말이, 하느님의 은총이 있으셨기 때문에 낫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몇 년 걸려야 완치될 터인데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그 때 제가 여의도(汝矣島)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처럼 집중적으로 태양 광선을 받지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저는 지금도 그 장엄한 103위 시성식을 잊을 수가 없으며, 아마 평생 두고도 다시는 그런 성대한 전례(典禮)에 참석할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되어, 새삼 저를 인도한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장엄했던 전례 참례를 계기로 저는 피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교리를 공부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교황 성하께서 다녀가신 지 한 달 뒤인 6월 16일 역촌동 성당에서 영세(領洗)를 했습니다.


  교황 성하의 우리 나라 방문은 이밖에도 저에게 또 다른 소중한 신앙적 체험을 하나 더 갖게 해 주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김포공항(金浦空港)에 도착하시어 그 광경을 TV로 중계할 즈음에 저는 식중독에 걸려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났는데, 중계방송이 끝난 다음에 병원에 갈 작정을 하고 우선 TV를 시청(視聽)하였습니다. 그런데 TV 화면에 교황님이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시면서 환영객들에게 손으로 답례하시는 모습이 클로즈업(close-up) 되었을 때, 저는 그만 성하(聖下)의 그 자애로우신 모습에 완전히 반해 버렸습니다. 그 뒤 성하께서 땅에 엎드려 친구(親口)하시는 모습이며, 환영 의식(歡迎儀式)이 거행되는 동안 근엄한 모습보다는 너무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 것 하며, 화기(和氣) 넘치는 갖가지 프로필(profile)을 내내 보여 주시어, 저는 TV를 시청하는 동안 저 자신이 환자(患者)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막상 중계방송이 끝나 병원으로 가려는 순간, 저는 제 몸에 일어났던 가려움증과 두드러기 현상이 어느 사이에 싹 없어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날은 바로 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집사람과 맞선을 본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들이 교황 성하의 방한(訪韓) 기간 중에 저의 신변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가 그 다음 달에 세례를 받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順理)였다 할 수 있습니다.


  본당(本堂)의 김병학/라파엘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순간, 저의 온몸에는 어떤 뜨거운 불기운 같은 것이 머리끝에서 들어와 전신(全身)을 꿰뚫어, 저 스스로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충격과 감동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영세할 그 순간에 신앙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세(領洗)를 전후(前後)로 해서 저의 신변에 일어났던 자그마한 일들은 아직 신앙심이 미약한 저를 어여삐 여기신 주님께서 저의 신앙심을 다른 외물(外物)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지극히 높으신 당신을 알고부터 미천한 저의 가슴에도 사랑의 불이 켜졌습니다. 아, 이제 저는 당신과 함께라면 언제나 환한 마음이 되어 두려움과 외로움을 사랑하면서까지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出典 :역마을창간호, 천주교역촌동교회, 1988.3.20, PP. 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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