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공(三共) 광화문이여, 안녕!

해체 및 철거를 앞둔 '삼공(三共) 광화문(光化門)'

noddle0610 2006. 12. 1. 17:07

 


해체 및 철거를 앞둔 ‘삼공(三共) 광화문(光化門)


                       

 


 

  196812월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복원(復元)한 현재(現在)의 광화문 건물은 2006 12월 중에 해체 및 철거될 예정이란다

 

  내가 대학생 신분이었을 때 다시 세워진 광화문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 의해 곧 헐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떠올려지며 요새는 내 나이에 안 어울리게 자주 감상(感傷)에 젖어들곤 한다.  

 

  지난 1028일 오랜 동안 자기 엄마의 병원 수발을 드느라 고생한 우리 집 아이 셋을 전부 데리고 모처럼 만에 나들이를 했는데, 오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을 찾아가 해체를 앞에 둔 마지막 모습을 며칠 전에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digital camera)에 담았다.

 

  광화문의 현판(懸板) 글씨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親筆)이다. 강직한 무인(武人) 출신 대통령답게 힘차게 보이면서도 단출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던 박대통령의 저 현판 글씨는 향후 어느 곳에 보관될 것인지 그 또한 자못 궁금하다.

 

  청와대 인근에 있던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3년 동안 매일 전차(電車)를 타고 경복궁 돌담장길을 통해 등하교(登下校)를 하곤 했는데, 그 당시까지는 광화문 건물이 현재의 위치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일본놈들에 의해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질 때 광화문 건물이 통째로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다가 6.25 동란 때 소실되어 버린 탓이이다웅장한 석조건물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은 8.15 광복 이후 그 이름이 중앙청(中央廳)으로 바뀌어진 채 정부종합청사 역할을 했는데, 바로 그 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및 초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19509.28 수복 때는 국군 용사들이 치열한 전투 끝에 중앙청을 북한군으로부터 되찾아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다시 게양하는 등 중앙청은 나름대로 역사적 역할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에 의해 해체 및 철거되었다.

 

  3공화국 시절 초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중앙청 건물 앞을 매일 지나가면서 조선왕조 말기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복원(復元)했던 광화문의 웅장한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늘 무언가 아쉬워하는 마음을 지녔었는데, 대학생이 된 이후 광화문이 복원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복원식 행사 당일 날 광화문 앞으로 달려갔었다.            

 

  그건 그렇고…….  조선(朝鮮)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세운 광화문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고종(高宗)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으나왜놈들에 의해 경복궁(景福宮) 동문(東門)께로 옮겨졌다가 6.25 사변에 의해 또 소실되었고, 3공화국 시절에 다시 복원한 기구한 사연의 건물로서 파란만장한 우리 근세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하였기에, 나는 개인적(個人的)으로 곧 사라질 현재의 광화문을 다른 시대의 광화문과 구분하여 ‘삼공(三共) 광화문(光化門)이라 명명(命名)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참여정부’에 의해 해체되는 이 광화문은 누가 완공(完工)을 기념하는 테이프를 자를지 모르지만, 아무튼 차기(次期) 정권에 가서야 복원될 것이다.

 

  까마득한 훗날 우리 후손들은 저 광화문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세 번씩이나 죽었다가 다시 지어졌는지 그 사연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는 천재지변이나 사변으로 인한 소실이 아니었기에 그 구체적 해체 이유에 대해 자못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쨌거나 세 번이나 죽어야 했던 저 광화문은 앞으로 정말 네 번째 죽음은 당하지 말아야겠다. 전통적으로 동양(東洋)에서는 수천 년(數千年) 동안 4라는 숫자를 재수 없는 숫자, 즉 기피(忌避)의 숫자로 여겼으니까 말이다.   

 

2006 12 월 초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