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月 晦間에 억새 숲에서 본 것은
사진 ‧ 글 / 박 노 들
지나간 구월 그믐께
우리 부부(夫婦)의 은혼(銀婚)을
차분히 기념(記念)할 겸(兼)
모처럼 바람을 쐬려고
아내 손을 꼭 쥔 채
‘하늘 공원(公園)’에 올라갔다.
가을 정취(情趣)에 딱 어울리게
하늘은 청자(靑瓷) 빛이었고
공원 너른 들엔
‘억새’가 아예 한창이었다.
어떤 땐
‘갈대’와 헛갈리고,
때로는
단맛이 나는 ‘삘기’를
줄기 안에 머금고 있다가
가을이 오기가 무섭게
어느새 성큼 커 버린
저 들판 길섶의
‘띠[茅]풀’ 모습과도 헛갈려서,
이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건만
불평 한 마디 않던 억새가
이 가을
한가운데서
잔뜩 보풀린 머리를
바람결에 나부끼며
아예 춤을 추고 있었다.
소리 없이 너른 들판
가득히 넘실거리며
탐스럽게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때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지만
결코 억새들은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억새를
경기도(京畿道) 사람들은
‘으악새’라 불렀것다.
어허, 누가 일찍이
으악새 슬피 운다고 노래하였느뇨.
그날 보니
구월 그믐께가
억새들에겐 ‘제철’이었다.
그들만의 전성시대(全盛時代)였다.
그날 우린
으악새가 춤을 추는
억새밭 한가운데 들어가
적잖은 청춘(靑春)들 부럽지 않게
서로 보듬고
사진(寫眞) 꽤나 찍어 댔다.
그날 우린
억새 우거진 숲 속에서
꽤나 로맨틱(Romantic)한 시간을 보내다가
콜럼버스(Columbus)적(的)인 새로운 발견을
우연찮게 한 것이 하나 있다.
길고도 높다랗게 자란
억새 뿌리 근처에
세상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도
야생화(野生花) 몇 송이가
기생(寄生)하여
옆으로
때로는 아래를 향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우리 부부(夫婦)에게
홍자색(紅紫色)의 통(桶) 모양을
겸손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야고(野菰)’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몹시나 낯선 꽃이었지만
자태(姿態)만은
그윽하고도 기품이 있었다.
억새 줄기 밑
뿌리 근처에
줄기를 박고
뾰족이 자라다가 만 채
땅을 향해 핀 모습을
조용히 보노라니,
누구에게 꼭 보여 주기 위해
예쁘게 핀 꽃은 아닌 성싶었다.
자기(自己)를 ‘띠’나 ‘갈대’로
생각하든 말든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 한 마디 않은 채
묵묵히 온갖 신산(辛酸)을 맛보며
여러해살이로 살아오다가
이 가을 너른 들을 가득 채우며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제멋에 겨워
너훌너훌 춤을 추는
억새를 본받아,
그 그늘 아래
다소곳이
그윽이 핀
야고(野菰) 꽃을 보노라니,
아내와 나는
어느새 고개 숙여
얼굴빛이 홍자색(紅紫色)으로 변하며
겸손해지는 것이었다.
그토록 어여쁜 자태(姿態)를 갖추었으면서도
화용(花容)을 치켜들 줄 모른 채
겸손히 고개 숙이는
야고(野菰)의 품성과
제아무리 바람결에 흔들려도
울지 않는 억새의 강인한 물성(物性)을
새삼스레 깨달은
그날은 바로
우리 부부(夫婦)가
조촐히 은혼(銀婚)을
기념한 날이기도 하다.
2007 년 10 월 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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