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속(民俗)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의 정월 대보름께 풍습(風習)

noddle0610 2009. 2. 8. 23:55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의 정월 대보름께 풍습(風習)

음식 풍속 위주로 고찰(考察)한 정월 대보름 명절 쇠기 

 

사진  /  박   노   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가 명절의 연속(連續)이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침 일찍 온가족이 모여 차례(茶禮)를 올리고 떡국 등 설음식들을 먹는데, 가장 중요한 설음식인 떡국은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등 남도(南道)에서는 백(百) 퍼센트(percent) 떡국을 끓여 먹었고, 이북 지방(以北地方)이나 강원도 등 북도(北道)에서는 정초(正初) 음식으로 만둣국을 끓여 먹었으며, 집에 세배(歲拜)하러 온 손님들에게도 떡국이나 만둣국을 세찬(歲饌)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떡국은 가래떡을 얇게 썰어 맑은장국에 넣고 끓인 음식으로서,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이 생기게 된 것은 흰색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새로운 탄생을 기리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떡가래를 길게 늘려 뽑는 이유는 재산이 쭉쭉 늘어나라는 축복의 의미이고, 가래떡을 둥글게 써는 이유는 둥근 모양이 마치 화폐인 엽전(葉錢)의 모양과 같아서 새해에 재화(財貨)가 풍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고 합니다. 떡국을 한자(漢字)로는 병탕(餠湯)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상(祖上)들은 떡국을 일명(一名) 첨세병(添歲餠)이라고 일컫기도 하면서, 한 살을 더 먹는 상징으로 여겼습지요.^^* 우리나라 남쪽 지방은 북쪽 지방보다 쌀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명절에 쌀로 만든 떡국을 끓여 먹으며 새해맞이를 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저희 고향인 강원도나 이북(以北)에서는 설날에 남도 지방과 달리 만둣국을 끓여 먹었는데, 섣달 그믐께부터 온 식구들이 두레반상(~盤床) 앞에 빙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설날 차례상(茶禮床)에 차질(蹉跌) 없이 올리기 위해 밤새도록 만두(饅頭)를 정성스레 빚었습지요. 제가 어렸을 적엔 강원도 지방에 꿩이 흔했기 때문에 꿩고기를 다져 만든 만두소로 국을 끓였는데, 언젠가부터 꿩 대신 닭이나 산에서 사냥한 멧돼지 등 기타(其他) 다른 가축(家畜)들을 도축(屠畜)해서 만두소를 빚었습니다.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반죽해만두피를 만들고, 육류(肉類)와 두부, 김치 등의 다양한 재료를 넣고 만두소(만두속)를 만들어 만두피에 올려 빚은 음식이 바로 만두인데, 이는 복(福)을 싸서 먹는다는 의미가 있어 특히 설 명절에 만두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서울-경기-강원도 등(等) 중부지방에 널리 전해 내려왔습니다. 

  부산(釜山) 태생인 저의 아내는 결혼 전에는 정초(正初)에 전형적 경상도식(慶尙道式)으로 100% 떡국만 끓여 먹었다고 하는데, 강원도 남자에게 시집 와서 만둣국에 차츰 맛을 들이더니 이젠 만둣국 마니아(mania)가 되어, 시(時)도 때도 없이 강원도식(江原道式) 만두를 빚어 국을 끓이곤 한답니다. 꿩고기 대신 소의 네 다리뼈, 이른바 사골(四骨)을 푹 고은 국에다 말이지요.^^*

  우리 집 아이들은 제 어미와 아비 양쪽의 영향을 받아, 100% 떡국이나 만둣국 대신 일종의 퓨전요리(fusion料理)인 떡만둣국을 즐겨 먹습니다. 요즘에는 저도 아이들 때문에 떡만둣국에 맛을 들였고요. 그러나 아직도 강원도 촌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저는 100% 떡국은 단 한 그릇도 다 비운 적이 없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강원도 지방에서는 정초에 떡국이 아닌 만둣국을 전통적으로 즐겼지만, 흰떡을 차례상에도 올리고 세찬(歲饌)으로도 내놓는 등 우리나라 남쪽 지방 못지않게 의 수요(需要)는 상당히 컸습니다.

  섣달 그믐께가 되면 집집마다 맵쌀가루를 고수레[흰떡을 만들기 위해 쌀가루를 반죽할 때, 끓는 물을 훌훌 뿌려서 물이 골고루 퍼지게 하는 일]하여 시루에 찐 다음 안반[떡을 칠 때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 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나무 그릇. 이른바 구유 비슷하게 생긴 나무판. 목조(木槽)]에 놓고 힘센 장정(壯丁)이 떡메로 내리쳐서 만든 떡이 바로 흰떡[일명 백병(白餠)]입니다. 맵쌀가루로 반죽한 덩이를 쪄 낸 흰떡을 고수레떡[섬떡]이라고 하는데, 장정이 떡메를 다 치고 나면 아낙네들이 제각기 적당한 크기로 떡덩어리를 떼어 내어, 두레반상(~盤床) 등에 놓고 절편판[떡살 = 떡판]으로 내리눌러 예쁜 무늬가 새겨지도록 한 다음에 직사각형 조각으로 자릅니다. 이렇게 떡살무늬가 새겨진 채 일정한 규격으로 잘라 낸 흰떡들을 가리켜 절편 또는 절병(切餠)이라고들 불렀습니다. 바로 이 절편에다가 다시 토종(土種) 꿀벌의 꿀 찌꺼기로 만든 밀랍[蜜蠟 = 봉랍(蜂蠟) ‧ 황랍(黃蠟)]’ 녹인 기름을 자르르하게 발라 먹으면, 입 안 가득히 쫀득쫀득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요.^^  

  흔히들  토종 꿀하면 강원도 인제(麟蹄) 꿀을 으뜸으로 손꼽는데, 바로 인제군(麟蹄郡)과 양구군(楊口郡)의 경계인(境界人)으로 태어난 저는 요즘 고향의 토종벌 밀랍(蜜蠟) 기름을 바른 흰떡 구경을 한 지 하도 오래되어, 가끔씩 지독한 향수(鄕愁)에 젖어들곤 합니다. 저희 고향은 소양강 댐(dam)이 들어서는 바람에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어 버렸고, 흰떡을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주시던 우리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분들이 아니시기 때문에 저의 향수병(鄕愁病)은 이제 고칠 수 없는 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초에 만든 명절 음식들은 보름께가 되면 모두 꾸덕꾸덕 굳어져서 그대로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름날이 되면 그때까지 남아 있던 꾸덕꾸덕해진 흰떡이나 부침개 및 나물 따위의 온갖 명절 음식을 다 끌어 모아, 한데 넣어 끓이거나 다시 한 번 지지고, 볶고, 구워 먹습니다. 특히 정초 때 차례상에 올리고 남은 음식들 중 이른바 적(炙)은 메밀가루 반죽에 김치를 쭉쭉 찢어서 솥뚜껑 위에 기름 바르고 부친 일종의 부침개인데, 요즘 술안주로 즐기는 빈대떡과는 달리 종잇장처럼 얇게 부친 것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 인기가 좋았으며, 정월 보름께에 이르러서는 큰 냄비나 솥에다 물을 붓고 흰떡 따위의 설 음식들과 부침개들을 함께 버무려서 넣되 쭉쭉 찢은 김치까지 곁들여 팔팔 끓여 먹었는데, 이 음식은 엄밀히 말한다면 진짜 잡탕(雜湯)이라 할 수 있겠으나, 여하튼 그 맛이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정월 보름께가 되면 잡동사니 음식을 다 끌어 모아 잡탕을 맛있게 끓여 잡숫던 우리 조상들의 DNA는 면면(綿綿)히 이어져, 훗날 6.25 사변을 맞아 기아(飢餓)에 시달리던 피난민들에게 이른바 부대찌개 꿀꿀이죽이란 신형(新型) 잡탕(雜湯)을 선보이게 하였지요. 미군부대(美軍部隊)에서 유출(流出)한 음식물 찌꺼기를 가져다가 한데 넣어 죽처럼 끓여 팔던 음식이 부대찌개끌꿀이죽인데, 이 신형(新型) 잡탕류(雜湯類) 음식들이야말로 우리나라 퓨전요리(fusion料理)의 진짜배기 원조(元朝)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름명절 세시풍속도 지방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전국의 대부분 지방에서는 정월 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물고, 귀밝이술을 마시고, 오곡밥을 먹는데, 저의 고향 강원도 양구(楊口) 지방을 비롯해 인제(麟蹄)-홍천(洪川) 일대(一帶)에서는 음력 정월 14일, 그러니까 대보름 전날을 여름날이라 부르면서, 이 날 아침에 부럼을 깨물고, 귀밝이술을 마시며 오곡밥을 먹는 풍습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름철 내내 부스럼이 안 생기고, 천재지변(天災地變) 소리를 미리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밝아져서 각종 재해(災害)를 예방하고, 올 여름에도 오곡(五穀)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면서 말이지요.

  정월 열나흗날은 여름날이기 때문에 그날 아침에 강원도 영서 지방(嶺西地方)에서만 특별하게 지내는 풍습이 또 있습니다.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 전까지 이른바 더위팔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직접 마주칠 때마다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그가 대답을 하면 얼른  내 더위 사가라고 크게 외치며 선수(先手)를 거는 것입니다. 선수로 더위팔기를 많이 한 사람은 여름철에 더위를 먹지 않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름 내내 더위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인데, 어르신들은 아이들을 일찍 깨워 집 밖으로 나가게 할 요량(料量)으로 자꾸 더위팔기를 시키셨습니다. 해가 완전히 뜨면 동네 친구들에게 더위를 더 이상 팔 필요가 없게 되어, 비로소 집에 돌아와 밥상 앞에 앉아 오곡(五穀)밥과 아홉 가지 이상의 묵은 나물 반찬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저희 고향 양구(楊口)-인제(麟蹄)-홍천(洪川) 지역에서는 정월 열나흗날을 일명(一名) 머슴날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다른 지방에서는 음력 이월(二月) 초하룻날을 머슴날이라고 했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머슴이 가장 바쁜 것이 여름철이기 때문에, 정월 열나흗날 즉 여름날머슴날로 정해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턱내어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이 날 머슴들은 하루 동안 쉬면서 자기들 주인(主人)이 베푼 음식으로 포식(飽食)을 하고, 풍물(風物)을 치며 가무(歌舞)로 하루를 즐겼습니다. 이 머슴날은 다른 말로 하리아드랫날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날은 농촌사회가 예전과 많이 달라지고 머슴이란 제도(制度)도 없어져서 머슴날 풍속조차 사라졌습니다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부잣집에는 머슴들이 한두 명씩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노동자(근로자)의 날 행사, 즉 머슴날 행사를 해마다 음력 2월 1일에 치렀는데, 저희 고향인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에서는 정월 열나흗날 여름날 행사의 하나로 머슴날을 치른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날 행사 중에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횃불놀이 행사일 것입니다.

  보름달이 뜰 무렵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 미리 준비한 사람 키보다 더 큰 싸리비 모양의 [불이 잘 붙도록 싸리나뭇가지 사이에 불쏘시개감으로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 = 松明)을 박아 넣고, 노끈으로 군데군데 묶은 다음 맨 밑에 말뚝을 박아 땅위에 세운 물건]에 불을 붙이고 각자 소망을 빌며달님께 절을 한 다음, 불이 어느 정도 타면 땅에 세운 홰를 뽑아 말뚝 끝을 손에 잡고 휘두르며 횃불싸움을 했습니다. 싸움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횃불을 휘두르며 망월(望月)이야!……라고 소리 높이 외쳤는데, 그 망월이야 하는 소리를 줄여 망월(望月)!” “망월(望月)!이라고도 했기 때문에, 이 소리를 가리켜  망월(望月) 소리라고 합니다.

  근래에 깡통 음식이 범람하면서부터, 정월 보름에 횃불놀이를 할 때 전국적으로 나무가 부족한 동네에서는 깡통이 사용되었지요. 도시에서는 일제(日帝) 시절부터 횃불놀이를 할 때 서양에서 들여온 깡통을 사용했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우리 고향에서는 횃불싸움을 할 때 깡통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는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깡통을 사용하는데, 시골에서는 대보름 달맞이 놀이를 위하여 깡통을 사용할 경우, 미리 깡통 여러 곳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다가 산에서 꺾어 온 싸리나무 가지와 관솔[송명(松明)]을 쑤셔 넣고는 불을 붙여 빙빙 돌리며 망월이야!라고 외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돌리다가 깡통 속의 나뭇가지와 관솔이 거의 다 불에 타 버릴 즈음에 하늘 높이 던져 올리면, 그 불똥이 공중에서 사방으로 튀면서 산화(散華)하는 모습이 아주 장관(壯觀)이지요. 마치 화약(火藥)을 사용하는 불꽃놀이처럼 말입니다.

  화약을 사용하는 불꽃놀이는 애초 중국에서 시작하였으며, 삼국지(三國志)의 주인공들보다도 더 옛날인 한(漢)나라 때부터 유행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음력 정월 첫 번째 쥐날에 쥐를 쫓는다는 의미로 논둑과 밭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는 이른바 쥐불놀이 행사와,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 청소년들이 편을 갈라서 동산에 올라가 농악소리를 신호로 횃불을 들고 싸우는 풍습은 전혀 다른 것인데도 요즘 사람들은 이 쥐불놀이횃불싸움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쥐날과 대보름날이 일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도 말이지요.^^*

 

  예전에 우리 고향에서는 해마다 정월 보름날 밤을 맞게 되면, 동네 뒷동산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올라가 대보름달을 맞이해 횃불을 돌리며 소망을 빌고 횃불놀이 등에 참가한 후에,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때까지 집에 남아 있던 꾸덕꾸덕해진 떡 따위의 명절 음식들을 다 끌어 모아 퓨전요리(fusion料理)를 만들어 동동주 까지 곁들여 먹고 마시며, 온 식구가 대보름달처럼 둥글게 화합하는 정신으로 명절의 피날레(finale)를 장식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해마다 정월 보름만 돌아오면, 어린 시절 대보름날 저녁에 저희 어머니가 식구들을 위해 질화로 위에 석쇠를 얹고 가래떡을 구워 주시던 기억을 아스라이 떠올리곤 합니다. 당시 저의 나이가 어려 동동주는 함께 마시지 못했지만, 알맞게 구워진 가래떡을 연신 조청(造淸)에 찍어 먹으면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곁들여 마시던 그때 그 시절 기억을 말입니다.

 

 

  올해 대보름날 저녁에는 사랑하는 식구들과 함께 저희 집 마당에 나가 달님을 마중한 연후(然後)에, 제 아내에게 가래떡을 구워 달래서 조청(造淸) 대신 유채(油菜) 꿀에 찍어 먹으며, 우리 집 식구들의 안녕(安寧)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꿈꾸어 보렵니다.

 

 

기축년(己丑年) 정월 보름날에 즈음해

 

 

   

 

39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