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운 내 고향

더수러니 십 리 고개를 매일 걸어서 넘어 다니던 중학생 시절을 그리며

noddle0610 2011. 3. 8. 05:21

 

  

더수러니 십 리 고개를 매일 걸어서 넘어 다니던 

중학생 시절을 그리며





 

 

 

 

강원도의 우리 고향 마을에서 중학교에 통학(通學)하려면 석삼년 동안을 속칭(俗稱) 더수러니 십 리(十里) 고개를 걸어 넘어 다녀야 했다. 대충 어림잡아 직선거리(直線距離)십 리 고개라고들 했을 뿐, 지금 생각하면 그 고갯길은 실제로 이십 리(二十里)도 훨씬 넘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산길로서 5.16 군사혁명 이전까지는 자동차가 전혀 다닐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비좁고 위험한 애로(隘路)였다. 한 시간이 넘게 구불구불 오솔길과 산골짜기 시냇물을 건너 다시 험준한 산 정상을 넘어가야 겨우 산기슭 아래에 있는 학교가 내려다보였는데, 산을 내려가는데도 삼사십 분은 족히 걸렸다.

 

서울의 남산(南山)보다도 더 높고 험준한 오솔길로만 이어지는 20여 리 길의 더수러니 고개를 넘나들며 학교를 다녀야 한 나는 독서광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매일 하굣길에 쉬엄쉬엄 고개를 넘으며 책을 읽는 버릇을 길렀다. 천천히 걸으며 읽기도 하고, 산등성이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고목(古木)나무 그루터기나 너럭바위에 앉아 쉬며 큰소리로 책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때 겨우 중학교 일학년에 불과했던 나는 영문학자(英文學者)인 석경우(石耕牛) 최재서(崔載瑞 : 1908~1964) 선생이 번역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戱曲) 『햄릿(Hamlet)』을 의미도 잘 모른 채 무조건 낭독을 하였고, 대사(臺詞)의 상당 부분을 암기하여 친구들 앞에서 신파조(新派調)로 읊조리기도 하였다.

당시까지 정통 연극(演劇)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어렵사리 구경한 연극이 신남(新南) 장터에 가끔씩 찾아온 유랑극단의 신파극(新派劇)두서너 편(篇)이 고작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금할 수가 없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웅변(雄辯)을 시작해 중학교 시절에는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군내(郡內)에서 개최하는 각종 웅변대회를 두루 석권하였던 나는 오늘날 소설가로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제읍(麟蹄邑) 출신의 이외수(李外秀) ()을 제치고 농업협동조합 진흥을 주제(主題)로 한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었는데, 바로 그 때 본격적인 웅변을 한 덕분에 변성기를 넘기며 목청을 크게 틔울 수가 있었고, 정확한 발성(發聲)과 표준어 발음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목청이 좋고 커서 당시 국민학교에서 해마다 열리는 학예회(學藝會)의 연극 부문에서는 으레 주연(主演)을 맡곤 했는데, 또렷한 음성으로 안중근 의사검사와 여선생의 주인공을 했던 일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여튼 웅변 덕분에 망외(望外)로 연극 연기 중 발성에 대한 기본기까지 닦은 나는 중학교 다닐 때 최재서의 번역본(飜譯本) 『햄릿』을 독파하고 암송하여, 희곡(戱曲)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으며, 웅변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직접 원고를 써야 했기 때문에 글쓰기에 일찍부터 눈을 뜨게 되었다. 맨 처음 웅변대회에 출전할 때만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원고를 써 주셨을 뿐, 그 다음 번부터는 선생님들께서 내가 직접 글을 쓰도록 지시하셨기 때문에 사실상 그분들 원망을 많이 했지만, 지금 와서는 외려 그분들을 무척 고마우신 분들로 여기고 있다.

비록 뒷날에 이르러 문사(文士)로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강원도 토종(土種) 감자바위 출신인 내가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해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평생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중학교 시절에 매일매일 구불구불 오솔길과 산골짜기 시냇물을 건너 한양(漢陽)목멱산(木覓山)보다 더 드높은 더수러니 고개를 넘어 통학을 하며 폭넓은 독서와 사색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같다. 그 시절 은사(恩師)님들의 권고로 각종 웅변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직접 원고를 작성하면서 점차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도 전공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무론(毋論)이다.

 

훗날 서울에 유학(遊學)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에는 취미로 웅변 활동과 문예반 활동을 함께 하였고, 대학 재학 중에는 역시 취미로 문학 서클(circle : 동아리)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그런데 대학 시절 내가 활동하던 문학 서클 15인 문학동인회(十五人文學同人會)에 극작(劇作)과 연기(演技)를 전공하는 한 친구가 가입하여, 나는 그 친구 덕분에 비로소 본격 정통 연극을 무수히 관람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내가 이미 중학교 때 강원도(江原道) 인제군(麟蹄郡) 신남리(新南里)의 더수러니 고개를 넘나들며 읽은 『햄릿』을 통해 친숙해진 희곡(戱曲) 장르(genre)에 새삼스레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몇 편의 희곡을 연습 삼아 써 보기도 했고, 그 친구가 내게 보여 준 희곡의 문장을 손보아 주기도 했다. 친구의 희곡을 내가 이른바 윤색(潤色) 내지 윤문(潤文)을 해 준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 친구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내가 쓴 희곡 『환타지 만()』을 그 친구가 서울 시청(市廳)의 맞은편 북창동(北倉洞)에 있는 멕시코 살롱(Mexico salon)에서 연출(演出)을 맡아 공연(公演)을 했다. 멕시코 살롱은 중미(中美)에 있는 멕시코연방공화국의 대통령 한 분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다녀간 곳이라 해서, 상호(商號)멕시코 살롱이라고 했다는데, 당시에는 명소(名所)였지만 나중에는 없어지고 말았다.

1960년대(年代) 1970년대 초반에는 서울에서 소위 살롱 드라마(salon drama)유행하였는데, 살롱 드라마의 특징은 대부분 일인극(一人劇) 아니면 일인다역(一人多役)모노드라마(monodrama)이거나, 이인극(二人劇)이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에 오태석(吳泰錫 : 1940~) 씨의 희곡을 서울 명동(明洞) 뒷골목에 있던 카페 데아트르(Cafe Theatre)에서 서울대학교 미학과(美學科) 출신 연극배우 김동훈(金東勳 : 1939~1996) 씨가 초연(初演)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는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최초의 모노드라마(monodrama)이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 1883~1924)의 소설 『어느 학술원(學術院)에 드리는 보고(報告)』를 각색(脚色)하여 1977년에 삼일로(三一路) 창고 극장무대에서 추송웅(秋松雄 : 1941~1985) 씨가 처음으로 공연한 『빨간 피터의 고백』도 대표적인 모노드라마였다. 이 『빨간 피터의 고백은 추송웅 씨 사후(死後)에 내 친구가 여러 차례 공연하여 다시 유명해졌으며, 2010년에는 그가 중국 북경(北京)에까지 가서 직접 중국어로 공연해 중국 측으로부터 상()까지 받은 바도 있다. 1969년에 김금지(金錦枝 : 1942~) 씨와 추송웅 씨가 명동(明洞카페 데아트르에서 초연(初演)했던 미국 출신 작가 머레이 쉬스갈(M.Schisgal)의 『타이피스트(typist)』는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이인극(二人劇)의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작품이다.

내가 쓴 오리지널(original) 희곡 『환타지 만()』은 바로 일인다역(一人多役)의 모노드라마(monodrama)로서 한 파계승(破戒僧)의 옛 연인(戀人)에 대한 회상과 갈등 내지 번뇌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 친구는 나의 처녀작(處女作)인 『환타지 만()』의 연출뿐만 아니라 직접 주연(主演)을 맡아서 일인다역(一人多役) 역할을 훌륭하게 해 냈다. 이 작품 공연 당시 무대(舞臺)에는 내 친구 혼자 등장하여 열연(熱演)을 했지만, 사실은 무대 커튼(curtain) 뒤에 숨어서 주인공의 과거 애인(愛人) 역할을 맡아 목소리 연기만 객석(客席)을 향해 내보낸 여배우(女俳優)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얼굴 없는 목소리 연기만 했으므로 관객은 그녀가 누군지 아무도 몰랐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정진(精進)을 거듭한 내 친구는 훗날 우리나라 모노드라마 연출 및 연기 부문에서 가위(可謂최고의 달인(達人)이 되었으며, 6공화국 시절에 『술』이란 모노드라마를 본인이 직접 창작하고 연출 및 주연을 맡아 홍익대학교 앞 산울림극장에서 성황리(盛況裏)에 공연하여, 그해 각종 언론 기관에서 베푸는 상()이란 상()은 내 친구가 죄다 휩쓸다시피 했다.

나의 절친했던 연극인(演劇人) 친구, 그 친구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연극배우(演劇俳優)이자, 성우(聲優), 탤런트(talent)이자, 영화배우요, 극작가(劇作家)이자, 연극 연출가(演出家)로 널리 알려진 예술인(藝術人) 주호성(朱虎聲) 군(君)이다.

본명(本名)장연교(張然敎)인 내 친구는 예명(藝名) 주호성보다 요즘 한류(韓流) 가수(歌手)이자 영화배우로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장나라()의 아버지로서 더 유명하다.

장나라 양의 이름은 예명(藝名)이 아닌 본명(本名)으로서, 1981년 봄에 그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 장연교(주호성) 군이 내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찾아와 작명(作名)을 부탁하기에, 며칠 고심(苦心) 끝에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 준 순수한 한글 이름이다.

내가 이름을 지어 주게 된 자세한 경위는 장나라 양의 공식 팬클럽 홈페이지 나라짱닷컴(narajjang.com, WEBZINE, webzine story : 아부지가 보는 장나라 : 나리, 달이, 나라)에 언급되어 있다.

나는 주호성 군이 내가 지어 준 자기 딸아이의 이름이 혹시나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지어 달라고 부탁할지도 몰라, 이를 예방하고자 장나리, 장달이, 장나라 세 개를 지어 주며 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흔히 여자들이 처녀 시절에 남자들이랑 이른바 그룹 데이트(group date)하러 나갈 때나, 남자 친구에게 그녀의 여자 친구들을 소개하러 나갈 경우에, 일부러 자신보다 못 생긴 여자 친구들을 동반하면 상대방 남자가 다른 여자 친구들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그 중 미모가 가장 돋보이는 자신에게만 눈길을 주어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듯이, 나는 주호성 군이 장나리, 장달이, 장나라 중에서 틀림없이 가장 예쁜 뉘앙스(nuance)를 지닌 장나라를 선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예상대로 내 친구 주호성 군은 세 개의 이름 중에서 고심 끝에 가장 어감과 의미가 좋은 장나라를 택하였고, 더 좋은 이름을 지어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도 이름 셋 중에서 서슴지 않고 장나라를 선호(選好)하였음은 물론이다.

주호성 군의 부인(夫人), 즉 장나라 양의 어머니는 바로 대학 시절에 살롱 드라마로 공연한 나의 작품 『환타지 만()』에 픽업(pick up)되어 무대 뒤에 숨은 채 목소리 연기만 맡은 여배우(女俳優)로 출연하여, 『환타지 만()』의 첫 공연을 계기로 내 친구와 사귀기 시작해 결국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탤런트 장성원 군과 한류 스타(韓流star) 장나라 양 남매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 냈다. 결과적으로 내가 주호성 군 부부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연극 공연의 대본(臺本)을 써 준 것이 바로 직접적 계기가 되어 종당(從當)에는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장나라 양의 이름까지 지어 주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들 부부와 나의 인연은 정말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보다 비록 나이는 조금 덜 먹었지만 연애를 훨씬 잘해서 나보다 먼저 결혼을 하였기에 일찌감치 아들딸 남매를 낳아 둘 다 훌륭하게 길러 낸 주호성 군이 몹시 부럽다는 생각이 요즘 와서 부쩍 든다. 


주호성 군은 십여 년 전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병원 영안실(靈安室)까지 찾아와 조문(弔問)하며 밤이 이슥하도록 머물러 나를 간곡히 위로해 준 바도 있다. 대학교에서의 전공은 서로 달랐지만 이른바 서로 코드(code)가 통해, 나는 가끔 그가 연출하거나 주연을 맡은 연극 공연을 관람하곤 했는데, 작금(昨今)에 이르러서는 그 친구가 딸의 연예활동을 뒷받침하는 회사(會社)를 직접 운영하느라 정작 본인의 연기생활을 거의 접어 버려서 무척 유감스럽다 

 

다시 회상하건대,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문학과 연극을 남달리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중학생 시절에 우리 고향 강원도 오지(奧地)의 험준한 두멧길을 오가며 호젓이 독서와 사색을 3년 내내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두멧사람이라 할지라도 중학생 당시(當時)의 우리 고향에 버스나 자동차가 드나들었다면 아마도 등굣길 하굣길에 산등성이 오솔길 고목나무 그루터기나 너럭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독서나 사색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고향에 버스가 드나들게 된 것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일이다.

내가 다닌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에는 신남리(新南里)를 비롯해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에 속하는 마을들은 물론이요, 멀리 양구군(楊口郡) 남면(南面)의 일부 마을들과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에 속하는 수산리(水山里) 출신 학생들까지 통학하고 있었는데,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 3개 고을[]의 학생들이 등교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려서 거의 매일 등교 완료 시간이 일정치 않았다. 자동차가 왕래하는 마을에도 버스는 하루에 몇 차례만 간헐적으로 다녔고, 그것조차 가난한 학생들은 차비가 없어서 버스를 그냥 보낸 채 삼십 리가 넘는 신작로 길을 터벅터벅 걸어 다녀야 했으며, 어쩌다가 운수 좋은 날에는 육군 3군단(三軍團) 소속의 국방색 지엠시(G.M.C.) 트럭을 겨우 얻어 타고 등교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구차스러운 사정들 때문에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고향의 초중등학교들은 일정한 시간에 정규 수업 1교시(一校時)를 시작하지 못하고, 주번 교사(週番敎師)가 교실을 두루 순시한 다음에 학생들이 거의 다 등교한 것으로 여겨지면 비로소 요란스레 타종(打鐘)을 하여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또 통학 거리(通學距離)가 먼 학생들이 밤늦게 귀가(歸家)하는 일이 없도록 매교시(每校時)마다 40분씩만 수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수업 시간인 6~7교시는 그 당시 대도시(大都市) 학교들에 비해 상당히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항상 느긋한 마음으로 등하교(登下校)를 하곤 했는데, 이런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등하굣길에 독서와 사색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했고, 셰익스피어 옹()의 희곡 낭독 연습이나 각종 웅변대회 출전을 대비한 원고 암송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 결국 문학과 연극을 사랑하는 오늘의를 이루게 했다. 비록 훌륭한 문사(文士)나 예술인으로서 입신(立身)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은 1970년대 초에 소양강 댐(昭陽江dam)의 준공(竣工)과 더불어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어 마을 전체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러나 내가 까까중머리 중학생 때 석삼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넘어 다니던 구절양장(九折羊腸)더수러니고갯길은 오늘날 아스팔트(asphalt)로 포장한 국도(國道)로 변하고, 온갖 차량들이 매일 경치 좋은 소양호(昭陽湖)를 굽어보며 오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비록 자동차 한 대() 오가지 못하던 우리 고향 두메산골이지만, 봄철에 등성이에서 진달래 한 아름 따먹고 한여름이면 계곡에서 물장구치던 그 두멧구석의 내 고향 옛 마을이 그립다. 오늘의 를 만들어 준 저 중학생 시절에 내가 청운의 꿈을 간직한 채 넘나들던 내 고향의 그 고갯길이 오늘따라 눈물겹게 그립다.

 

  이 몸이 서울에 올라와 산 지 어느덧 반세기(半世紀)가 지났건만, 사실상 이미 삼십여 년 전에 댐(dam) 속으로 사라진 고향 마을의 본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사춘기(思春期) 시절에 독서와 사색을 즐기던 두멧길 기슭의 고목 그루터기와 너럭바위 따위를 여태껏 잊지 못하는 라는 위인(爲人)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천생(天生) 두멧놈인가 보다.

 

 

2011 3 8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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