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영화 감상

임금이 아닌 세자(世子)는 과인(寡人)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어

noddle0610 2011. 7. 26. 01:52

 

 

 

 

 

 

 

임금이 아닌 세자(世子)는 ‘과인(寡人)’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어 

 

SBS 드라마무사 백동수대사(臺詞) 일부 고증(考證) 오류

 

 

 

 

 

  나는 SBS TV 월화(月火) 사극(史劇)무사 백동수를 방송 첫날 첫 회(回)부터 상당한 관심을 갖고 시청하고 있다. 

 

  주인공인 야뇌(野餒) 백동수(白東脩 1743~1816) 선생은 우리나라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시대 최고의 검객(劍客)이자 출중(出衆)한 협객(俠客)이다. 그는 일찍이 1773년부터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麒麟)골 그러니까 오늘날의 인제군 기린면 진동 계곡에 낙향해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1780년까지 농사를 짓고 무예를 수련하였는데,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낙망과 좌절의 시기가 아닌 훗날 정조(正祖) 임금의 후원을 받아 동양(東洋) 최고의 종합무술(綜合武術) 교범(敎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 위해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도약(跳躍)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동양 삼국(東洋三國)의 무기술(武器術) 십팔기(十八技)와 마상(馬上) 무예(武藝) 여섯 가지를 종합한 이른바 이십사반무예(二十四般武藝)가 아주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강원도 인제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은연중(隱然中)에 우리 고향 인근 고을과 인연이 깊은 백동수 선생이 동양 최고의 무술 서적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자라는 사실이 노상 자랑스러웠다. 

 

  사극(史劇)무사 백동수에 관해 나의 관심이 너무 깊어서일까. 드라마 첫 방송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재방송(再放送)이 아닌 본방송(本放送)을 사수해 가면서 시청(視聽)하고 있는데, 심히 유감스러운 것은 주인공 백동수가 사실과는 다르게 천애(天涯)의 고아(孤兒)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동수의 아버지 백사굉(白師宏)은 역모죄(逆謀罪)로 죽지도 않았을 뿐더러 백동수의 모친 또한 출산(出産) 후유증으로 죽지 않았는데, 사극(史劇)무사 백동수는 극적(劇的) 효과를 위해 동수(東脩)의 성장 과정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고 있다. 백동수의 부모는 후일에 성인으로 장성한 아들이 1771년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자리에 진출하지 못하자 1773년에 아들 백동수를 따라 강원도 인제군 기린 고을에 낙향해 함께 살았다. 즉 실제의 백동수는 이른바 결손가정(缺損家庭) 출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SBS TV 사극(史劇)무사 백동수는 시청률의 제고(提高)를 위해 초장(初場)부터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 드라마(drama)는 르포르타주(reportage)-다큐멘터리(documentary)-전기(傳記) 따위의 논픽션(nonfiction)이 아니니까 작품의 원래 소재(素材)를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다. 하지만 픽션(fiction)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현실성(reality)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야 시청자의 공감(共感)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은 디테일(detail)한 면(面)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考證)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야 시청자나 독자들에게서 신뢰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SBS TV 드라마무사 백동수는 스토리(story)는 차치(且置)하고, 방송 초창기의 중요한 등장인물의 대사(臺詞)부터 왜곡되고 있어서, 시청자로부터 신뢰감을 잃고 있다.

  제아무리 재미있는 스토리 전개가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역사적 고증과 어긋나는 부분들이 자꾸 드러나면 더 이상 드라마를 시청할 때 집중이 잘 안 되겠다 싶어서, 감히 대사(臺詞)의 일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보고자 졸문(拙文)을 집필하게 되었다.

 

무사 백동수의 도입(導入) 부분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는 훗날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아버지이자, 실제로 검술(劍術)에 대한 조예(造詣)도 깊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드라마의 내용 전개상 주인공 백동수 부자(父子)와의 인연이 아주 밀접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인물이다.

 

  중견 탤런트 오만석 군(君)은 기왕(旣往)에 출연했던 방송드라마나 연극 및 사극 따위에서 보여 준 그의 이미지(image)와 어울리게 이번 출연 작품인무사 백동수에서도 우수(憂愁) 어린 사도세자(思悼世子) 역할을 맡아 비교적 무게 있는 연기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무사 백동수에서는 여전히 중후한 연기력을 보여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단순히 대본(臺本)에 의해서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을 과인(寡人)이라고 일컬었다. 이는 그릇된 1인칭(一人稱) 사용이다.   

  ‘과인은 임금이 겸손의 뜻으로 자기를 낮추어 하는 말인 바, 사도세자는 아직 왕이 아니고 부왕(父王)인 영조(英祖)를 대신해서 단순히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았을 뿐이므로 과인이란 1인칭을 절대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는과인이란 1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의 임금 즉 금상(今上)인 주상(主上)뿐이다. 예외적(例外的)으로 국초(國初)의 태상왕(太上王) 이태조(李太祖)와 상왕(上王) 정종(定宗)이과인이란 말을 제3대 임금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사용한 적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조선 말기(朝鮮末期) 고종(高宗)의 생부(生父)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섭정공(攝政公)으로서 스스로를여(余)또는여(予)라고 했다는데, 왕세자(王世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 또한 1인칭으로서여(余) 또는 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推定)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자면, 임금이 아닌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愃 1735~1762) 저하(邸下)는 오직 지존(至尊)의 지위에 오른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을 감히 스스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고 본다.

 

  중국(中國)의 경우에는 천자(天子), 즉 황제(皇帝)는 짐(朕)이라는 1인칭을 사용했고, 제후(諸侯)의 으뜸인 왕(王)들은 과인(寡人)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요즘 방영(放映)하는 중국 TV 사극(史劇)을 보면 황제 휘하(麾下)의 열왕(列王)들은본왕(本王)이란 말을 1인칭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는 바, 중국의 왕(王)들은 우리나라 왕들과 달리과인말고도 본왕을 곁들여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국(舊韓國) 즉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의 황제였던 고종(高宗)과 순종(純宗) 두 분이짐(朕)이란 1인칭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사용했지만, 일제(日帝)에게 국권(國權)과 함께 황위(皇位)를 빼앗긴 후 이태왕(李太王)과 이왕(李王)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다시과인이란 1인칭을 사용하다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은 채 승하(昇遐)했다.

 

  마지막 황태자(皇太子)였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69) 전하(殿下)는 왜놈들에 의해 이왕가(李王家)왕세자(王世子)로 강등(降等)되었던 탓에, 결과적으로 생전에 과인이란 1인칭을 변변히 사용도 못해 본 채 일생(一生)을 마감했다. 

 

  이상(以上)에서 지적한 사실 말고도 SBS TV 드라마무사 백동수에는 출연자들의 대사(臺詞)는 물론이요,옥(玉)의 티처럼 의상(衣裳)이나 헤어스타일(hair style) 및 세트(set) 따위에 고증(考證)이 제대로 안 된 것들이 간헐적으로 보이지만, 오늘은 이쯤 해 두고 글을 맺으련다. 내가 강원도 인제 고을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고향 고을과 인연이 깊은 협객(俠客) 백동수 선생을 다루는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隱然中)에 간절하기 때문이다.

 

 

2011 7 25

 

SBS TV 드라마무사 백동수를 시청(視聽)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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