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 입원하던 날
일요일 오후에 작은딸애가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내 나이 마흔이 가까워 갈 무렵
어렵사리 얻은 작은딸애가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몹쓸 병(病)에 덜컥 걸려
수술을 받으려고
남들 다 쉬고 있는 공휴일 오후에
암병동(癌病棟)에 입원했다.
입원 하루 전에
딸애는
두려움을 못 이긴 나머지
자기 엄마 품속에 안긴 채
한 시간이 넘게 통곡을 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자식놈의 그처럼 처연(凄然)한
울음소리를
한 시간 넘게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죄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다가
결국엔 그런 병까지 걸려야 하느냐고
울며불며 따지고 따지며
자기 어미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작은딸아이의 모습을
나는 그저 묵언수행(默言修行)하는 사람처럼
잠자코 바라보아야만 했다.
딸애의 울음소리가
점차 고조(高潮)될수록
나의 영혼도
내 심장에서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이 늙은 아비가 차라리
딸내미 대신 아플 수도 없고
그 두려움을 덜어줄 수도 없고
…… ……
아, 정말……정말이지
‘멘탈(mental) 붕괴’란 낱말은
바로 오늘 같은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 동안 너무 바쁜
직장생활을 하느라
부녀지간(父女之間)에
가벼운 스킨십(skinship)조차
변변히 나누지 못하고 지내온
이 못난 아비로서는
이젠 딸아이를 포옹해 주는 일조차
너무 쑥스러워서
고작 격려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워도 참아라!
견디어 내라!
…… ……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등등(等等)의 메마른 말만
몇 마디 건넸을 뿐,
1986년에 태어난 내 딸에게
1940년대에 태어난 늙은 아비는
그 세대 차이만큼
형편없이 뒤떨어진
그런 아비였다.
저 5공화국 시절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이른바 유월항쟁(六月抗爭)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태어난
우리 딸아이는
당시 시국(時局)이 어지러워
제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도
열 달 내내
최루탄(催淚彈) 지랄탄의
지독한 연기(煙氣)를 마셔야 했고
태어나서도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민주화 운동(民主化運動)을 하는
데모(demo) 군중의 함성 소리를
지척(咫尺)에서 들으며
최루탄 지랄탄의
매캐한 냄새를 진종일(盡終日) 맡아야 했다.
이런저런 사유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병치레를 하기 시작해
스물여섯 해 동안
갖가지 질병과 친구로 지내더니
급기야(及其也)
우리 딸애는
추운 겨울날
일요일 오후에
남들이 모두 꺼려하는
암병동(癌病棟)에 입원했다.
2012 년 12 월 16 일 밤에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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