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 집

우리 집 만권(萬卷)의 장서(藏書)를 언제 다 읽으랴

noddle0610 2015. 9. 5. 03:59

 

 

 

 

 

 

 

 

 

우리 집 만권(萬卷)의 장서(藏書)를 언제 다 읽으랴

 

독서의 계절에 즈음해

 

 

벗님아!

이 사람 고충(苦衷) 한 번 들어 보시게나.

 

1960년대 초에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운(靑雲)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경(上京)할 적에 

 

나는 문자 그대로 빈손으로 왔었네.

 

그해 크게 유행한 노래가

아마 맨발의 청춘이었을 걸세.

 

5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크게 출세(出世)도 못하고

겨우 서울 변두리의

조그마한 단독주택에 살면서

 

내 수중(手中)에 있는 건

 

애오라지 만권(萬卷)에 이르는

손때 묻은 책()들뿐일세.

 

서울에 사는 동안

 

총각(總角) 때는 이사(移徙)를 다섯 번이나 다녔는데

결혼 후에는 딱 두 번밖에 이사를 안 했네.

 

나도 남들처럼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기다릴 성싶은

강변(江邊)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지만

 

지금껏 재산 가치도 별로 없는

서울 변두리 동네의

단독주택에 고집스레 살고 있는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님이

내게 남겨 주고 가신

아주 오래 된 살림살이들과

 

내 손때가 묻은

만권의 책들을 갈무리하기엔

 

아주 오래된 단독주택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네.

 

시방(時方)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비록 낡고 누추(陋醜)하지만

 

아담한 마당도 있고,

 

마루도 있고,

다락도 있고,

벽장(壁欌)도 있고,

 

안방

건넌방

골방도 있고,

 

아래 위층

큰방 작은방들이

 

도합(都合) 여섯 개나 있으니 

 

내 어찌 물질적 가치에

눈이 어두워서

 

수십여 년 아끼던 물건들을

내동댕이친 채

함부로 이사를 할 수 있으랴.

 

그저 책을 사들일 때마다

기분이 좋았고

 

집안 벽()마다 서가(書架)에 빼곡히 채워져 가는

서책(書冊)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기분이 너무너무 행복하였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영혼이 살찌는 것 같고

 

하루하루 내 마음이

부자(富者)가 되어가는 듯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네.

 

대통령도

사장님도

강남 땅부자 영감님도

 

성공한 예술가(藝術家)들조차

부럽지 않았네그려.

 

하루하루 쌓여가는

우리 집 서재(書齋)

책들을 읽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서

 

남들을 부러워할 시간이

거의 없었네.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라

일터에 나가 일을 할 때도

 

책을 읽지 못해

하루 온종일

안타까워했을 뿐이네.

 

막상 나이 먹고

일터에서 물러나게 되니

 

온종일 집에 들어앉아

책을 읽을 수 있어

좋겠구나 했지만

 

이미 육신(肉身)이 쇠약해진

낡은이가 되어

 

사흘이 멀다 하고

병원(病院) 나들이 하느라

 

요즘엔 진득하게 집에 들어앉아

독서(讀書)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네그려.

 

요즘도 매달 용돈의 절반은

서책(書冊)을 사들이는 일에

다 쏟아 넣지만

 

요즘 이 사람 건강상태로는

 

새로 사온 책들은커녕

기왕(旣往)에 모아 두었던 책들조차

다 읽지도 못한 채

 

몇 해 못 가서

이승과 작별할 듯싶어

걱정이라네.

 

죽는 것은

크게 두렵지 않으나

 

수십여 년 정성스레 수집한

만권(萬卷)의 책들을 두고 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라네.

 

다른 이들에겐 폐휴지(廢休紙)와 다름없는

헌 책 나부랭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한 권 한 권 사들일 때마다

가슴 뿌듯해하던

 

내 새끼같이 애지중지하던

나의 분신(分身) 같은 책들인데

 

다 읽지도 못한 채

저승길로 갈 생각을 하니

 

얼마 전부터는

 

우리 집 서가(書架)에 빼곡히 채워진

서책(書冊)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뿌듯한 게 아니라

가슴이 짠하니 아프기 시작했네.

 

1960년대 초에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운(靑雲)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서울에 올라온 이래(以來)

 

크게 출세도 못하고

큰돈을 못 번 것은

 

그다지 후회되지 않지만

 

애초에 전부 다 읽어 보려고

모아 둔 만권(萬卷)의 책들을

 

그냥 두고 가기란

여간(如干) 가슴 아픈 게 아닐세.

 

우리 집 거실(居室)의 책들,

 

안방과

건넌방

골방의 책들,

 

아래 위층

큰방 작은방들은 물론이요,

 

다락에 쌓아 둔 책들과

벽장 속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까지

 

대충 헤아려 보니

 

50여 년 세월을 서울에 살면서

모아 놓은 책들이

 

어언(於焉) 만권(萬卷)에 가까운 듯싶은데

 

그중 내가 읽은 책들은

솔직히 고백하노니

 

절반 밖에 안 될 성싶네.

 

하느님이 내게 주신

나머지 삶의 기간 동안

 

아무리 열심히 책을 읽어도

다 읽고 가긴 힘들 성싶네.

 

오호, 내 벗님아!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길이라지만

 

내 머릿속만은

꽉 채우고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유행가(流行歌) 노랫말 그대로

 

미련일랑 두지 말고

이승을 떠나야 할까 보네.

 

자네가 진정(眞正나의 벗이라면

 

이 늙은 범부(凡夫)

번뇌(煩惱)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게시리

 

정곡(正鵠)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한 말씀을

 

우렁차게

던져 주시게!

 

2015 9 5

 

독서의 계절에 즈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