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종(再從)형님의 젊은 시절 사진 유감(有感)
어느 날, 옛날에 찍어 두었던 흑백 사진(黑白寫眞)들을 정리하다가
1960년대 후반기에 우리 재종(再從)형님이 군대생활을 하실 때 찍은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우연찮게 발견하였다.
1944년생이신 재종형님은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네 살이시다.
젊은 시절엔 우리 고향 강원도 양구(楊口)-인제(麟蹄) 고을에서 헌헌장부(軒軒丈夫)로 유명했건만 시방(時方)은 병상(病床)에 누워 계신다.
멀찌감치 오십 미터 전방(前方)에 떨어져서 보아도 눈에 확 띄던 우리 훈남(薰男) 형님이 나이를 잡수시더니, 지금은 밤낮으로 침상(寢床)에 누워 계시거나 휠체어에 의지해 겨우 바깥 출입을 하신다.
고향 마을이 소양강(昭陽江)댐에 수몰(水沒)되어 강원도 철원(鐵原) 땅으로 이사하신 후로는 자주 뵙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한 집안에서 태어나 함께 뒹굴고 자란 과거(過去)를 공유(共有)하고 있기에 우린 늘 끈끈하던 우애(友愛)를 지금껏 잊지 않고 살았는데, 지금은 이 몸 또한 자동차를 못 탈 만큼 건강이 부실해져서 벌써 여러 해째 형님을 못 뵙고 있다.
우리 형제(兄弟)는 서울의 남산(南山)보다 훨씬 높은 강원도 양구(楊口)-인제(麟蹄)의 경계선에 있는 산등성이를 넘어서 꼬불꼬불한 고갯길 밑에 자리 잡고 있던 시골 중학교(中學校)를 2년 동안이나 함께 다녔는데, 6.25 사변으로 학령(學齡)을 넘기신 탓에 형님은 인제군(麟蹄郡) 소재(所在)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 7회 졸업생이 되셨고, 나는 신남중학교 8회 졸업생이 되었다.
4.19와 5.16이 잇달아 일어난 그 격동의 1960년대 초반기에 우리 형제는 자동차도 못 다니던 험준한 고갯길을 꼬불꼬불 넘고 넘어 중학교를 어렵사리 다니면서 미래(未來)에 대한 드높은 꿈을 키웠고, 실로 많은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곤 했었다.
친형제(親兄弟)가 없이 외동아들이었던 나에겐 역시 외동아들이신 우리 재종형님이 바로 내 친형(親兄)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정말이지 형(兄)에게 많이 의지했고 노상 심복(心服)해 마지않았다.
이러구러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上京)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후반기에 형님은 나보다 먼저 군대에 입대(入隊)해 서울 경복궁(景福宮) 앞에 있던 ‘수도육군병원(首都陸軍病院)’에서 위병(衛兵)으로 복무하셨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에 청와대(靑瓦臺) 근처에서 그 유명한 ‘1.21 사태’가 터져 당시(當時) 육군(陸軍) 제대(除隊)를 눈앞에 두었던 우리 형님은 졸지에 복무 기간이 연장이 되어 3년 남짓 군대생활을 하셨는데, 그 여파(餘波)로 제대 말년(除隊末年)에 우리나라 육군(陸軍)에 새로 도입한 이른바 ‘유격훈련(遊擊訓練)’까지 아주 빡세게 받으셔야 했다.
바로 그 무렵에 형님이 위병소(衛兵所)에 근무하면서 찍은 사진을
내게 기념으로 한 장 주셨는데, 그 사진을 찍은 지 50년이 흘러간 올해 우연찮게 앨범(album)을 정리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형님의 늠름한 옛 모습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허허허,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컬어 감개무량(感慨無量)이라 하는 건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館)’으로 변해버린 옛 수도육군병원의 붉은 벽돌 건물 모습을 보노라니, 문자(文字) 그대로 만감(萬感)이 교차(交叉)했다.
형님이 저 사진을 찍은 지 십일 년 세월이 흐른 후(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주검이 저 위병소를 통과했을 것을 생각하니 저 장소는 분명 역사적 장소임에 틀림 없는데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分館) 건물 앞에는 그때 그 위병소 건물이 아예 자취도 없다.
어쨌거나 옛 사진을 보니, 형님은 1.21 사태 때문에 비록 복무기간은 길었지만 군대생활을 이 아우보다는 폼(form) 나게 하셨던 것 같다.
머리엔 무거운 철모(鐵帽) 대신 ‘위병’ 두 글자가 선명한 화이바(fiber)를 멋지게 눌러 쓰시고, 몸에 착 맞는 짙은 갈색(褐色)의 ‘사지(serge)’옷감으로 재단(裁斷)한 동정복(冬正服)을 입으셨으며, 그 위에다 위병의 위엄을 한껏 돋보이도록 흰색 장갑에 흰색 밴드(band)와 흰색 탄띠[彈帶]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히 걸친 채 반질반질하게 손질한 ‘워커(walker)’를 착용(着用)하고 정면을 응시하며 부동자세(不動姿勢)를 취하신 프로필(profile) 사진은 지금 다시 보아도 정말 근사해 보인다.
재종형님이 군대에서 제대하신 후 이 아우 역시 제3공화국 말기(末期)에 군대에 입대해 전방(前方)에서 군대생활을 했는데, 하필이면 군복무를 하는 도중에 미국의 우리나라 국방에 대한 ‘무상원조(無償援助)’가 대폭 줄어들어 의식주(衣食住) 생활면에서 문자 그대로 고(苦)된 군대생활을 해야 했다.
우선 군복 지급에 있어서 입대할 당시만 해도 흔히 말하는 국방색(國防色) 전투복 A급과 B급, 야전(野戰) 점퍼(jumper), 동정복(冬正服)인 짙은 갈색(褐色) ‘사지(serge)’ 군복, 하정복(夏正服)인 누른빛에 엷은 다색(茶色)이 섞인 이른바 ‘카키색(khaki色)’ 군복 등(等)이 있었는데, 점차 갈색 동정복과 카키색 하정복은 B급만 지급되었고, 국산(國産) 전투복의 경우는 한번 세탁하면 국방색(國防色) 색깔이 상당히 탈색(脫色)하여 A급 옷감이 금방 B급이나 C급으로 품질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모처럼만에 외출이나 외박(外泊)을 하려면 지급받은 옷이 너무 남루하게 보여 차마 착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상당수 군인들은 서울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 안에 있던 소위(所謂) ‘도깨비 시장’에서 미제(美製) 야전 점퍼(野戰 jumper)와 ‘스모르(small)’ 옷감으로 디자인한 전투복을 사서 A급 대용(代用)으로 입어야 했고, 지급받은 옷은 부대 내(部隊內)에서만 입었으며, B급 옷은 평상시(平常時) 근무할 때에, 그리고 C급 옷은 사역(使役)할 때 작업복(作業服)으로만 착용하였다.
너무 가난한 집 출신 병사들은 미제(美製) 야전 점퍼와 ‘스모르’ 전투복을 사 입고 외출을 하려 해도 돈이 없어서 자기와 비슷한 체격을 갖춘 전우(戰友)의 옷을 빌려 입고 외출을 해야 했으며, 그 옷을 사기 위해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고스란히 저축을 하였고 그래도 부족한 액수를 채우기 위해 개별적으로 지급되던 ‘건빵’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그걸 팔아서 옷을 사는 데 보태기도 했다.
이른바 ‘스모르 전투복’의 ‘스모르’는 원래 옷감 이름도 아니고, 상품명이나 그 어떤 제품명도 아니었다. 내가 군대 시절에 들은 바에 의하면, 애초에 미군들로부터 전투복을 무상으로 지원받을 때 덩치가 작은 우리나라 군인들에게는 사이즈가 잘 맞지 않아 미군들에게 ‘스몰 사이즈(Small Size)’를 달라고 자주 말해야 했는데, 그 ‘스몰 사이즈(Small Size)'를 줄여서 ‘스몰, 스몰’이라고 말하다 보니 ‘스몰’이란 영어 발음이 어느새 일본식 영어 발음 ‘스모르’로 굳어 버렸고, 아예 나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스모르’란 낱말이 미군 전투복의 고유(固有)한 이름인 양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
어쨌거나 1960년대 후반기와 1970년대 초반기에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정이나 물품 제조(製造) 수준은 너무 후진(後進)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한국 군인들은 장교 사병 따질 것 없이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이나 용산(龍山)의 미군부대 뒷골목에 몰려가서 ‘스모르’ 전투복들을 사 입었다.
대체로 백인과 흑인이 다수 구성원인 미군(美軍)들은 사이즈(Size)가 동양인들에 비해 큰 편이지만, 그들 중에는 신장(身長) 167cm의 허리우드(Hollywood)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처럼 동양적인 아담한 체구의 군인들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대량(大量)의 스모르 군복이 시장(市場)으로 흘러나와 군인들은 물론이요, 민간인 노동자나 대학생들까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사 입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건 그렇고, 국방비 절약을 위해 내가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에 처음에는 필수적으로 지급하던 머플러(muffler)도 사라졌고, 모자(帽子)와 상의(上衣) 왼쪽 가슴에 부착(附着)하는 계급장(階級章)이 소위 ‘깡통계급장’에서 헝겊으로 만든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사실 머플러를 목에 두를 때 뒤로 묶는 똑딱단추가 시원치 않게 부착(附着)되어 있어서 곤혹스럽게 여겼던 적이 많았는데, 이 머플러 착용 제도(着用制度)가 내가 군복무를 하던 도중(途中)에 없어져, 동기생(同期生)들과 함께 환호작약(歡呼雀躍)한 일이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난다.
국방비 절약을 위해 깡통으로 만든 계급장을 없애고 헝겊 계급장으로 바꿀 때 당시의 졸병(卒兵)들은 아주 좋아했다. 점호(點呼) 시간에 당직사관(當直士官)에게 지적받지 않으려고 매일매일 깡통계급장을 놋쇠 버클(buckle)과 함께 ‘병기 수입(兵器手入)’ 시간에 반짝반짝 윤(潤)이 나게 손질해야 했는데 더 이상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내가 입대(入隊)할 당시만 해도 계급장의 계급(階級) 표시가 오늘날과 약간 달랐는데, 병장(兵長)은 ‘∨’ 스타일(style)로 생긴 이른바 갈매기 한 개(個)였고, 하사(下士)는 갈매기 둘, 중사(中士)는 갈매기 셋, 상사(上士)는 갈매기 셋 위에 작대기 하나를 아치(arch) 형태(形態)로 얹은 꼴이었다. 이 계급장 표시는 내가 군복무를 하는 동안에 현재의 형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옛날 젊은 시절에 찍어 두었던 흑백 사진(黑白寫眞)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재종형님의 50여 년 전 군복무 시절 사진을 보노라니, 나 또한 현재의 내 나이를 잊고 50여 년 전 대학생 시절과 군복무 시절이 떠올라서 한참 동안 이런저런 감회에 젖어 들어야 했다.
1960년대 후반기 그 시절 우리나라는 지독하게도 가난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우리 재종형님이나 내게는 젊음과 건강한 꿈이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 때 그 시절은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한 시대였지만 어언간(於焉間)에 인생 7학년 나이를 먹게 된 우리 재종형님이나 나에겐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기도 하다.
우리 형님께옵서는 수도육군병원에서 군복무를 하시는 3년 동안 거의 매주마다 하루 정도는 외박을 나오셔서 내가 자취(自炊)를 하던 곳에서 주무시고 가셨는데,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던 나는 형님이 외박 나오시는 것이 너무 반갑고 좋았다. 보통 때는 연탄불에 밥을 짓는 것이 귀찮아 하루에 한 번씩 밥을 지어 세끼에 걸쳐 나누어 먹곤 했는데, 형님이 외박을 나오시는 날엔 내 딴에 너무 기분이 좋아 꼬박 세끼를 일일이 새로 밥을 지어 드렸다.
군대 밥에 물렸다며 형님께서는 내가 지은 흰 쌀밥을 맛있게 드시며 그때마다 칭찬을 하시곤 했다.
“야, 너는 어떻게 밥을 항상 ‘고 조시(그 상태)’로 짓냐. 대단하구나.”
밥이 질지도 않고 너무 고슬고슬하지도 않고 항상 일정한 상태로 알맞게 뜸들여진 상태인 것을 일본어(日本語) ‘고 조시’란 말로 칭찬을 하셨던 거다.
한 동네서 태어나 이웃에서 살며, 제사나 집안 행사로 함께 한방에서 뒹굴며 잠을 잔 적도 많았지만, 형님이 군대생활 3년을 하시는 동안에 매주마다 하룻밤씩 내 자취방(自炊房)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동기간(同氣間)의 정을 두텁게 쌓았다. 그 시절에 친형님이 없는 내게 재종형은 친형 그 이상이었고, 나의 우상(偶像)이기도 했다. 어느 친형제가 우리 두 형제만큼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자랐을까. 나는 그 시절에 형님이 내 자취방에서 나와 함께 이불을 펴고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내게 해 주셨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금도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형님의 군대생활과 인생경험담 및 미래에 대한 포부는 바로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었으며, 그 후 내가 군대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의 유년시절 어깨동무 친구이자 청소년 시절의 학교 선배이시기도 하고, 친형이 없는 내게 우리 문중(門中)에서 가장 가까운 근친(近親) 형님이시기도 한 우리 재종형님!
고향 마을 전체가 소양강댐 준공으로 인해 물속에 잠겨 버렸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집안 친척분들도 모두 전국으로 흩어져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바람에 재종형님은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를 가셨고, 나는 서울에 정착해 어느새 반세기를 훌쩍 넘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형님과는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고향 선산(先山) 벌초(伐草) 행사 때만 만나거나 집안 경조사(慶弔事) 때 어렵사리 뵙곤 했는데, 어느 해에 형님께옵서 병환이 나신 후로는 뵙기가 더 힘들어졌고, 십여 년 전에 나마저 고황지질(膏肓之疾)에 걸려 자동차도 못 타고 다닐 지경이 되는 바람에 작금(昨今)에 우리 형제는 남북한의 이산가족(離散家族)들처럼 멀리 떨어져 서로 만나지도 못한 채 가끔씩 안부 전화만 나누는 형편에 놓여 있다.
젊은 시절엔 우리 고향 강원도 양구(楊口)-인제(麟蹄) 고을에서 헌헌장부(軒軒丈夫)로 유명했던 나의 형님!
지금은 밤낮으로 침상(寢床)에 누워 계시거나 휠체어에 의지해 겨우 바깥 출입을 하시는 우리 형님이 보고 싶다.
오늘 따라 형님 젊은 시절 사진을 우연찮게 보게 되니 더더욱 형님이 그립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차를 타고 철원 땅으로 달려가 형님을 뵙고 싶지만, 나도 건강 사정 때문에 20~30분 소요되는 거리마저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없는 형편이라서 그럴 수도 없고…….
오호(嗚呼)! 이 아우의 애달픈 마음을 우리 형님께선 짐작이나 하시려나.
2017 년 8 월 22 일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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