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물시(詠物詩)

목화꽃 앞에서

noddle0610 2013. 9. 18. 15:00

 

 

 

 

 

 

 

 

 

 

 

 

 

 

 

 

 

 

<창작시조>

 

                                      목화꽃 앞에서

 

                                                       1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 씨 붓두껍에 씨앗 숨겨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삼천리(三千里)에 흩뿌리니.

목화(木花)야, 너 없었으면 어찌 풍상(風霜) 견뎠으랴.

 

 

                                                      2

 

육이오(六二五) 겪고 나서 고향 산천 찾아가니

정든 땅 폐허(廢墟) 되어 절망(絶望)하고 있었는데

너희만 희망(希望)을 안고 텃밭 가득 꽃 피웠다.

 

 

                                                     3

 

육백 년(六百年) 입고 덮던 무명옷 무명이불

산업화(産業化) 물결 속에 아스라이 사라지니

오오오! 목화꽃이여. 너 볼수록 애닯다.

 

 

                                        2013 년 9 월 11 일

 

                                              박   노   들

 

 

 

덧붙이는 글

 

우리 동네를 산책 중에 어렵사리 목화밭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거의 정신없이 카메라(camera)의 셔터(shutter)를 눌러댔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저희 집 앞에 어머니께옵서 손수 가꾸던 목화밭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제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강원도(江原道)의 고향 집 화단(花壇)에는 해마다 채송화, 맨드라미, 백일홍, 장다리, 나리꽃, 분꽃, 봉숭아, 코스모스, 나팔꽃, 해바라기 따위의 꽃들이 연달아 울긋불긋 피었습니다만, 뭐니 뭐니 해도 제가 아침에 눈만 떴다 하면 가장 많이 마주쳤던 꽃이 바로 우리 집 텃밭에 핀 목화꽃들이었기에, 이번에 저는 마치 타임머신(timemachine)이라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저 혼잣소리로 감탄사를 잇달아 내뱉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화 줄기마다 꽃송이들이 제법 함초롬히 피어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솜다래’들을 보니, 어렸을 적에 목화밭 언저리를 지나가다가 여물기 직전의‘솜다래’를 발견하고 어른들 몰래 한 움큼 따서 군것질 삼아 입에 넣은 채 입안의 갈증과 시장기를 달래면서 시원하고도 달콤한 맛을 즐거워하던 순간들이 왈칵 떠올라, 하마터면 남우세스럽게 눈물을 흘릴 뻔했습니다.

 

저의 머릿속에는‘하사(下士)와 병장(兵長)’이란 남성 듀엣(duet) 가수의 노래‘목화밭’멜로디(melody)도 떠오르고, 1970년대의 인기가수였던 남진(南珍) 형(兄)의 히트송(hit song)‘목화 아가씨’도 떠오르면서 뜨거운 차(茶)를 석 잔(盞) 정도나 마실 수 있는 제법 긴 시간을 감상(感傷)에 젖어, 그곳 목화밭에 머물렀습니다.

 

6·25 사변(事變)의 여파(餘波)로 삶이 무척이나 고단했던 1950년대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 해마다 가을을 맞이하게 되면 어머니께서는 나이 어린 저와 함께 우리 집 텃밭에서 목화를 거두어들여‘씨아’로 솜에서 목화씨를 빼내는 이른바‘거해[去核]’작업을 하신 다음에 한겨울 내내 ‘물레’로 실을 자아내셨으며,‘실 잣기’가 다 끝나면‘베틀’에 오르시어 오른손으로‘씨실’꾸리가 들어 있는 ‘북’을‘날실’사이로 밀어 넣으셔서 왼손으로 받으시고 왼손으로 그것을 챙기자마자 오른손으로‘바디’를 당겨 쳐서 밤새도록 한 올 한 올 무명옷감을 짜셨습니다.

 

저와 우리 식구들은 어머니께옵서 직접 짜신 무명옷감으로 지은 한복(韓服)을 입고 무명이불을 덮으면서 1950년대 전후(戰後)를 보냈습니다. 겉보기엔 초라해 보이는 입성이었지만, 솜을 두툼하게 옷 속에 넣었기 때문에 한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솜을 넉넉히 넣은 바지저고리만 입고 육 년(六年) 내내 국민학교를 다닌 저는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야 겨우 골덴(corded velveteen) 옷과 교복(校服)이란 것을 난생처음으로 입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서민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염색한 옷감이나 이른바‘구제품(救濟品)옷’이란 것들을 입고 살았다고 합니다만, 저희 집 식구들은 어머니께옵서 베틀에 올라가셔서 직접 짜신 무명옷, 삼베옷, 명주(明紬)옷을 입으며 춘하추동 사계절을 지냈습니다. 여름엔 삼베옷, 봄가을과 겨울엔 무명옷을 입었고, 당시 우리 집에서 양잠(養蠶)도 하였기 때문에 명절 때나 먼 곳에 나들이를 할 때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어머니께서 직접 명주옷을 짜서 한복을 지어 식구들에게 입히셨습니다. 아, 요즘에도 생전의 저희 어머니께옵서 곱게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으시고 흰색 치마저고리 차림새로 밤마다 베틀에 오르시어 옷감을 짜시고 매일매일 식구들의 한복을 지으시던 모습이 저의 눈에 삼삼히 떠오르곤 한답니다.

 

지금은 저의 어머니께옵서도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산업화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목화밭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쯤에서 인생무상(人生無常), 세월여류(歲月如流), 상전벽해(桑田碧海) 따위의 사자성어(四字成語)들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솜다래 : 아직 피지 않은 목화의 열매. 럭비공처럼 타원형(楕圓形) 모양으로 생긴 열매로서 다래나무 열매와 비슷하게 보인다. 이것이 여물게 되면 껍질 속에 ‘씨’를 밴 흰색 솜이 소담하게 뭉킨 덩어리가 형성 된다.

 

거해[去核] : ‘씨아’에 얹어 ‘씨’를 빼낸 솜. 한자어(漢字語) ‘거핵(去核)’에서 온 말이지만, 예전에 서울의 주택가를 행상(行商)들이 지고 다니며 “거허……거해……사시오”라고 외치며 팔러 다녔기 때문에 ‘거핵>거해’라 하게 되었다. 겨울에 솜옷을 몹시 껴입은 사람을 보고는 ‘거해부대[去核負袋] 같다’고들 하였다. 이훈종, 민족생활어 사전, 한길사, 2008.11.20, P.3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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