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민비(閔妃)는 비칭(卑稱)━ 명성황후 민씨(閔氏)가 맞다

noddle0610 2006. 2. 6. 16:24

 

 

민비(閔妃)는 비칭(卑稱)━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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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장의 거짓말? 혹은 무지?라는 제목의 연합뉴스기사[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전재(轉載), 2005-04-27 14:56:51]에 대한 반론(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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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   노   들  

 

 


독립기념관에서 광복 60년을 맞아 발표할 일제 침략과 통치용어 실태라는 논문 내용도 문제(問題)려니와 이를 비판하는 연합뉴스의 기사(記事) 내용에도 일부 오류(誤謬) 내지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반론(反論)을 제기한다.》



  예전에 동양에서는 중국(中國)의 임금에 한해 황제(皇帝) 또는 천자(天子)로 불렀고, 중국 주변 제국(諸國)의 임금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책상 스스로를 왕(王)이라 했다.


  물론 중국에 도전(挑戰)할 때는 변방의 왕들도 황제라 자칭(自稱)한 적도 있었다. 고려 인종조(仁宗朝)의 묘청(妙淸)스님이 서경(西京)에서 반기(反旗)를 들었을 때, 금(金)나라 공략을 공약(公約)한 후 칭제(稱帝) 건원(建元)하여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스스로 칭제(稱帝)했던 일이 그 예(例)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시적이었고, 대체적으로는 중국에 침략의 빌미를 안 주기 위한 소위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상 우리나라를 위시한 중국 변방의 여러 나라 왕들은 고작 중국의 제후(諸侯) 반열(班列)이라 할 수 있는 왕호(王號)로 만족했던 것이다. 단(但), 중국과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몽고(蒙古) 즉 원(元)나라의 동정(東征)을 제외하고는 직접적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섬나라 왜국(倭國)이 자기들의 임금을 감히 천황(天皇)이라 칭(稱)한 사례는 예외(例外)로 있지만 말이다.


  대국(大國)이라 자처하는 중국의 임금도 하늘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서 하느님의 아들천자(天子)라 하였는데, 섬나라 소국(小國)인 왜왕(倭王)은 스스로를 감히 천황(天皇)이라 자칭(自稱)하였고, 지금도 천황이라 참칭(僭稱)하고 있으니, 정녕(丁寧)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역대(歷代) 왜왕(倭王)들은 하늘에 대한 불경(不敬) 즉신성 모독죄(神聖冒瀆罪)를 범하여 사후(死後)에 모두 지옥(地獄)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그렇고, 우리 나라가 대내외적(對內外的)으로 칭제(稱帝)를 선포하고 여러 나라의 승인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고종(高宗)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처음일 것이다.


  고려(高麗)가 몽고(蒙古) 즉 원(元)나라와 30년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맺기 이전까지는 칭제(稱帝)는 안 했지만, 역대 왕이 승하(昇遐)하면 중국 황제처럼 ‘∼조(祖)‘∼종(宗)을 시호(諡號)로 바쳤고, 우리 임금은 일인칭(一人稱)으로 중국 황제처럼 짐(朕)이란 말을 사용했으며, 신하들 또한 왕에 대한 이인칭(二人稱)으로 중국 황제와 동격(同格)인 폐하(陛下)란 말을 썼고, 왕의 모후(母后)에 대한 존호(尊號)로 태후(太后)란 말을 사용했다. 고려 목종(穆宗) 임금 때 그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역신(逆臣) 김치양(金致陽)과 통정(通情)하며 한때나마 발호(跋扈)했던 사실(史實)을 보더라도, 그녀에 대한 존호(尊號)가 중국 황제의 모후(母后)에 대한 존호(尊號)와 같았음을 알 수 있는 바, 오히려 왕에 대한 존호보다 그 격(格)이 높아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이는 왕(王)의 경우 중국에 대한 대외 공식 접촉 시 발생할지도 모를 외교적 현안(懸案)을 염려해 중국 제후(諸侯)와 같은 존호(尊號)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과 달리 남녀유별(男女有別)이 분명했던 동양문화권에서는 퍼스트 레이디가 중국사신을 만날 필요가 없었으므로 구중궁궐(九重宮闕) 중궁(中宮)에만 들어앉아 있었던 왕후(王后)와 태후(太后)의 경우는 중국 황후(皇后)에 버금가는 예우(禮遇)를 내밀(內密)하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던 때문이다.


  또한 고려(高麗) 시대에는 왕후(王后) 밑에 비(妃)가 있었으니, 예컨대 문종(文宗)의 경우 권신(權臣) 이자연(李子淵)의 큰딸은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요, 이자연의 차녀(次女)와 차차녀(次次女)는 각각 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라 하였고, 공민왕(恭愍王)의 왕후는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요, 후궁(後宮)인 이제현(李齊賢)의 딸은 혜비(惠妃)요, 환관(宦官) 최만생(崔萬生)의 농간(弄奸)으로 자제위(子弟衛)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덕풍군(德豊君)의 딸은 익비(益妃)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 비(妃)는 왕후(王后)가 아닌 후궁(後宮)의 맨 첫째 서열에 해당하는 호칭이므로, 체면과 명분(名分)을 중요시했던 조선왕조에서 전조(前朝) 고려(高麗) 왕실에서 후궁들에게나 사용하던 명칭을 존엄(尊嚴)한 왕(王)의 정궁(正宮)에게 사용했을 리가 만무하다.


  단(但),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부왕(父王)이 승하(昇遐)하고 모후(母后)가 홀로 생존해 있을 경우, 명(明)나라나 청(淸)나라의 눈치가 보였는지 고려(高麗) 왕조와는 달리 모후(母后)에게 감히 태후(太后)란 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대비(大妃)라 했으나, 이는 전왕조(前王朝)의 후궁에게 쓰던 ~비(妃)와는 뉴앙스[語感]를 달리한 큰 대(大)자(字)를 붙인 존호(尊號)로서의 대비(大妃)였으며, 대비(大妃)가 승하하면 고인(故人)에게 시호(諡號)로서 ~○○왕비(王妃)가 아닌 ~○○왕후(王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정책상 임금이 바뀔 때마다 중국 천자(天子)로부터 왕(王)의 지위를 승인 받고 분봉(分封)을 받는 형식이었던 조선(朝鮮)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왕후(王后)는 중국 제후왕(諸侯王)의 왕비(王妃)들과 달리 왕후(王后)라는 명칭을 대내적(對內的)으로 공공연히 사용하였으며, 사후(死後)의 시호(諡號) 또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신덕왕후(神德王后)강씨(康氏)-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등(等)의 경우처럼 왕비(王妃)가 아닌 왕후(王后)였다. 왕후가 혼인하여 입궁(入宮)하면 중국 사신과 접촉이 불가능했던 중궁(中宮) 즉 중전(中殿)에만 거처했기 때문에, 살아서도 왕후(王后)요, 죽어서도 왕후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황제의 부인에 한(限)해 황후(皇后)요, 천하제후(天下諸侯) 왕(王)의 부인은 왕비(王妃) 또는 왕부인(王夫人)이었다. 황태자의 부인 또한 태자후(太子后)가 아닌 태자비(太子妃) 즉 황태자비(皇太子妃)였다. 우리 나라의 차기(次期) 임금인 동궁(東宮)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이후(以後)부터는 태자(太子)가 아닌 세자(世子)였고, 세자(世子)의 부인은 태자비(太子妃)가 아닌 세자빈(世子嬪)이었다.


  조선시대 역대 임금은 사후(死後)에나 비로소 중국의 제후(諸侯)들은 꿈꿀 수조차 없는 조(祖)종(宗)을 시호(諡號)로 받았고, 살아 있을 때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이전(以前)의 원종(元宗) 때까지 일인칭(一人稱)으로 사용하던 황제(皇帝)의 용어(用語) 짐(朕) 대신 스스로를과인(寡人)으로 부르며 소국(小國)의 임금으로서 평생 동안 중국(中國)을 사대(事大)하며 살아야 했지만, 적어도 일제(日帝) 즉 왜놈들이 조선(朝鮮) 땅을 점령하기 전(前)까지 우리 나라에는 왕후(王后)는 있었어도 왕비(王妃)는 없었다. 조선(朝鮮)은 있어도 이조(李朝)라는 말은 없었듯이 말이다.


  때로는 경우에 따라 살아 있는 현재(現在)의 임금님을상감(上監)마마 이외(以外)에 금상(今上)주상(主上) 또는 가장 큰 궁궐 건물에서 집무(執務)한다 해서 대전(大殿)마마라 불렀듯이,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왕후(王后)는 중궁(中宮)에 거처한다 해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마마로 불리기도 했다. 왕(王)이 하늘이라면 왕후(王后)는 땅에 비유[坤 : 땅 곤]할 수 있으므로, 왕후가 거처하는 건물을 일명(一名) 곤전(坤殿)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에 따라 왕후를 곤전(坤殿)마마라 부르는 경우도 때로 있었다.


  중국(中國)의 경우는 황후(皇后)가 거처하는 건물을 천추전(千秋殿)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황후(皇后)를 별칭(別稱)으로 천추전(千秋殿) 폐하라 부르고, 그녀의 생일(生日)을 천추절(千秋節)이라 하여, 우리 나라에서 일년(一年)에 한 차례씩 황후 탄신일(誕辰日)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천추사(千秋使)였다.


  각설(却說)하고~~.


  오랜 세월 중국(中國)의 조공국(朝貢國)이었다가 이 땅에 대한 열강(列强)의 각축(角逐)과정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세계만방에 완전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황제(皇帝)가 된 고종(高宗)은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왜놈들에게 시해(弑害)된 왕후(王后) 민씨(閔氏)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지어 주었다.


  그런데, 강제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단행한 왜놈들은 고종황제와 순종(純宗)황제 부자(父子)를 격하(格下)시켜 고종(高宗)은 이태왕(李太王)’ ‘이태왕 전하(殿下), 순종(純宗)은이왕(李王) 또는이왕전하(李王殿下)로 부르게 하여 우리의 대군주(大君主) 폐하(陛下)를 일본 천황(天皇)의 일개 신하(臣下)로 삼았으며, 우리 나라 순종황제 황후(皇后)였던 윤씨(尹氏)에게는 이왕비(李王妃) 즉 역대 우리 나라 왕후(王后) 어느 분에게도 사용 안한 왕비(王妃)란 말을 사용해 불렀고, 일명(一名) 윤비(尹妃)라 호칭(呼稱)했으며, 고종황제의 유일한 황후였던 명성황후에게는 태후(太后)도 아니고, 왕후(王后)도 아닌 민비(閔妃)라는 말을 사용하여, 명성황후를 두 번 죽이는 횡포를 자행했다. 당시 고종의 후궁(後宮)이었던 영친왕(英親王) 생모(生母)를 엄비(嚴妃)라고 불렀는데, 그렇다면 정식 황후(皇后)인 명성황후나 순종(純宗)의 황후였던 윤씨(尹氏)가 일개 후궁에 지나지 않았던 엄비(嚴妃)와 동격(同格)이었단 말인가?…… 천만(千萬)에 말씀이시다.


  왜놈들로서야 덴노헤이까 즉 자칭(自稱) 천황 폐하(天皇陛下)의 황후(皇后)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후(后)라는 호칭을 이왕부(李王府)의 안주인들에게 허용할 수가 없었으리라.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왜정(倭政) 35년간[滿 36년이 아님] 일제(日帝)에 의해 사용하기 시작한 민비(閔妃)-윤비(尹妃)란 호칭이 역사에 무지(無知)한 우리나라 일반 백성들에게조차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하게 사용되어, 지금도 우리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조(李朝)라 지칭(指稱)하고, 고종황제가 손수 내린 명성황후란 시호(諡號) 대신 일제(日帝)가 붙인 민비(閔妃)란 명칭을 널리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숙종(肅宗)의 왕후(王后)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에게조차 민비(閔妃)라 지칭하면서 그녀와 장희빈(張禧嬪)과의 악연(惡緣)을 다룬 사극(史劇) 내용에 모두 심취(心醉)해 버린다. 이른바 식민지(植民地) 사관(史觀) 교육(敎育)의 독소적(毒素的) 영향 탓이리라.


  분명히 일제(日帝), 아니 왜놈들은 광무(光武)황제 고종(高宗)의 황후 민씨를 호칭상 민비(閔妃)로 격하하였으므로, 민비(閔妃)란 한자어(漢字語) 자체(自體)는 본디 비칭(卑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명칭의 어원(語源)을 따져볼 때 분명히 명성황후를 욕보이기 위한 비칭(卑稱)임에 틀림없는 바,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민족적 자존(自尊)을 위해서라도 민비(閔妃)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분명히 명성황후 사후(死後)에 고종이 내린 시호(諡號)이긴 하나, 우리가 세종(世宗) 임금이 원래 충녕대군(忠寧大君)이었지만 충녕왕(忠寧王)이라 하지 않고 사후 시호(諡號)인 세종(世宗)으로 부르고 있고, 고종(高宗)의 아명(兒名)이명복(明福), 명부(明夫) 또는 개똥이었다 하여 그 분을 명복왕이나 개똥이왕이라 부르지 않고 고종(高宗)황제라 존대(尊大)하듯이, 앞으로 우리는 명성황후 민씨의 생존 당시 보여 준 정치적 행위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민족적 자존심(自尊心)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을 가리킬 때, 명성황후(明成皇后)라고 불러드려야 마땅할 것이다.


  명성황후가 살아서는 왕후(王后)였는데 죽은 후 황후(皇后)로 승격(昇格)되었으니 생존 당시의 원래 호칭이었던 왕후(王后)로 불러야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나,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사후(死後)에 얻은 시호(諡號)인 충무공(忠武公)으로 숭앙(崇仰)받고 있고, 고(故) 강재구(姜在求) 대위(大尉)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승천(昇天)한 후 소령(少領)으로 추서(追敍)되어 우리 모두 지금 그를 강재구 소령이라 부르듯이, 민황후(閔皇后)는 분명 명성왕후가 아닌 명성황후(明成皇后)이시다. 그리고 민비(閔妃)로 호칭한다는 것은 고인(故人)에 대한 욕(辱)이요, 우리의 민족적 자존(自尊)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조선시대 왕후(王后)를 가리켜 시호(諡號) 아래에 성(姓)을 뽑아 ∼씨(氏)라고 부르는 일은 우리가 오늘날 조상님 제사를 지낼때 쓰는 지방(紙榜)에 현비유인(顯妣孺人) 여흥(驪興) 민씨(閔氏) 현비유인 전주(全州) 이씨(李氏)식(式)으로 쓰는 것이 예(禮)에 어긋나지 않듯이 결코 비칭(卑稱)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므로,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역사적 관습상 시비(是非)를 걸어서는 안 된다.


  1966년경이었던가 싶은데, 경술국치(庚戌國恥) 당시 황제의 옥새(玉璽)를 당신의 치마 속에 숨긴 채 합방(合邦) 문서의 날인(捺印)을 피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건져 보려 애썼던 대한제국(大韓帝國)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가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에서 승하하여, 남편 순종황제가 잠든 유릉(裕陵)에 나란히 묻힐 때 그 입관(入棺)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한 적이 있는데, 황후의 관(棺) 위에 씌워져 있는 비단 위에 분명히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라 쓴 것을 필자(筆者)가 보았으며, 명정(銘旌)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고, 장례식을 중계방송(中繼放送)하던 TBC-TV의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와 극작가(劇作家) 이서구(李瑞求) 선생이 울먹이며 그 내용을 해설해 주던 기억이 지금도 필자(筆者)에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바,명성황후 민씨 라는 표현은 결코후레자식들이 쓰는 말이 아님이 분명(分明)하다.


  필자는 무명(無名)의 백두(白頭) 신세이긴 하나, 과거 역사에 대해 어떤 정치적 해석이나 자의적(恣意的)인 해석을 하여 역사를 함부로 왜곡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다.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함부로 나서서 아는 척 하지 말고, 사계(斯界)의 권위자들에게 충분히 자문(諮問)한 후 논문(論文)을 발표하든지 비판(批判)을 가(加)하라!



2005 년 4 월 2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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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합뉴스 기사(記事) 독립기념관장의 거짓말? 혹은 무지?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의 톱기사로 전재(轉載)된 것을 읽고, 필자가 데일리안에  반론(反論) 형식으로 투고했던 (2005-04-28 07:44:12)임. 



졸고(拙稿), 코리아닷컴, e-Room noddle글광', 호칭어 고찰, 2005-09-20 오전 9:50:20. 게재(揭載) http://eroom.korea.com/nod_157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