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존왕양이(尊王攘夷)

noddle0610 2006. 3. 21. 17:54

 

 

                                         尊王攘夷

 

/   박      노      들    

                                       


  존왕양이(尊王攘夷) :  왕실(王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


     : 높일

     : 임금

     : 물리칠

     : 오랑캐


  중국 고대에는 하(夏)나라부터 시작해 은(殷)나라,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임금을 가리켜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 부르긴 했지만, 공식적인 호칭(呼稱)은 왕(王 : 임금 왕)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끝나고 나서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후 비로소 스스로를 높여 황제(皇帝)라 했던 것이다.


  진시황(秦始皇) 이후 중국은 황제(皇帝)를 나라의 정상(頂上)으로 받들고, 그 밑에 제후(諸侯)들을 황제가 왕(王)으로 봉(封)하는 형식의 전통이 굳어져, 중국 역대(歷代) 왕조(王朝)에는 매우 많은 왕(王)들이 명멸(明滅)하였다.


  그러나 주(周)나라 시대(時代)만 해도 중국에서 왕(王)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무왕(武王)의 동생이자 성왕(成王)의 삼촌이었던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을 보좌하며, 개국(開國)에 공(功)이 크거나 실력자인 신하들을 국가에 대한 공헌에 따라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으로 작위(爵位)를 구분하여, 대략(大略) 공(公)은 사방(四方) 100리(里)의 땅을 주었고, 후백(侯伯)은 사방 70여리(餘里), 자남(子男)은 사방 50리 안팎의 땅을 주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들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을 합해 제후(諸侯), 또는 봉건(封建) 제후(諸侯)라 일컫게 하였다.


  제후(諸侯)는 자기가 다스리는 땅에서는 왕(王)과 다름이 없을 만큼 절대적인 봉건 영주(封建領主)였으며, 해마다 왕실(王室)의 존엄성을 높이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왕(王)에게 일정한 조공(朝貢)을 바치고, 나라에 외적(外賊) 특히 중국의 사방(四方)에서 국가 안보(安保)를 위협하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봉화(烽火) 불을 피워 제후(諸侯)들을 모이게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왕(王) 옆으로 달려가 왕과 함께 오랑캐나 반란군을 물리쳐 왕의 존엄성을 높이고 왕실과 백성들을 지켰다. 그 오랑캐들을 중국에서는 남만(南蠻) · 북적(北狄) · 동이(東夷) · 서융(西戎)이라 불렀는데, 특히 우리 나라를 가리켜 중국인들은 동이족(東夷族)이라 했다.


  고대(古代) 주(周)나라 유왕(幽王)은 사랑하는 총비(寵妃) 포사(褒姒)에게 빠져, 그녀를 웃기고자 종종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들을 모이게 했는데, 처음에는 제후들이 정말 오랑캐가 쳐들어 온 줄로만 알고 존왕(尊王 : 왕 또는 왕실을 높이거나 왕의 존엄성을 오랑캐들에게 알림)을 위해 기꺼이 군대를 끌고 달려갔으나, 그것이 번번이 거짓인 줄 알게 되자 정작 오랑캐 견융(犬戎)이 쳐들어왔을 때는 봉화(烽火)를 보고도 왕의 장난인 줄로 알고 왕을 구하러 가지 않아 결국 왕은 피살(被殺)되고, 포사(褒姒)는 오랑캐에게 잡혔다고 한다.


  유왕(幽王) 이후 주(周)나라는 왕실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국세가 약해지고, 제후들의 힘이 강대해져 갔는데,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여러 제후들 중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실력자들이 왕(王)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이웃 제후의 땅을 뺏어 영토를 넓히고, 존왕(尊王)을 한다는 핑계로 툭하면 제후들을 왕이 아닌 강력한 힘을 가진 제후가 불러모아 자신의 힘을 과시한 후 나라 권력의 패권(覇權)을 잡았으며, 이런 자(者)를 패자(覇者)라 했는데, 춘추시대에는 이른바 오패(五覇), 즉 다섯 명의 제후들이 번갈아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고 천자(天子)인 왕(王)은 허수아비에 불과해졌다. 


  그러다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면서 패자(覇者)들은 천자(天子)와 똑같이 스스로를 왕(王)이라 자칭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제후들 대부분이 왕(王)을 자칭해 이 시대를 전국시대(戰國時代) 또는 열국시대(列國時代)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진(秦)나라가 가장 국력이 강해 열국(列國)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왕중왕(王中王)인 황제(皇帝)라 높여 부르게 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진시황(秦始皇)이다.


  이렇듯이 존왕양이(尊王攘夷)란 주(周)나라 때까지 제후(諸侯)들이 왕(王) 즉 천자(天子)를 높이 받들어 오랑캐를 방비(防備)하거나 물리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이 말과 뜻이 우리 나라와 근대(近代)의 일본(日本)에까지 전해져,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고종(高宗) 때에 왕의 생부(生父)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쇄국정치를 하면서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 하는 등(等)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높이 부르짖다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프랑스 및 미국 군대와 충돌을 하기까지 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당시까지만 해도 막부(幕府)에서 쇼군(將軍)이 일본을 사실상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天皇)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는데, 미국(美國)의 대포(大砲) 앞에 굴복하여 강제로 개항(開港)을 하게 되자, 쇼군(장군)의 무력함을 본 하급(下級) 사무라이(武士) 계층이 천황(天皇)을 받들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내세우며 쿠데타(coup d'etat)를 일으켜, 토쿠가와(德川) 쇼군(將軍)의 막부(幕府) 통치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天皇) 중심의 국가체제를 세움과 동시에 애초 내걸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두 가지 명분 중  양이(攘夷) 정책은 슬그머니 포기한 채 오히려 서구화(西歐化) 내지 근대화(近代化)를 앞당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이를 기반으로 마침내 아세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國家)가 되었다.


  종전까지만 해도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일본 천황은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비록 미수로 끝나긴 했지만 1936년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일으켰던 쿠데타 ‘2.26사건을 계기로 군부(軍府)의 세력이 강화되어, 이들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神)으로 신격화하였고,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의 광신도였던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들은 아세아에서 서양세력을 물리치고 황도국가(皇道國家)를 세우겠다는 허황한 꿈에 사로잡혀 마침내 미국 진주만(眞珠灣) 습격을 감행하는 등 전쟁을 도발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1945년에 원자폭탄 피폭(被爆)을 당하고 나서야 일본은 천황이 스스로 신(神)이 아닌 인간(人間)임을 선언하게 되었고,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는 이른바 평화헌법을 선포하였지만, 최근에는 다시 자위대(自衛隊)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헌법 개정 움직임을 보이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청(淸)나라 말기 서태후(西太后)가 섭정(攝政) 정치를 하고 있을 때 점증(漸增)하는 서양(西洋) 열강(列强)의 세력에 의해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비밀 결사(秘密結社) 단체인 의화단(義和團)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旗幟)를 내걸고 19006월 북청사변(北淸事變)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결국 청(淸)나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근대(近代)에 이르러, 한중일(韓中日) 삼국(三國)에서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運動)은 일본(日本)에서만 변칙적(變則的)으로 성공한 셈이고, 우리 나라와 중국은 오히려 왕조(王朝)의 멸망을 앞당기게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은 허울 좋은 명분(名分)이었을 뿐, 역사적으로 이 말이 힘을 발휘할 때마다 애꿎은 백성들만 숱하게 죽고 피해를 입어야 했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은 대체적(大體的)으로 이 사자 성어(四字成語)를 그다지 좋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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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um Portal site  신지식’ Home학문, 전공 > 인문학 > 철학 항목에 필자가 한림학사 라는 ID로 탑재(2005-08-19 0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