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훈(沈熏) 선생의 ‘그 날이 오면’ ━
청년 시절(靑年時節)부터 로맨틱(romantic)한 남자(男子)라고 자부(自負)해 온 나는 일면(一面) 센티멘털리스트(sentimentalist)이기도 하다.
해마다 광복절(光復節)만 되면 상상(想像)의 날개를 펼쳐,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일제 치하(日帝治下)에서 우리 선열(先烈)들이 독립 운동을 벌이던 시절로 되돌아가, 그분들의 열망(熱望)과 투쟁(鬪爭)과 고귀한 희생(犧牲)을 생각하며 감상(感傷)에 젖곤 한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8월이 찾아오면, 심훈(沈熏 : 1901~1936) 선생의 유작시(遺作詩) ‘그 날이 오면’을 으레 떠올리게 된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敲]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1930.3.1 ─
☞ 출전(出典) : 유고(遺稿) 시가(詩歌) 및 수필집(隨筆集) ‘그 날이 오면’, 1949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을 향한 강렬하고도 간절한 염원(念願)과 애국적 열정(熱情)이 뜨겁게 느껴지는 이 시(詩)를 대할 때마다 나는 감정(感情)의 절제(節制)를 못하고 눈물마저 흘리기 일쑤이다.
이 ‘그날이 오면’이란 시는 기미년(己未年) 3.1운동 당시(當時)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 재학 중(在學中)에 십대(十代) 소년의 몸으로서 분연(奮然)히 만세운동(萬歲運動)에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어른들도 견디기 힘들어했던 감옥살이를 해낸 심훈(沈熏) 선생이었기에 천의무봉(天衣無縫)하게 쓸 수 있었던 절창시(絶唱詩)다.
어떤 이들은 이 시를 가리켜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시적 균형성을 잃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며 “형상화(形象化)에 실패”한 작품이라고 하였지만, 이 무슨 철딱서니 없는 망언(妄言)인가.
나라를 빼앗긴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광복의 그 날이 오면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신의 두개골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보신각 종(普信閣鐘)을 머리로 들이받겠다고 하였으며, 망국의 한(恨)이 오죽이나 가슴 속 깊이 맺혔으면 조국이 해방되는 날에 예리한 칼로 자신의 살가죽이라도 벗겨 북을 만들어 그것을 들쳐 메고 행렬(行列)의 앞장을 서겠노라 하였겠는가.
식민지 시대(植民地時代)에 살아 보지 않은 이들은 망국민(亡國民)의 절망과 한(恨)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그들의 간절한 염원과 신념과 의지가 어느 정도나 강렬한 것인지 잘 모르리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바로 36년 동안 맥수지탄(麥秀之嘆)을 뼈아프게 경험한 세대(世代)의 아들딸이자 직계(直系) 손자손녀 세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如前)히 심훈 선생의 시에 대하여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시적 균형성을 잃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철따구니 없는 악플(^^*)을 늘어놓을 것인가.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을 향한 강렬하고도 간절한 염원을 진솔하게 노래하여 삼천만 겨레의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무슨 시적 균형 유지와 형상화 성공 여부(成功與否) 운운(云云)하고들 있는가.
당시(當時)에 심훈 선생이 결코 한가로운 상황에서 시를 쓴 것이 아님을 유념(留念)하라.
참여적(參與的) 성격이 강한 대부분의 시들은 예술적 형상화보다는 화자(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강렬한 주의나 주장을 표출(表出)하는 데 주안점(主眼點)을 두기 십상(十常)인 바, 심훈 선생의 시 또한 예외(例外)는 아니다.
그러나 심훈 선생이 3.1운동에 참가한 죄(罪)로 어린 학생의 몸이었지만 일제(日帝)에 의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당신의 어머니께 드린 편지 내용을 보면, 그가 글을 쓸 때 결코 붓장난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어머니!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 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저는 이 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지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쇠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까지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 삼아 몇 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發願)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기가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며칠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임종을 같이 하였습니다. 돌아간 사람은 먼 시골의 무슨 교(敎)를 믿는 노인이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 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옮겨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무쳐 그 날에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밤이 깊어 악박골 약물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어졌을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쳐 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5촉밖에 안 되는 전등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하였습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본 저는 무릎을 베개 삼아 그의 머리를 괴었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여 제 손을 찾아 쥐더이다. 금세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 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어머니!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벌떡 솟치더니 ‘여러분!’ 하고 큰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찢어질 듯이 긴장된 얼굴의 힘줄과 표정, 그 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을 할 때의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그의 연설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올랐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아서 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흐려지는 눈은 꼭 무엇을 애원하는 듯합니다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 줄 그 무엇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그 날에 여럿이 떼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소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어머니!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가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끊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서 새벽하늘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며칠 동안 몰래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 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1919. 8. 29
☞ 출전(出典) : 중2-2 국어 1-(1)
옥중 서신(獄中書信)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거니와, 십대(十代) 청소년의 나이에 그처럼 의젓하고, 진지하고, 자상하고, 따뜻하고, 의지가 강하고, 배포(排布 : 排鋪)가 컸음을 역력(歷歷)히 알 수 있으니, 새삼 심훈 선생의 대인(大人)다운 풍모(風貌) 앞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대의(大義)를 중시(重視)했던 심훈 선생이 시작(詩作)을 할 때 주제(主題)의 예술적 형상화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육사(李陸史) 선생의 ‘청포도(靑葡萄)’에 비견(比肩)하는 문학적 성과는 거두었을지 몰라도, 저 독일(獨逸) 사람 C. M. 바우라(Bowra)의 역저(力著) ‘시(詩)와 정치(Poetry and Politics)’에서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 “세계 저항시(抵抗詩)의 본보기”라는 평(評)을 받지는 못하였으리라.
흔히 이육사(李陸史), 한용운(韓龍雲), 윤동주(尹東柱) 삼위(三位)를 지칭(指稱)하여 우리나라의 ‘삼대(三大) 저항시인(抵抗詩人)’이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소설가(小說家)로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친 심훈 선생의 시 ‘그 날이 오면’이야말로 저항성(抵抗性)이나 격정성(激情性) 및 민족적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는 면에서 가위(可謂) 최고(最高)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광복절 무렵이면 TV나 라디오(Radio)를 통해 선생의 ‘그 날이 오면’이 이른바 ‘삼대 저항시인’의 작품들을 제치고 거의 빠짐없이 으뜸으로 방송(放送)되곤 한다. 시적 균형 유지와 형상화 성공 여부와는 크게 상관없이 말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출전(出典) : 시(詩) ‘님의 침묵’, 1926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출전(出典) : 시(詩) ‘알 수 없어요’, 1926
여기 소개한 시구(詩句)들은 심훈 선생과 더불어 3.1운동에 참여했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 남긴 해타(咳唾) 중에서 인용(引用)한 것이다.
만해 스님의 ‘님’은 ‘조국(祖國)’, ‘불타(佛陀)’, 또는 ‘조국과 부처님이 일체가 된 존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님’을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로서 미래(未來)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希望)을 ‘불교적 변증법(辨證法)’의 승화된 논리로 노래하여,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 형상화 내지(乃至) 문학적 성과를 차치(且置)한다면, 일제 치하(日帝治下) 36년 동안 우리 선열(先烈)들이 내내 그렸던 조국이 해방될 ‘그 날’에 대한 뜨겁고도 절실(切實)한 갈망(渴望)의 상황을 실감(實感)하게 하는 작품으로서 만해 선사(卍海禪師)의 시가 심훈 선생의 예언적(豫言的)인 저항시(抵抗詩) ‘그 날이 오면’에 비견(比肩)하지 못한다. 이미 언급(言及)한 바 있거니와, 저항성(抵抗性)이나 격정성(激情性) 및 민족적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는 면(面)에서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는 심훈 선생의 시 ‘그 날이 오면’ 에 비(比)해 어딘지 모르게 2% 정도(程度)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심훈 선생 특유(特有)의 격정성은 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episode)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오오, 조선(朝鮮)의 남아(男兒)여!
-(伯林마라톤에 우승(優勝)한 손(孫), 남(南) 양군(兩君)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傳)하는 호외(號外)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形容) 못할 감격(感激)에 떨린다!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心臟)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 삼백만(二千三百萬)의 한 사람인 내 혈관(血管)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鼓膜)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 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침울(沈鬱)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밟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祖國)의 전승(戰勝)을 전(傳)하고자
마라손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데네의 병사(兵士)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勇敢)하였던 선조(先祖)들의 정령(精靈)이 가호(加護)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웨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全世界)의 인류(人類)를 향해서 웨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族屬)이라고 부를 터이냐! 」
1936 년 8 월 10 일
이 시는 1949년에 발간한 심훈 선생의 ‘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집(詩集) 마지막 장(章)에 있는 글이지만, 원래는 심선생이 손기정(孫基禎 : 1912~2002) 선수의 제11회 베를린 올림픽(Berlin Olympic) 마라톤(marathon) 경주(競走) 제패(制覇) 소식에 접(接)하여 1936년 8월 10일 새벽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호외(號外) 뒷면에다 쓴 즉흥시(卽興詩)였다고 한다.
이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심훈 선생의 절필(絶筆) 작품으로서, 1936년 바로 그 해에 선생이 급서(急逝)하자 영결식장(永訣式場)에서 낭송되어 식장(式場) 분위기를 더욱 비장(悲壯)하게 했다는 일화(逸話)를 간직하고 있다. 역시 심훈 선생다운 열정적(熱情的) 면모(面貌)이자, 그이다운 최후(最後)요, 대미(大尾)였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가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격정(激情)을 토로(吐露)한 즉흥시이긴 하지만, 당시(當時) 우리 민족이 공유(共有)했던 정서(情緖)를 이 시인보다 그 누가 더 실감(實感)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성당(盛唐) 시대의 양대 시인(兩大詩人)으로 흔히 이백(李白 : 701~762)과 두보(杜甫 : 712~770)를 손꼽는 바, 이백(李白)은 시를 즉흥적(卽興的)이고 직정적(直情的)으로 단숨에 내리쓰는 편이었고, 두보(杜甫)는 갈고 다듬어 쓰는 시풍(詩風)을 지녔는데, 우리 나라의 촌부(村夫)에게까지 널리 회자(膾炙)한 시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백(李白), 즉 이태백(李太白)이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못지않게 심훈 선생의 ‘그 날이 오면’ 역시 직정적이고 진솔하게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간절한 열망을 노래하였다.
오늘날 ‘그 날이 오면’━ 이 시는 매년(每年) 8월에 국민적 애송시(愛誦詩)가 되어, TV 화면(畵面)에서1945년 8월 15일 바로 ‘그 날’ 낮에 서울역(驛) 앞 광장(廣場)과 종로(鐘路) 네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人波)가 해방(解放)의 감격을 만끽(滿喫)하고자 태극기(太極旗) 휘날리며 만세 행진(萬歲行進)을 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documentary) 필름(film)’으로 보여 줄 때마다, 장중(莊重)한 배경음악과 함께 자막(字幕)으로 꼬박꼬박 방송(放送)되곤 한다.
문학의 예술성(藝術性)과 사회성(社會性) 양면(兩面) 중에 어느 것을 더 우위(優位)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論爭)은 지금까지 늘 있어 왔지만, 심훈 선생의 ‘그 날이 오면’이 해마다 광복절(光復節) 즈음에 방송 매체(放送媒體)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그가 시를 본업(本業)으로 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육사(李陸史)나, 한용운(韓龍雲), 윤동주(尹東柱) 삼위(三位)의 ‘저항시인(抵抗詩人)’이 쓴 시들보다 더 조국 광복의 ‘그 날’에 대한 절실하고 진솔한 감정을 직정적(直情的)으로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예술적 가치(價値) 여부를 차치(且置)하고 광복절 전후(前後)의 방송용(放送用)으로 가장 적절한 시는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심훈 선생의 ‘그 날이 오면’을 제칠 작품이 대뜸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광복절 같은 국경일(國慶日)에 국민적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문학 작품은 아무래도 너무 고답적(高踏的)이거나 사변적(思辨的)이거나 기교적(技巧的)일 경우(境遇)에 일반 대중(一般大衆)의 공감(共感)을 얻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심훈(沈熏 : 1901~1936) 선생의 예언적(豫言的) 저항시(抵抗詩)이자 유작시(遺作詩)였던 ‘그 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상상(想像)의 날개를 마냥 펼쳐서 우리 선열(先烈)들이 일제 치하(日帝治下)에서 독립 운동을 벌이던 바로 그 시절로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되돌아가, 그분들의 열망(熱望)과 투쟁(鬪爭)과 고귀한 희생(犧牲)을 생각하며 감상(感傷)에 젖으려 한다.
심훈 선생은 정작 ‘그 날’을 보지 못하였지만, 당신(當身)의 예언(豫言)대로 광복(光復)의 ‘그 날’에 서울 장안(長安)은 정말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만큼 백성(百姓)들의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기세(氣勢)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하는데, 나는 다시 그 날의 장면(場面)을 흑백(黑白) 필름(film)에 담은 다큐멘터리(documentary) 프로그램(program)을 DVD를 통해 시청(視聽)하면서, 8월 15일 단 하루 만이라도 센티멘털리스트(sentimentalist)가 되어 보고자 한다.
생활(生活)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적어도 광복절 하루는 공휴일(公休日)이니만큼 일상(日常)을 잊은 채 센티멘털리스트(sentimentalist)가 되어 보는 것도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좋지 않겠는가^^*.
2007 년 8 월 15 일 광복절 아침에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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