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삼월 (三月)
1
3월이 오면
맨 먼저
떠오르는 노래,
국민학교(國民學校) 때 부르던
동요(童謠) 한 곡(曲)이 있습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柳寬順)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獄) 속에 갇혀서도 만세(萬歲)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아, 지독히 짧은 노래였지만
어린 제 귀에 마냥 무겁게만 들리던
‘삼일절(三一節) 노래’보다는
훨씬 실감(實感) 나는 동요(童謠)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부터
나이 터울이야
어머니뻘이었지만
유관순 누나는
저의 영원한 누나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 노래를 떠올리는 한
늘 젊디젊은 제 누님이실 것입니다.
누나를 잃은 소년은
3월이 슬픈 달이었고
중늙은이가 된 지금도
3월이 다가오면
괜스레 가슴이 짠해집니다.
2
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유관순 누나를 알게 되었고,
그 날부터
3월은 슬픈 달로
저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지만,
3월이 제 가슴 속을 지금껏
이다지 아리게 하는 까닭은
또 다른
저의 우상(偶像)이
산산(散散)이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초딩(初等)’ 시절엔
해마다 3월 26일만 되면
우리 나라 건국(建國)의 아버지시며
평생을 조국광복(祖國光復) 운동에 몸 바치셨다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각하(閣下)의
생신(生辰) 축하 행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습니다.
해마다 3월 26일 즈음엔
HLKA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연신 “이승만~ 대통령!!……” 운운(云云)하는
대통령 찬가(讚歌)를 방송했고,
우남(雩南)의 생애를 조명하는 기사(記事)가
온종일 신문(新聞)과 방송(放送)을 도배질했기에
어린 저의 눈과 귀에는
어느새 우남장(雩南丈)이
그냥 사람이 아닌
신비한 우상(偶像)이 되어 있었습니다.
각설(却說)하고
…… ……
경자년(庚子年) 3월 무렵
우리 나라에는
이런 슬픈 노래가
유행(流行)하고 있었습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海公先生) 뒤를 따라
장면 박사(張勉博士) 홀로 두고
조박사(趙博士)도 떠나갔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當選)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自由黨)에 꽃이 피고
민주당(民主黨)에 비가 오네.
…… ……
세상(世上)을 원망하랴,
자유당(自由黨)을 원망하랴.
춘삼월(春三月) 15일
조기 선거(早期選擧) 웬 말이냐.
천리만리 타국(他國) 땅에
박사(博士) 죽음 웬 말이냐.
눈물 어린 신문(新聞) 들고
백성(百姓)들이 울고 섰네.”
당시(當時) 유행하던
‘유정천리(有情千里)’라는
노래의 가사(歌詞)를
패러디(Parody)한 노래였는데
어린아이들은
행간(行間)에 숨어 있는 뜻도 모른 채
3월 한 달 내내
어른들을 따라 무작정 불러댔지요.
“자유당(自由黨)에 꽃이 피고
민주당(民主黨)에 비가 오네.”
노랫말과는 달리
단기(檀紀) 4293년 3월 15일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가
삼인조(三人組)니 구인조(九人組) 선거니 하며
‘대리(代理) 부정투표(不正投票)’로 얼룩지자
정작 자유당(自由黨)엔
차가운 눈이 펄펄 내리고,
저의 우상(偶像)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銅像)은
개나리 진달래꽃 함빡 핀 4월에
분노한 민중(民衆)에 의해
높다란 좌대(座臺)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져
새끼줄에 목이 감긴 채
길거리로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습니다.
우상(偶像)을 잃은 소년(少年)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해마다 3월 26일이 오면
괜스레 가슴이 텅 빈 듯한 느낌에 젖어
짙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공연히 장탄식(長歎息)을 하곤 했습니다.
3
요즘 청소년(靑少年)들에겐
‘3월’ 이 찾아온다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개학식(開學式)과 입학식(入學式)을
맨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예전 자유당(自由黨) 치하(治下)와
민주당(民主黨) 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정반대(正反對)로 3월에
종업식(終業式)과 졸업식(卒業式)을 했으므로
1 년 중에 3월 달 만큼은
유달리 사람들을 센티멘털(sentimental)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달[月]이었습니다.
저 강원도(江原道) 내륙(內陸) 깊숙한 곳을 흐르는
소양강(昭陽江) 갯마을에서 자라난 저는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던
4월 초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어느 해 3월 22일
때늦은 폭설(暴雪)이
하루 종일 무던히도 내리던 날
평소 나룻배로 매일 강나루를 건너가야 했던
모교(母校)에 마지막으로 등교(登校)해서
풍금(風琴) 소리 반주(伴奏)에 맞춰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라는 노래를 들으며
졸업장(卒業狀)을 받았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저희 졸업생들은
강원도 내륙 지방(內陸地方)
특유(特有)의 늦추위로 해서
꽁꽁 얼어붙은 소양강을
엉엉 울면서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정든 모교(母校)를
영영 떠나야 한다는 사실과
친구들과의 ‘이별(離別)’이
슬퍼서 몹시 울었고,
날씨가 너무너무 추운데다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려서
창피한 한 줄도 모르고
내내 울었습니다.
이른바 ‘5.16 군사혁명(軍事革命)’ 이후
학기제(學期制) 개편으로 인해
요새는 3월 초에
입학식을 하곤 하지만,
저는 어린 시절
3월 말에 첫 졸업을 한 추억 때문에
중늙은이가 된
지금도
바로 이맘때를
이별(離別)의 ‘슬픈 달’로
여기는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2007 년 3 월 1 일 새벽에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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