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유록(交遊錄)

사십여 년 만에 최일남 형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니

noddle0610 2010. 1. 15. 16:40

 

 

 

 

사십여 년 만에 최일남 형()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니

   

 형님을 애타게 찾는 초등학교 후배 최돈석 씨에게 

 

 

 

 

 

 

  , 최일남 형(兄)의 흑백사진을 보니 가슴속에 만감(萬感)이 교차(交叉)하는군요.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오느라 일남 형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후 어느 해인지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당시 군대에 복무 중이던 형과 신작로(新作路) 길에서 우연히 해후(邂逅)하였지요.

  형은 군복(軍服)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상의(上衣)는 흰색 러닝셔츠(running shirt)만 걸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군인들이 여름에 입는 러닝셔츠의 색깔이 국방색(國防色)인데, 그 당시에는 내가 군대생활 할 때까지 일반적인 군복 색깔과는 다르게 팬티를 포함한 군인들의 속옷들이 전부 흰색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흰색 러닝셔츠를 통칭(通稱) 난닝구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형이 휴가 중인지 외출 외박 중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지만, 실제(實弟) 최돈석 씨 회고록(回顧錄)에 의하면 일남 형이 신남 지구 방첩대근무하셨다고 하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휴가가 아닌 영외(營外) 근무 중에 나를 우연히 만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첩대(防諜隊)는 예전에 특무대(特務隊)라고 불렀으며, 방첩대 명칭을 거쳐, 나중에는 보안사(保安司)로 바뀌었고, 현재는 기무사(機務司)라고 부르는데, 상당히 끗발이 센 부대(部隊)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형의 모습은 아주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얼굴은 아주 갸름한 편에 속했는데, 그때 형을 마지막으로 보고, 그 후로는 형은 물론이요 형의 가족(최돈석 씨 부모님)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이래(以來) 대학 진학 후 도중(途中)에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고, 군대 제대 후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우리 고향은 물속에 완전히 잠겼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1973년 초부터 공직생활(公職生活)을 했기 때문에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해, 팔도강산으로 흩어진 고향 사람들과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1977년에 우리 할아버님이 경기도(京畿道) 이천(利川)에 사시다가 별세(別世)하셔서 이미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된 우리 고향 선산(先山)에 모시게 되었는데, 소양강 댐(dam) 준공으로 삼지사방[散之四方]으로 흩어졌던 우리 할아버님의 제자(弟子)들을 중심으로 동네 청장년(靑壯年)들이 다 모여들어 상수내리(上水內里)에선 마지막인 꽃상여(-喪輿)할아버님의 영구(靈柩)를 모셨을 때, 바로 그때 일남 형의 부친 되시는 아저씨를 산소(山所)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해서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나 친구들은 물론이요 형의 가족(최돈석 씨 부모님)과도 상호간에 소식이 두절되어, 그동안 나는 일남 형이 뜻하지 않은 일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진 일이나 그로 인해 아저씨 아주머니께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신 일 등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두 분이 별세하신 일도 얼마 전 형의 아우 최돈석씨의 회고록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고향이 물속에만 안 잠겼어도 지금처럼 우리 동네 어른들이나 형의 부모님들과 상호간 왕래(往來)가 끊어지진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상수내리라는 마을이 고스란히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면, 최돈석 씨와도 절친한 동네 선후배(先後輩)로 교류(交流)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돈석 씨와 나는 아직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사이니,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법(法)이 없어도 사실 수 있었던 착하디착하시던 아저씨와 아주머니(최돈석 씨 부모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떠오릅니다. 내 기억 속의 두 분은 40대 장년(壯年)의 모습으로만 기억이 됩니다.

  상수내리에 사실 때만 해도 항상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비녀를 머리에 꽂으신 채 생활하셨던 아주머니의 순박하신 모습이 아스라이 회상되는군요.

  최돈석 씨는 이른바 짹변집에서 살았던 일만 기억하겠지만 그 집이 나의 기억 속에는 전혀 없고, 그 이전에 상수내리 안마을의 우리 사돈댁(査頓宅)인 신씨(申氏) 집 밑 장중희-장공희-장병희 씨 형제가 사시던 집 바로 이웃에 일남 형네 집이 있었다는 기억만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일남 형네 집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 현재 나의 재종(再從) 동생 박형원 군(君)이 살고 있는 집 앞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자그마한 동산 밑 선착장(船着場) 부근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일남 형네 집 바로 앞에는 신작로(新作路)가 있었고, 그 신작로 밑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개울 건너에 자갈밭 짹변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짹변을 지나 안산(案山) 밑에는 장영희-장숭희 씨 형제분이 사시던 초가집이 있었지요.

  나는 짹변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불알친구들인 김수염 군(君)이나 이성천 군(君) 등과 더불어 최일남 형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족대를 들고 메기나 쉐리(쉬리), 기름종개, 버드쟁이(버들치)를 잡거나, 바윗돌을 뒤흔들어 가재나 떡무럭지(개구리)를 온종일 잡으며 소년기(少年期)를 훌쩍 보냈습니다.

 

  나는 일남 형과 최돈석 씨가 친형제라는 사실도 작년까지 전혀 몰랐고,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에 그렇게 가슴 아픈 가족사(家族史)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간혹 신문(新聞)이나 매스콤(mass com)에 일남 형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기도 한 소설가(小說家) 겸 언론인(言論人) 최일남(崔一男) 선생의 글이 보이면 내 고향 선배와 이름이 같다는 사실 만으로도 반가워 그 양반의 글을 애독(愛讀)하면서, 가끔씩 일남 형을 그리워하곤 했습니다.

  최일남 선생이 동아일보(東亞日報)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쓴 유명한 논설(論說) 한 편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것은 바로 1986년 아시안 게임 때 임춘애(林春愛) 선수가 육상경기(陸上競技)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자 그 사실을 축하하는 라면 먹고 뛴 임춘애 선수야!라는 제목을 붙인 사설(社說)입니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최일남 형(兄)의 흑백사진을 보니 실제로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형의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는데 사진 상으로는 얼굴이 비교적 둥글게 보인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띕니다. 형의 사진은 군대에 가기 전에 찍었거나, 아니면 현역 군인으로 복무할 당시에 방첩대(防諜隊)의 특수성 때문에 머리 기르고 사복(私服)을 입은 채 근무하면서 어렵사리 짬을 내서 촬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비록 세월 탓으로 사진이 구겨지고 그 빛깔이 바래긴 했지만 1960~1970년대 남성들 특유의 멋을 내기 위해 머리에 포마드(pomade)를 바른 형의 모습에서 형이 얼마나 멋쟁이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진을 보니 일남 형도 요즘 시쳇말로 상당한 얼짱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實感)할 수 있습니다.

 

  일남 형은 외면(外面)뿐만 아니라 내면(內面)도 섬세하고 다정다감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비롯해서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편인 내 친구들과 함께 자주 놀아 주기도 했던 것이지요.

  내가 옥산동(玉山洞 : 억산악골)에 살 때 형이 내게 바퀴 달린 나무 썰매를 만들어 줘서 그걸 타고 잔디버덩을 오르내리며 놀았던 기억도 나고,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명주실이나 거미줄로 매미채를 만들어 그걸 들고 매미며 잠자리 따위의 곤충을 잡아 방학숙제를 해결하는데 형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도 아렴풋하게 납니다.

 

  지금 또 기억이 나는 것은 일남 형은 독서를 상당히 좋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동네에서 소설이나 잡지를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집은 우리 집안과 수양 결연(收養結緣)을 맺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집안의 김선일 형님 댁(宅)으로, 그 댁 사랑채는 한쪽 벽면(壁面) 전체를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가 꽉 채우고 있었는데, 그 사랑방에서 책을 가장 많이 빌려 읽은 사람이 아마 일남 형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이 바로 나(?)였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진 상으로나마 최일남 형을 다시 보는 것은 이러구러 40여 년도 더 흐른 것 같습니다. 형과 헤어진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고 보니 빛바랜 사진 색깔만큼이나 기억도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형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을 최돈석 씨가 친형(親兄)의 사진을 나한테 보낸 것은 나를 통해 형님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 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 또한 더 이상은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지금껏 이야기한 형과의 추억조차 내가 제대로 사실에 맞게 떠올린 것인지 자신(自信)이 없습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가서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40여 년 전의 기억들을 억지로 떠올리려 애를 쓰다 보면 오히려 사실이 왜곡(歪曲)될까 저어하여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향을 일찌감치 떠난 나보다는 최돈석 씨의 친인척(親姻戚) 어르신들이 형에 관해 더 기억들을 잘 하시겠지요.

 

  오늘 내가 일남 형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잘못된 기억을 전달했거나, 자칫 형에 관한 어설픈 나의 이야기로 인해 최돈석 씨 형제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지나 않았는지 자못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최돈석 씨 말마따나 형님의 남아 있는 가족 형제분들은 40여 년 동안의 아픈 가족사(家族史)를 딛고 그 어떤 두드러진 배경도 없이 각자(各自) 성공적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해냈기에, 때때로 일남 형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겠지만 앞으로도 더욱 꿋꿋하게 잘 살아 나가리라 믿기에, 더 이상 괜한 걱정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통해 뒤늦게나마 하늘에 계신 아저씨 아주머니 양위분(兩位分)의 명복(冥福)을 충심(衷心)으로 빌며, 아울러 최일남 형님 형제분들의 앞날에 하느님의 가호(加護)가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길 간곡히 기원하렵니다.

   

2010 1 14 새벽

 

    

 

 

출처 : Daum cafe 수내국민학교 동문들에 사랑방, 6회 이야기방

http://cafe.daum.net/wkdrbgud2002/JSoH/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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