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랑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나라 질항아리들

noddle0610 2013. 6. 7. 14:49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나라 질항아리들

 

 

 

          01. 김제(金堤) 지방의 곡식 항아리(120).

 

 

          02. 술 항아리(100) : 항아리 속에다 누룩을 발효시켜 술을 양조(釀造). 

 

 

          03. 충청도(忠淸道) 지방의 곡식 항아리(80).

 

 

          04. 큰 곡식 항아리(100) :

               집안 형편에 따라 뒤주(곡식 담는 나무 궤짝 용기)와 더불어 사용함.

 

 

          05. 전라도(全羅道) 지방의 간장 항아리(70-80) : 숨쉬는 항아리.

 

 

          06. 남도(南道) 지방의 나선형(螺旋形) 문양(紋樣)을 한 간장 항아리(80).

 

 

          07. 경상도(慶尙道) 지방에서 사용하던 항아리(70-80).

 

 

          08. 새우젓독(70-80).

 

 

          09. 새우젓독(70-80).

 

 

          10. 경상도 지방의 젓갈독(100).

 

 

          11. 충청도 서천(舒川) 지방의 물 항아리(100) :

               우물물을 길어다가 부엌의 물 항아리에 쏟아 부어 놓고 식수(食水)로 사용.

 

 

          12. 경남(慶南) 지방의 간장 항아리(50-60)

 

 

          13. 경기도(京畿道) 지방 항아리(70) : 추위에 견딜 수 있게 강하고 단단함.

   

 

 

 

            사진 촬영 :  2012.10.21(). 오후 2시 (촬영자 : 박노들)

            촬영 장소 :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 (5회 마포나루 새우젓축제 현장)

 

 

 

 덧붙이는 글

 

 

  우리 집 마당에는 1995 6월에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께서 생전(生前)에 사용하시던 질항아리즉(卽) 옹기(甕器)항아리이 아직도 장독대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쌀은 항아리뒤주 가 아닌 주방(廚房)의 플라스틱(plastic) 쌀통에 갈무리해서 사용하고 있고, 김치는 김치 냉장고 에 보관하고 있으며, 고추장과 간장은 ○○식품△△회사의 제품을 구입해서 싱크대(sink)의 설합 속에 넣어 둔 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저희 집에 더 이상 항아리 장독단지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제 아내는 21세기의 현대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자기 시어머니로부터 진작에 고추장 간장 담그는 법과 동동주(-酒) 담그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건만 그 노하우(knowhow)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썩히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우리 어머니의 수십 년 손때가 묻은 것들이라 장독대 위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을 자주 씻고 닦아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 보관하고 있답니다. 그런 아내가 저로서는 마냥 고맙게 여겨지고 예뻐 보일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요.

 

  지난가을에 우연히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축제(祝祭) 행사에 들렀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는 질항아리들이 전시된 것을 보고 그 모습들을 제 눈 속에 길이 담아 두려고 열심히 카메라(camera)의 셔터(shutter)를 누른 적이 있습니다.

 

  제 고향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부평리(富坪里)에는 모루박이란 작은 동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전통적인 옹기그릇을 만들던 마을이었는데, 주민들의 상당수는 천주교(天主敎) 신자(信者)였습니다.

 

  조선시대 후기(後期)에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이 박해를 받을 때 상당수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강원도 오지(奧地) 마을로 피신해 옹기(甕器) 따위를 구워 만들며 살았다고 합니다.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등지(等地)의 산골 마을은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며 남 몰래 옹기를 구워 팔던 대표적 피난지(避難地)였는데, 오늘날 그곳의 풍수원(豊水院) 성당(聖堂)은 천주교 신자들이 즐겨 찾는 성지(聖地)가 되었지요. 이미 돌아가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樞機卿) 예하(隸下) 역시 생전에 당신(當身)이 옹기장(甕器匠)의 후예(後裔)임을 밝히신 바 있고, 당신의 별호(別號)를 옹기(甕器)라고 불러 달라 하신 적도 있습지요.

 

  제가 태어난 고향 옥산동(玉山洞)고개 너머 북동(北東)쪽에 위치한 모루박마을에는 육이오(六二五) 동란(動亂) 이후에도  질그릇을 굽는 옹기가마들이 더러 남아 있었는데, 그곳의 천주교 신자들을 관할하던 가톨릭(Catholic) 교구(敎區)에서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굶주리던 주민들의 구휼(救恤)에 크게 힘을 썼으며, 이웃 마을 사람들의 구제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천주교 춘천교구(春川敎區)에서는 인제군 남면 지역과 인접해 있던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 수산리(水山里)에 공소(公所) 비슷한 것을 차려 놓고 선교(宣敎)에 힘쓰면서, 천주교 신자는 물론 비신자(非信者)에 이르기까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등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당시 수산리 마을과 이웃 동네인 우리 고향 마을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가톨릭교회(Catholic敎會)를 가리켜 밀가루 교회또는 옥수수가루 교회라고도 했는데, 저의 친할아버님께옵서는 완고(頑固)한 유학자(儒學者)셨기 때문에 바로 그 할아버님이 무서워서 저는 어린 시절에 단 한 번도 교회(敎會) 근처에 가 보지 못 했고,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배급 받은 적이 없었음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아무튼 저는 지금도 천주교(天主敎) 하면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옹기 굽는 마을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고, 옹기그릇을 떠올리면 박해받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 주방이나 장독대에서 질항아리나 질그릇 따위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없기 때문에, 옛것에 대한 애착이 남달리 강한 저희 집에선 아직도 질항아리 등속(等屬)을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둔 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 강북(江北)의 단독주택에 살면서 아직껏 아파트(apartment)에 사는 것을 기피하는 까닭인즉슨 1995년에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의 유물(遺物)들과 제가 아끼는 골동품(骨董品), 그리고 평생 동안 제법 모아 둔 고서(古書)와 수천 권에 이르는 인문학(人文學) 관련 서적들을 아파트에는 따로 보관하기가 적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가을에 제 아내와 함께 우연히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축제(祝祭) 행사에 들렀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는 조선 팔도(朝鮮八道)의 질항아리들이 즐비하게 전시된 것을 보고 저는 반가운 나머지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짧게는 50~60년이 넘은 항아리에서부터 심지어 100년이 훌쩍 넘는 질항아리들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옹기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습니까.  

 

  농투성이 할머니의 손길처럼 투박하게 보이면서도 온화한 느낌이 드는 질그릇, 질항아리들을 보니 한평생 논밭머리를 떠나지 못하셨던 저희 어머니가 오랜만에 시골에서 당신의 아들자식을 보시려고 농작물(農作物) 한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상경(上京)하신 것처럼 왈칵 반가웠습니다 

 

  !…… 이제 생각해 보니, 서울에 올라와 산 지 이미 5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저는 강원도 시골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전형적인 구닥다리 꼰대인가 봅니다 

 

 

2013 년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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