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랑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복간(復刊)을 기뻐하며

noddle0610 2015. 10. 9. 23:39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복간(復刊)을 기뻐하며

  

 해마다 그러했듯이 오늘 아침에도 저는 이부자리 속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어린애처럼 가슴 설레며 기분 좋게 ‘569돌 한글날’을 맞이했습니다.  한글날은 저에게 있어서 생일과도 같이 아주 소중한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께옵서 친히 만드신 한글은 우리 배달겨레 모두에게 소중한 글자이지만, 특히 저로서는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한 덕분에 ‘한글 관련 분야에 종사하면서 평생토록 밥을 굶지 않고 안정된 삶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국어국문학’ 분야는 저의 적성에 너무 잘 맞아서 3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에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글로 씌어진 책들을 읽으며 매일매일을 심심찮게 보내고 있기 때문에, 저는 늘 한글을 만들어 주신 우리 세종대왕님의 망극한 성은(聖恩)에 감사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한글을 사랑한 나머지 아예 평생토록 전공까지 하게 된 것은 저의 남다른 성장 환경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저는 1940년대 후반기에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선에 있는 궁벽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저의 할아버님께옵서 성리학자(性理學者)이시자 서당방(書堂房) 훈장(訓長)이셨기 때문에 저는 한문서적으로 꽉 찬 집에서 늘 먹물 냄새를 맡으며 유소년기(幼少年期)를 보내야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경영하던 서당방에는 인제군-양구군-홍천군-춘성군 등 4개 고을에서 모여든 학생 수십여 명이 붐볐는데, 학생이 많다 보니 훈장님 혼자 다 감당하실 수가 없어서 저희 할아버님께옵서는 학생 중에서 나이와 학력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 ‘접장(接長)’이란 직책을 맡겨서 당신을 보조하도록 조처(措處)하셨고, ‘접장’은 서당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학생들에게 ‘천자문(千字文)’과 ‘계몽편(啓蒙篇)’ ‘동몽선습(童蒙先習)’ ‘무제시(無題詩)’ ‘명심보감(明心寶鑑)’ 따위의 책을 가르쳤으며, 훈장이신 할아버님께옵서는 ‘명심보감’을 뗀 학생들에게 ‘소학(小學)’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만(滿) 나이로 세 살이 되던 때부터 접장에게서 ‘천자문’과 ‘계몽편’ ‘동몽선습’ ‘무제시’ ‘명심보감’ 등을 배웠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할아버님의 은근한 묵인 아래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접장형(接長兄) 앞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익히게 되었고, 공책과 연필 대신에 ‘분판(粉板)’과 붓 그리고 먹과 벼루를 먼저 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이가 귀했던 1950년대 전반기에 서당방에서는 폐지(廢紙)는 물론이거니와 헌 신문지(新聞紙) 쪼가리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송판(松板 : 소나무를 켠 널빤지) 바닥에 기름을 발라 그 기름이 나무속 깊숙이 흠씬 배어들어 반질반질하게 결은 이른바 ‘분판’ 위에다 붓으로 글씨를 쓰고 걸레로 행주질하여 글씨를 지우곤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린이교실과 유치원을 다닐 나이에 서당방에서 한문을 배워야 했으니 그 당시 나이 어린 저로서는 글공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천자문 책을 떼고 그 다음 단계에서 한문 문장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한문의 원문 구절 끝에 붙여 읽는 우리말 부분, 이른바 한글로 된 토()를 달아 읽기 위해서 난생처음으로 ‘한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접장형에게서 한글을 배웠고, 밤에는 어머니와 할아버지 앞에서 “가갸거겨”를 복습하였습니다.  한문과 달리 한글은 너무 배우기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글자가 있는데 구태여 한문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그 당시 어린 나이의 저로서는 쉽사리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동양문화권(東洋文化圈) 내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하고 우리말의 상당수가 한자어(漢字語)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논리는 유소년(幼少年)인 저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어려운 한자(漢字) 때문에 늘 끙끙거려야 했던 저에게 ‘한글’은 문자 그대로 새로운 세계[新世界]였습니다.  저에게 처음부터 한글은 좋은 인상을 주었고, 그 첫인상은 지금껏 평생토록 변치 않고 긍정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접장형의 가르침을 받아 ‘명심보감’을 완전히 떼었고 할아버님으로부터는 ‘소학’책까지 배우고 익혔건만 그 후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익히는 동안에 할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서당방에서 배운 글과 내용들은 절반 이상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하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미리 배운 한글로 어머니와 함께 읽었던 이야기책의 내용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잊지 않았고, 나중에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 전공 학문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이 청상(靑孀)이 되신 우리 어머니께옵선 긴긴 겨울밤이 찾아오면 밤마다 남포등(lamp) 아래서 ‘이야기책’ 읽기를 즐기곤 하셨는데, 어머니가 읽으시던 그 이야기책들이야말로 바로 한글로 인쇄된 책들이었습니다. 1950년대 당시만 해도 이야기책들은 누가 곁에 있든 없든 으레 소리 내어 낭독을 해 가며 읽는 풍습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목청이 좋고 고우셔서 책을 낭독하실 때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시곤 했으며, 저희 집안 종갓집의 당숙모(堂叔母)님은 우리 어머님의 최고 애청자(愛聽者)이셨고 그 다음 애청자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이야기책의 내용 전개에 빠져 들었던 당신의 외동아들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해마다 한겨울 내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토끼전’ ‘장끼전’ ‘옹고집전’ ‘옥단춘전’ ‘숙향전’ ‘사씨남정기’ ‘박씨전’ ‘금방울전’ ‘유충렬전’ ‘조웅전’ ‘신유복전’ ‘홍길동전’ ‘배비장전’ ‘김학공전’ ‘숙영낭자전’ ‘구운몽’ ‘옥루몽’ 등의 이야기책들을 끝까지 다 들었고, 한글을 다 깨우친 후에는 어머님이 읽으셨던 책들을 제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다 읽었으며, 그 내용을 친구들에게 전부 이야기 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야기책들은 각 문장 단어들의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채, 다시 말해서 각 단어들의 앞뒤가 전부 다닥다닥 붙여 쓴 형태로 인쇄 되어 있어서 낭독할 때 초보자가 읽기엔 좀 힘들었고, 철자(綴字) 가운데 ‘아래 아’ 즉 ‘ㆍ’ 가 사용 되는 등 철자법(綴字法)도 요즘과 다른 것들이 많았지만, 저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 덕분에 옛날 식() 철자법과 옛날 식 띄어쓰기까지 능숙하게 익혀서 책을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마 책 속의 무궁무진한 이야기 내용들에 관해 궁금증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제 또래의 친구들보다 조금 더 빨리 책 읽기를 해낼 수 있었던 같습니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 미리 서당방에서 배운 한글과 어머니의 이야기책 낭독 덕분에 저는 차츰차츰 우리 글자의 매력과 책 속에 빠져 들었고, 그로 인해  저는 훗날 대학교에 진학할 때 큰 망설임 없이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부전공(副專攻)으로 역사(歷史)를 선택하였으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고전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을 바탕으로 한 학문을 전공한 덕분에 그 관련 분야에서 평생토록 종사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밥을 굶지 않고 안정된 삶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한글날을 제 생일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생일상(生日床)을 평생토록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받습니다만, 제가 태어난 강원도 영서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이들의 생일상은 열 살(만 아홉 살) 안팎 무렵까지만 제대로 차려 주고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각별히 신경 써서 차려 주지는 않아, 그게 저는 늘 불만이었습니다.  옛날 아이들은 한 자릿수 나이 때 돌림병 따위에 걸려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명()이 길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열 살 무렵까지는 수수팥떡 경단(瓊團) 따위로 생일상을 차려 주었지만, 일단 두 자릿수 나이가 되면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들 생일에 특별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는 대부분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 되므로 그제서야 각자 자신들의 배우자(配偶者)에게서 다시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워낙 결혼들이 늦어져서 비록 결혼 전이라 할지라도 성인 연령이 되면 부모님들이 다시 생일상을 차려 주는 등 생일 풍속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님도 제가 군대를 제대한 이후에는 비록 미혼이었지만 아들인 저한테 생일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박수 속에서 제대로 생일축하 노래를 들으며 생일 케이크를 자르게 된 것은 결혼 이후였고, 그전에는 서양식으로 생일 케이크를 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아내로부터, 자식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해마다 성대한 생일상을 받게 되었고, 비로소 가정의 행복과 화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한글날을 한동안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한 적도 있지만 얼마 안 가서 중단되었고, 조국 광복 이후에는 정식으로 ‘한글날’로 지정을 받아 해마다 공휴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치르곤 했지만,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에 이르러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말만 국경일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찬밥 대접을 받았습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저와 같은 사람들은 해마다 한글날이 돌아오면 마치 생일을 뺏긴 소년처럼 그날 하루를 우울한 심정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언론에서조차 예전만큼 한글날의 의의나 한글과 우리말의 소중함을 크게 다루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 글과 말은 점차 오염되고 형편없이 왜곡되어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시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제대로 국경일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생일 없는 소년처럼 한글날을 우울하게 보내야 했던 저는 근년에 서울 용산에  ‘한글박물관’이 생긴 것도 보게 되었고, 특히 올해 한글날에 즈음해서는 여러 언론기관에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예전보다 확대하여 보도(報道)하는 것을 보고 마치 생일을 되찾은 소년처럼 가슴 설레며 ‘569돌 한글날’을 기다렸습니다.

 

한글날 전야(前夜)인 어젯밤에는 제가 값비싼 ‘피자(pizza)’를 생일 턱으로 내놓아 우리 집 다섯 식구와 함께 한글날을 미리 자축하였습니다.

 제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은 ‘피자(pizza)’를 보고 기뻐하면서도 한글날을 유난히 기념하려는 저에 대해 약간은 의아(疑訝)해하였습니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 저는 세종대왕과 그분이 창제하신 한글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미친 큰 영향을 설명했고, 제가 바로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을 전공하고 잘 활용한 덕분에 우리 식구가 그동안 밥을 굶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 집 식구들이야말로 세종대왕님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한글날을 우리 집 식구들의 생일 기념 및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처럼 기념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평소에도 지루한 일상생활에 변화와 생기를 주기 위해 생일 말고도 각종 기념일을 꼬박꼬박 잘 챙기고, 또 식구 중에 기분 좋은 일이 생기거나 하면 각자 자진해서 자신의 용돈으로 한 턱을 내곤 하는 편입니다.  기념일 중에 제일 큰 기념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지요. 올해 결혼기념일에 저는 아들 녀석으로부터 중절모(中折帽)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았고 제 아내는 옷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 집의 기념일 중 또 다른 큰 기념일은 저의 ‘생환(生還) 기념일’이지요. 십 년 전 음력 설 무렵에 제가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거의 죽었다가 ‘119 구급차’의 도움을 받아 종합병원으로 후송되어 십여일 만에 되살아난 적이 있는데, 저와 아내는 그날을 저의 ‘제2의 생일’로 기념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하루를 여느 해보다 더 기뻐했던 것은 마침 공교롭게도 한글날 569돌에 맞추어 국보 제 70호인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 책자 원본(原本)을 소장하고 있던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3000부 한정판으로 복간(復刊)하여 한글날을 앞두고 출간하였는데, 바로 그 복간본을 제가 어렵사리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의 보도(2015.10.07, 투데이, A32면 기사)에 의하면 이 복간본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원본의 빛바랜 상태 등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냈다고 합니다. 원본의 종이 질감은 물론이고 얼룩지거나 훼손된 부분까지 거의 똑같게 만들었으며, 또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뒤로 쓰는 ‘자루매기 편집’을 했고 원본처럼 4개의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묶는 4침 제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한 복간본을 통해 세종대왕 당시 반포한 해례본 원본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복간본과 해설서는 제작과 출간을  ‘교보문고(敎保文庫)’에서 담당했으며 그 가격이 25만원으로서 서민들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편이지만, 국어국문학 관련 분야에서 평생토록 종사하여 오늘날까지 밥을 굶지 않고 안정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비싸다고만 볼 수는 없었기에 저의 아내에게 구입 희망 의사를 전했고, 앞으로 다섯 달 동안에 걸쳐서 제 용돈에서 분할하여 갚겠노라 했더니 제 아내가 선선히 자기 남편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 책을 못 사면 그 책이 눈에 아른거려 밤잠을 설칠 것을 잘 아는 제 아내는 저를 향해 눈을 곱게 흘기면서도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저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저의 요즘 건강상태가 아직 혼자서는 바깥 나들이를 함부로 못할 형편이라 늦둥이 아들아이의 부축을 받아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구입하면서, 저는 제 아내와 아들놈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3000부 한정판이라 책을 구입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아직 70() 정도가 남아 있다는 서점 종업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꿈속에서도 그리던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 책자 복간본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올해야말로 한글날을 진짜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는 어젯밤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어젯밤에 한글날을 미리 자축하면서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먹은 ‘피자(pizza)’는 제가 지금껏 먹어 본 피자 중 단연 그 맛이 최고였습니다.

 

올해 한글날을 그 어느 해보다 더 뜻 깊이 맞이할 수 있게끔  ‘훈민정음 해례본’ 책자를 일제강점기에 발굴하여 오늘날까지 고이 전해 주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1906~1962)과 이번 복간을 이루어낸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교보문고’,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 해설서를 쓴 김슬옹 교수(미국 워싱턴글로벌대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서 꼭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569년 전(1446)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세상에 널리 반포하신 세종대왕님!  당신으로 인해 우리 후손들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우리의 얼을 온전히 보존 할 수 있게 되었고, 겨레 문화의 눈부신 발전은 물론이요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국격(國格)까지 드높일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님감사합니다마마(媽媽)께옵서는 저의 영원한, 진짜 유일무이한 임금님이십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 시민이지만, 세종대왕님의 영령(英靈) 앞에서만은 당신의 영원한 팬(fan)이자 영원히 변치 않는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살고 싶습니다.

 

한글 창제 569돌을 맞이한 오늘, 저는 배달겨레의 일원임을 새삼 자랑스레 생각합니다.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는 숱한 나라와 민족들 속에서 자기 나라 고유의 글자를 가진 겨레는 그리 흔하지 않은데, 그것도 과학적이고 창의적이며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자를 가진 배달겨레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 땅 위에서 살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세종대왕께옵서 우리 겨레에게 전해 주신 훈민정음을 갈고 닦아 더더욱 아름다운 우리 글자 ‘한글’로 거듭날 수 있게 해 주십사 하고 수시로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원하렵니다.    

 

2015 10 9  

한글날 569돌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