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名詩) 감상

기쁜 마음으로

noddle0610 2013. 10. 8. 18:00

 

 

 

      

 

 

기쁜 마음으로

 

시(詩) /  석 (朴海碩)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만 틈을 벌려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서울 지하철 6호선 응암역 스크린도어 전시 작품

   

 

 한 치의 여유도 없을 만큼 날이 갈수록 각박(刻薄)해지고 있는 요즘 세상의 인심(人心)을 향해 시인(詩人)이 간곡히 호소하는 듯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예전엔 비록 오늘날보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웃들과 콩 한 쪽이라도 노나 먹으며 서로 사이좋게 알콩달콩 잘들 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웃은커녕 친형제 사이나 친척 사이에서도 눈곱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다툼질을 해 댄다.

 

설날이나 추석날 고향집에 오래간만에 모인 형제들끼리 조상님께 차례(茶禮)를 지낸 후 재산 문제로 싸움질을 하다가 사냥총을 쏘아 친형제를 죽였다는 뉴스(News)가 해마다 심심찮게 나도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에서 왕자들의 난()이니 형제의 난이니 하며 서로 고소(告訴)를 해 댔다는 언론 보도가 가끔씩 신문 지면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어느 집 후레자식 한 명이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속셈으로 자기 친어머니 목을 졸라 죽이고 친형을 술을 먹여 살해 한 후 그 시신을 토막 내어 강원도 산속에 버렸다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은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못 살지만 당시엔 우리보다 경제적 사정이 좋았던 동남아시아 제국(諸國) 중에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태국(泰國)버마(미얀마) 등(等)을 마음속 깊이 동경해 마지 않았다. 그 나라들은 일 년에 삼모작(三毛作) 농사를 한다는 사실을 수업시간에 듣고, 나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학우(學友)들과 함께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형편이 어려웠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에도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나 형제들에게 오늘날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정(人情)이 바싹 메마르진 않았다. 

 

육이오사변(六二五事變)이 끝난 후 고향 마을로 돌아오신 우리 어머니께옵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이른바 동냥을 얻으려고 우리 집에 올 것을 대비해 끼니 때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 한 홉씩을 옹기(甕器)로 된 조그마한단지속에 모아 두셨다가 이윽고절미(節米) 단지가 가득 채워지면, 전쟁에 가족을 잃은 무의탁노인이나 상이군인(傷痍軍人)들이 찾아올 경우에 한해 적선(積善)을 하시곤 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연로하신 시부모님을 모신 채 홀로 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어머니께옵서도 살림살이가 남들에 비해 크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위치하고 있던 우리 고향 마을에는 도회지(都會地)에서 살다가 육이오전쟁(六二五戰爭)으로 모든 것을 잃고 무작정 농촌에서 살려고 들어온 피난민들이 간헐적으로 있었는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객지(客地) 사람들인 그들에게 사랑방을 살림집으로 내어 주었고, 보따리 한 개 달랑 들고 온 그들에게 동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숟가락 그릇 따위를 갹출(醵出)하여 살림살이를 갖추게 해 주었으며, 한겨울 내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식량과 이부자리와 땔감 등을 모아서 건네주었는가 하면, 이듬해 봄에는 토지(土地)깨나 있는 집안에 부탁해 소작농민(小作農民)이 되게 하거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火田)을 일구게 하여 식구들이 굶주리지 않게 도와 주었다. 이런 일은 우리 마을에 부자(富者)가 많이 살았거나 집집마다 살림이 풍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원도 두메산골 마을의 1950년대 형편이 풍족했을 리가 결코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콩 한 쪽이라도 이웃과 노나 먹으며 살던 순박한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마을이나 이웃 마을엔 한국전쟁 직후 가정형편은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자녀출산에 관련된 가족계획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집집마다 여러 형제들이 태어나곤 했는데, 부모님들은 산과 들에 나가 온종일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형이나 누나들이 등에 업어 키우다시피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형제간의 우애는 저절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 뿐이랴. 상당수 집안의 큰형들은 도시에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공장에 취직을 해 부모님의 생활비 보조는 물론이요 똑똑한 아우들의 상급학교 진학 뒷바라지를 했고, 큰누나들은 무작정 상경(上京)하여 남의 집 식모(食母)살이를 하거나 시내버스 차장(車掌)이나 허름한 공장의 여공(女工)으로 취직을 해서 늙으신 부모님의 생활비와 농사자금 부담 및 어린 아우들의 학교 등록금 납부에 큰 도움들을 주었다. 그들 큰형이나 큰누나들은 가난한 부모님으로 인해 고생을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으며, 동생들이 자기보다 고학력(高學歷)이라는 사실에 대해 질투는커녕 오히려 뿌듯해하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 덕도 못 입었고 항상 동생들에게 양보만 하거나 동생들을 위해 희생적 삶을 살아야 했던 1950~1960년대의 큰형과 누나들, 그런 덕분에 건강하게 잘 자란 동생들, 콩 한 쪽이라도 노나 먹으며 알콩달콩 살아야 했던 형제들 간에 오늘날 같은 형제간의 싸움질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시(都市)의 가난한 서민(庶民)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전쟁직후 우후죽순처럼 생긴 달동네의 판잣집이나 청계천(淸溪川) 개울가에 늘비하게 형성되어 있던 이른바꼬방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옆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사생활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고 옆방 사람들의 부부싸움 소리는 물론이요 기침 소리와 속삭임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층간소음(層間騷音) 문제로 다투다가 흉기로 이웃을 죽이거나 방화(放火)를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고, 다소간 생활상의 불편한 점은 꾹꾹 참은 채 서로을 내어 주며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서 활기 있게 정말 열심히들 살았다.   

 

대도시(大都市) 인구의 급증으로 초등학교 교실은 한 학급에 70~80명씩 배정되어콩나물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했고, 중고등학교도 한 학급에 60~70명씩 비좁은 교실에서 생활해야 했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학교 교실에는 이른바왕따행위 같은 비열한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당시 학교에도 교실마다주먹대장과 그를 따르는 몇몇 졸개들은 간혹 있었지만 오늘날 중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 비열한일진(一陣) 모임따위와는 성격상 거리가 있다. 이른바불량학생들은 1950년대~1960년대 시절의 명문학교(名門學校)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으며, 입학시험에서 정원미달(定員未達)이 되어 버린 학교나 정원은 가까스로 채웠어도 삼류학교(三流學校)라고 일컬었던 곳에만 불량학생들이 볕뉘처럼 뒤섞여 존재했을 뿐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에는 전차(電車)나 버스(Bus) 안이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어도 대부분 큰 불평 없이 견뎌냈으며, 비교적 젊은 승객이 노약자에게 좌석을 기꺼이 양보하는 것은 그 당시만 해도 도시생활의 기본이라고들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노약자나 임신부가 지하철이나 버스에 오르면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예전처럼 흔히 보기가 힘들다. 어르신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잠든 척하는쩍벌남(좌우 양쪽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남자)아저씨나 노약자를 애써 외면한 채 휴대전화로 수다를 떨고 있는 40대의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아줌마, 이어폰(earphone)을 한 쪽씩 나누어 낀 채 케이팝(k-pop)을 듣는 남녀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오히려 낯익은 세상이 되었다.

 

이런 요즘의 세태 풍경(世態風景), 즉(卽) 몰염치(沒廉恥)한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들이 나날이 늘어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박해석(朴海碩) 시인은 그의 시(詩)를 통해 아래와 같이 간곡히 독백(獨白)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만 틈을 벌려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당장의 생활상 편리 때문에 우리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행위를 하며 치사하게 살지는 말아야겠다.

  위의 시에서앉은 그 자리지금 놓여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며,여유(餘裕)를 뜻한다.작은 곁이란인간적 유대관계(紐帶關係)의 범위를 의미하는 것이며, 상대방에게속(마음)을 터 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록 현재의 상황이 그다지 넉넉하진 못해도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조금만 여유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시인의 간절한 희망이 너무나도 어여삐 여겨진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요즘 세상에 남에게 무턱대고 아무런 대가 없이 큰 것을 요구하거나 큰 양보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부대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Jesus)님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당신의 몸을 바치고 피 흘려 가며 우리에게 마음속을 터 주는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원천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왕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가족이나 이웃이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생활권의 테두리 안에서 기존의 구성원(構成員)들과 원만하게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어야 할진대, 우선은 작은 것부터 서로 나누고 양보하고 봉사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억지 춘향 식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 새해 설날엔 우리 집 식구들과 두리반상(-盤床)을 가운데 놓고 한자리에 빙 둘러앉아 오순도순 떡국을 먹으며 그 동안 부족했던 덕담(德談)도 따뜻하게 나누고, 내 친구들이나 옛 직장 동료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이웃집 사람들과도 진짜이웃사촌답게 지낼 수 있도록 진심을 담은 새해 인사를 조곤조곤 나누면서 희망찬 내년 한 해를기쁜 마음으로 시작해 보련다.     

 

2013 10 8

 

/ 사진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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