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名詩) 감상

응암역(鷹岩驛) 스크린도어에 나붙어 있는 시(詩) 한 수

noddle0610 2012. 4. 30. 21:38

  

 

응암역(鷹岩驛) 스크린도어에 나붙어 있는 시() 한 수

  

 

 

상 장

조하연

   성명 : 겨울

 

   위의 겨울은 봄다운 봄, 여름다운 여름,

   가을다운 가을을 세상에 내놓으려

   호되게 추운 날씨와 맵게 차가운 바람을 견디어

   봄엔 민들레, 여름엔 잘 익은 수박,

   가을엔 높은 하늘 흰 구름,

   코스모스 들길을 바람 따라 걷게 하고

   끝으로 흰 눈을 흩뿌려 포근포근 감싸주어

   그 따뜻한 마음결에 이 상장을 드립니다.

 

   사계절학교 교장 지 구

 

   짝짝!

  

 

<서울 지하철 6호선 응암역(鷹岩驛) 스크린도어 7-2 전시 작품>

 

 

 

 

나는 요즈음 서울 시내 지하철을 탈 때마다 노상 기분이 좋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 역마다 플랫폼(platform) 스크린도어(screen door)에 으레 나붙어 있게 마련인 시() 한 수씩을 꼬박꼬박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시를 읽다 보면 우선 열차(列車)가 도착할 때까지 지루하지 않아서 좋고, 시를 감상하는 동안에 내 마음속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완연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스크린도어의 시를 읽는 재미에 빠져들면서부터, 나는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남들보다 먼저 승차하려고 조바심하거나 실랑이하지 않게 되었다. 그다지 바쁜 일이 없을 때도 열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거의 습관적으로 남들보다 5분 먼저 가려고 발버둥치던 그 옛날의 내가 이젠 절대 아니다.

너저분한 상품 광고 나부랭이나 무미건조한 주제를 내세운 슬로건(slogan) 대신에 흰색 글씨로 스크린도어에 주옥 같은 명시(名詩)들을 게시하여, 고단한 일상생활에 지쳐 있는 시민(市民)들의 마음을 매일매일 정화(淨化)시켜 주는 지하철 운영자의 조치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이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지하철 승강장에서 시 한 수를 읽었다. 조하연 시인의 상장(賞狀)이란 시였다.

  

상 장

성명 : 겨울

 

위의 겨울은 봄다운 봄, 여름다운 여름,

가을다운 가을을 세상에 내놓으려

호되게 추운 날씨와 맵게 차가운 바람을 견디어

봄엔 민들레, 여름엔 잘 익은 수박,

가을엔 높은 하늘 흰 구름,

코스모스 들길을 바람 따라 걷게 하고

끝으로 흰 눈을 흩뿌려 포근포근 감싸주어

그 따뜻한 마음결에 이 상장을 드립니다.

         

사계절학교 교장 지 구

           

짝짝! 

 

   이 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길이가 짧고, 내용을 이해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했다

전형적 서정시(抒情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어(詩語)의 사용이나 격조 있는 운율 따위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였지만, 내용이 우선 재미있고 공감이 가는 글이라서 전문(全文)을 읽는 내내 나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유난히 춥고 길었던 지난겨울을 보낸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그 여파(餘波)로 올해엔 3월 달에도 백설(白雪)이 난분분(亂紛紛)했었기에, 이제 막상 진짜 봄철을 맞이하게 되니, 그 혹독한 겨울을 이겨 낸 대자연(大自然)과 우리 인간(人間)을 내가 너무 대견스럽게 여겨서일까. 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셸리(Shelly) 선생이 서풍(西風)에 부치는 노래에서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 예언했던 그 불편한 진실을 새삼 실감(實感)하게 되어서일까. 한겨울엔 지긋지긋한 추위가 하루 속히 사라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이러구러 따뜻한 봄철의 환희를 만끽하게 해 준 동장군(冬將軍)님이 차라리 고맙게 여겨져 그분에게 상장(賞狀)을 수여(授與)하려는 조하연 시인의 마음에 나 역시 은근히 공감(共感)해서일까

시를 다 읽고 나서 그 감동적 여운(餘韻)을 천천히 즐기는 동안에 어느새 전동차(電動車)가 플랫폼에 도착하였고, 나는 스크린도어가 열리자마자 곧장 승차(乘車)하였지만 내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넘쳐흘렀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나를 몇몇 승객들은 의아(疑訝)해하는 눈빛으로 쳐다 보곤 했지만, 나는 애써 오불관언(吾不關焉)한 모습을 유지했다.

 

아무튼 삼라만상(森羅萬象)에게 냉혹하기만 하던 겨울은 우리들 곁에서 훌쩍 물러갔다.

사계절의 으뜸인 봄철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한창이렷다. 지난겨울이 너무 추웠기에 지금이 따뜻한 봄철임을 확연히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과거의 시련을 아프게만 기억하진 말고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밝은 현재와 희망찬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하겠다과거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된다는 유명한 잠언(箴言) 구절도 있지 않은가. 무릇 자연의 이치(理致)나 인생의 이치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늘 사계절(四季節)의 변화를 겪고 살아가야 하는 지구(地球)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시()로 표현한 조하연 시인의 유머(humor)와 재치가 무척 기발(奇拔)하면서도 파격적이긴 하지만, 그 시적 의도(詩的意圖)를 우리 독자(讀者)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작품에서 현란한 기교 따위는 부리지 않고 그저 소박하게 표현해 주어서 좋고, 고맙다.

 

나도 이제부터는 지난날에 대해 좀더 너그러워져야 하겠다. 어둡고 아픈 과거,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던 나의 과거가 오히려 약()이 되어 오늘의 내가 존재하도록 한 것 또한 사실이니, 더 이상 쩨쩨하게 과거 탓이나 조상(祖上) 탓 따위는 하지 말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그래서 나 또한 조하연 시인처럼 과거의 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감사장(感謝狀)이라도 써 줄까 보다. 

 

감 사 장

  성명과거사와 가족사

 

 과거사와 가족사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개인적으로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크게 누리진 못했지만 그런대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유자생녀(有子生女)하여 오순도순 살게 된 것은 오로지 나의 과거와 가정 환경 덕분이기에 그 공을 기려서 이 상장을 드립니다.

  

2012 년 4 월 30 일

 

알콩달콩집 주인장(主人丈)  박  노  들

 

 

 

 

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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