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영화 감상

「태조 왕건」 드라마의 사실(史實)과 허구(虛構)

noddle0610 2007. 7. 14. 13:00


「태조 왕건」 드라마의 사실(史實)과 허구(虛構)

사실과 허구를 마구 넘나드는 TV 사극(史劇) 바로 보기


  『고려사실록에 따르면 궁예(弓裔 ?~918)는 반란의 와중(渦中)에 민가(民家)로 피신해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KBS-TV 태조 왕건드라마(drama) 제작진은 드라마 속에서 궁예가 민중적 영웅의 풍모로 묘사돼 왔기 때문에 이런 비참한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영예롭게 목숨을 끊는 쪽을 선택했다. 따라서 궁예는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 때문에 무려 40회나 연장한 120회 부분에 이르러서야 문자(文字그대로 아주 극적(劇的)인 죽음을 맞이했다.


"아우, 부디 성군이 되시게. 성군이..."


궁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는 군부(軍部)에게 쫓겨 가던 궁예가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폭정을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킨 왕건[王建 877~943 : 최수종 분(扮)]과 독대(獨對)를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의 명() 대사(臺詞)이다.


최후에 궁예와 독대한 왕건은 “아우가 맹세하오리다. 함께 가시오소서. 편히 쉬실 곳을 마련해드리겠사옵니다”라고 말하지만 궁예는 이를 거절한다. 이 대목에서 궁예와 왕건으로 분장(扮裝)한 김영철(金永哲 1953~)과 최수종(崔秀宗 1962~)은 마치 신파조(新派調) 같은 대사들을 비장하게 읊조린다.


명성산(鳴聲山) 아래 계곡에서 왕건을 맞이한 궁예는 술잔을 앞에 두고 "자신이 못다 이룬 대업을 이뤄줄 것"을 당부하며 끝까지 따르던 충복(忠僕) '은부[박상조 분()]'에게 어검(御劒)으로 자신을 내려치게 한다. 그리고는 왕건에게 안겨 숨을 거둔다.


드라마 작가 이환경(李煥慶 1950~) 씨는 백성들에게 맞아 죽은 궁예의 최후를 사실과 다르게 신파조 대사로 끝마무리하면서, 그 핑계를 그럴 듯하게 내세웠다. 즉 그는 그만한 삶을 살아온 궁예가 어떻게 그같은 죽음을 맞이하겠느냐면서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고 생각하며 드라마로써 다시 상상을 더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사엔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고, 패자(敗者)는 말이 없게 마련이다. 궁예는 역시 광인(狂人)이었고 폭군이었을 뿐이다. 걸핏하면 사람을 의심하여 죽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둘이나 죽인 폐인(廢人)이자 인간 말종(末種)이었다. 그는 분명 새로운 질서를 이루지 못했고, 왕자(王者)의 능력을 끝까지 보유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왜곡된 궁예의 최후를 시청한 소감을 조규익(曺圭益) 숭실대 국문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말했다.


그의 죽음은 생각할수록 찜찜하다.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민초들에게 맞아 죽은궁예의 죽음이,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에게 걸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비장한 죽음으로 개칠된 사실이 말이다.


드라마 속의 궁예는 만들어진존재다. 시청자들 대다수가 사극을 역사학습의 교재로 삼고 있다는 점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제작자들은 좀더 신중했어야 한다.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민초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록은 승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기에 신빙할 수 없다는 입장이 궁예의 마지막을 비장미로 개칠한 어리석음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역사 진행의 주축은 민초들이다. 숱한 전쟁에서 도륙당하는 것도 민초요, 몇 안되는 지배자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도 민초들이지만, 극 속에서는 그냥 편하게 생략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하찮은(?) 존재들이다. 궁예의 종말을 지켜보면서 이 바닥 민초들 가운데 하나인 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폭력을 휘두르던 지배자가 민초들의 손에 응징당하는 모습이 가감 없이 보여지기를 말이다.


오랜 세월 지배자들의 도구로 말없이 복무해온 이 땅의 민초들은 궁예의 죽음을 통해 모처럼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니었다. 역사의 주인이 민초라는 기대를 배반하고 또 다른 영웅 만들기로 끝난 궁예의 최후가 그래서 더욱 아쉽다.(「일사일언」, 조선일보, 2001.06.02)


이런 소감은 비단(非但) 어른들만 느낀 것이 아니다. 다음 글은 서울 신광여고(信光女高) 3학년 3반에 재학 중인 정고은나래 ()이 한국일보 5 30일자에 투고한 내용인데, '문학' 수업 시간 중 교사의 ‘궁예 역사 왜곡 문제’ 강의를 듣고 나서 자신도 선생님과 동감이라면서 사제간(師弟間)에 서로 공감(共感)한 내용을 교사의 양해를 얻어 아주 간명하고 깔끔한 필치로 요약해서 투고한 것이다.



                               (출처 : 한국일보, 2001 5 30, '1318마당' 게재)


  그렇다. 한때 루마니아(Romania)의 영웅이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대통령 부부의 최후가 생각난다.


소련(蘇聯)의 위성국가(衛星國家)에서 벗어나 자주 노선을 걸으며 국부(國父) 소리까지 들었던 차우셰스쿠가 그의 독재와 부패에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 권좌(權座)에서 쫓겨나 망명하기 위해 도망치다가 부쿠레슈티(Bucuresti) 공항에서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했던 군인들의 총탄 세례를 받고 활주로 위에 참혹하게 벌집 헤쳐진 모습으로 쓰러진 모습이 생각난다.


한때 미륵부처님 소리까지 들으며 민초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궁예가 차츰 백성과 유리된 채 황궁에 들어앉아 독선과 독재 그리고 백성의 생활고를 외면한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다가 원성을 사게 되어 마침내 그에게 열광했던 백성들에 의해 맞아 죽게 된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했던 우리 나라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초대 대통령이 인()의 장막(帳幕)에 휩싸여 결국 민의(民意)의 외면을 받아 '419 학생 혁명'으로 물러날 때, 그 분의 동상(銅像)이 시민 학생들에 의해 넘어지고 새끼줄에 목을 조인 채 서울 시내 거리를 끌려 다닐 때 일이, 이 글을 쓰는 순간 저 궁예와 차우셰스쿠, 그리고 인도네시아 독립의 영웅 수카르노(Sukarno 1901~1970)의 비참한 말년(末年)과 더불어 자꾸 오버(overlap)되어 떠오르는 것은 나변(那邊)의 일인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 주고,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게 하기 위해서라도 소수의 독자(讀者)가 읽는 문학 작품과는 달리 TV 드라마(drama)만큼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하겠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독서량이 부족한 실정인 우리 나라 학생들이나 대체적으로 역사적 지식이 짧은 우리 국민들은 사극(史劇) 전체를 역사 교과서로 알고 진지하게 시청을 하는데, 그것이 진실과 상당히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 모처럼의 사극 시청(史劇視聽) 열풍이 조만간(早晩間)에 수그러지게 될 것이다.


KBS-2TV에서 방영 중인 『홍국영』이 중국 무협 영화처럼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활극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액션물()을 좋아하는 남성 시청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요즈음 『태조 왕건』에 못지않게 인기를 끌고 있는 SBS-TV의『여인천하』에도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제법 눈에 띈다.


예컨대,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이 분명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극중(劇中)에서는 오라버니로 등장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매회(每回)마다 친절하게 탤런트(talent) 이덕화(李德華 1952~)가 등장할 때 화면의 밑부분에 ‘문정왕후의 오라버니 윤원형’이라는 자막(字幕)을 연일 지겹게 띄우고 있는 것 따위이다. 이 드라마의 원작(原作) 소설 『여인천하』의 작가인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선생이 착각하여 오라비라 했던 것을 그대로 사실 여부를 확인도 않고 방송을 하고 있다. 『조선 왕조 실록』이 완역(完譯)되지 않았던 시절에 나온 소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번만 실록(實錄)을 참고하면 알 수 있는 실수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손위 오라버니가 아니라 손아래 동생이다. 하기는 시중(市中)에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연기력이 좋은 이덕화가 윤원형의 캐릭터(character)로 너무 들어맞아 문정왕후 역을 맡은 전인화(錢忍和 1965~)보다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입학 대선배(大先輩)인 이덕화를 남동생으로 분장시키기에 너무 안 어울려 원작(原作) 소설 핑계를 대고 오라비 행세를 계속시킨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저 순진한 아줌마 시청자들이나 초중등 학생들은 평생 윤원형을 문정왕후의 오라버니로 알고 지낼 것 아닌가.


어차피 역사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는 이른바 시청률(視聽率)을 높이기 위한 ‘재미’를 고려해야 하므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어서 만들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실과 너무 동떨어지는 내용의 역사적 왜곡을 ‘조자룡(趙子龍) 헌 칼 쓰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 자행(恣行)한다면 나중에 그 실상實相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될 때마다 그만큼 크게 실망한 시청자(視聽者)들로부터 냉혹하게 버림받게 될 것임을 TV 드라마 제작진(製作陣)들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2001 7 14일 토요일 오후


박   노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