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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가마솥 앞에서

noddle0610 2019. 6. 18. 00:10





버려진 가마솥 앞에서



누군가 길가에 내놓은

옛날 가마솥,


투박하고 덩치 큰

무쇠 솥단지 셋! 


()()() 크기의

옛날 솥 세 개가  


세월의 먼지를 잔뜩 덮어쓴 채

오도카니 길섶에 앉아 있다.

 

오가는 길손들을 그윽이 지켜보며

마치 삼층(三層) 불탑(佛塔)인 양 


세 겹으로 겹친 채 

오늘도 하염없이 앉아 있다. 


지나간 시절

그 숱한 나날 동안 


많은 식구(食口)들과 손님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니를 먹을 수 있게끔 


매일 장작불에 달궈지며

뜨겁게 제 구실을 다 했을 성싶은 


()()() 크기의

무쇠 가마솥들이 


마침내 세월(歲月)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부엌에서 집 밖으로 내쫓겨서 


오가는 길손들을 바라보며

오도카니 길가에 앉아 있다. 


지금 당장(當場집안에

부엌을 새로 들이고 


황토(黃土) 찰흙으로 부뚜막과 아궁이를

그럴싸하게 꾸민 다음에 


참나무 장작이나 잡목(雜木) 땔감을

활활 지펴 준다면,  


저기 저 가마솥에다 흰 쌀밥이나 꽁보리밥을

얼마든지 고소하게 잘 지을 수 있고 


때로는 막걸리 동동주를 빚기 위해

고슬고슬한 술밥을 넉넉히 지을 수도 있으련만!  


대가족(大家族) 식구들과 손님들을 위해

고깃국 나물국 따위를 푸지게 끓일 수도 있고 


한여름엔 노오랗게 익은 찰옥수수도 한 솥 가득 찌거나

늦가을엔 누런 메주콩도 흠씬 삶을 수 있으려니 


어디 그 뿐이랴. 


아들 딸내미 시집장가 보낼 때나

늙으신 부모님 환갑 잔치, 칠순 잔치를 마련할 때 


토종(土種) 돼지 몇 마리 잡아

가마솥 가득히 찌고, 익히고, 끓일 수도 있으렷다 


하얀 눈이 밤새껏 내려 쌓이는 동지섣달 그믐께

집안에서 가장 큰 가마솥에다 국수틀을 걸쳐 놓고 


서리서리 뽑아낸 메밀국수, 막국수 사리를

한 솥 가득히 삶아서 밤참거리로 내놓을 수도 있겠지. 


아아! 지독스레 가난하게 살았던

이십 세기(二十世紀) 중반 시절에  


비록 주먹밥일망정

정성껏 밥을 지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우리 이웃들과 노나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투박하기 짝이 없는 가마솥들이

이 땅에서 우리와 늘 함께했기 때문이리라. 


세월의 변화와 함께 전기(電氣)밥솥을 비롯한

온갖 전기기구(電氣器具)가 부엌에 들어오면서부터 


차츰차츰 밀려나기 시작한 옛날 세간살이가

이젠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에나 가야 볼 수 있거늘 


오늘 세월의 먼지를 잔뜩 덮어쓴

가마솥들을 실로 오래간만에 보게 되니 


그 앞을 지나가던

어느 칠십 대(七十代) 길손이 


문득 옛날 생각들이 모락모락 떠오르는지

우두커니 발걸음을 멈췄도다.

 


2019 6월 초하룻날 

경기도 화정(花井) 교외(郊外)에서





<후기(後記)>


얼마 전, 그러니까 지난 6월 초하룻날 점심시간에 즈음하여 손위 넷째 동서(同壻) 부부(夫婦)와 함께 저희 집에서 가까운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화정(花井)에 있는 단골 음식점을 향해 가던 도중에 그 집 근처의 길섶에 버려진 무쇠 가마솥 세 개를 발견하고 온갖 상념(想念)에 잠긴 일이 있습니다.


1940년대 후반에 강원도(江原道) 산골에서 태어난 저로서는 주로 자그마한 양은(洋銀)솥에만 익숙해 있던 제 또래의 도시(都市) 출신들과는 달리 큼지막한 가마솥에 익숙한 채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날 길가에 내버려진 가마솥을 보자마자 만감(萬感)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집은 그리 대식구(大食口)가 아니었지만, 해마다 농사철에는 우리 동네 남자 어른들의 조력(助力) 내지 ‘울력’에 힘입어서 벼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모내기, 김매기, 추수하기 등 농번기(農繁期)에는 가마솥에다 밥을 아주 많이 지어야 했고, 조상님 제사를 극진히 모시던 유교적(儒敎的) 가문(家門)이라 항상 제사 때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제사음식을 만드느라 가마솥이 하루 종일 식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으며, ‘누에치기’를 할 때는 그 끝 무렵에 가마솥에 누에고치를 푹 삶아서 명주실을 뽑아내야 했기 때문에, ‘소’를 키울 때는 가마솥 가득히 ‘여물’을 충분히 끓여야 했기 때문에 저희 집을 비롯해 농사를 짓는 집들은 모두 솥뚜껑에 기름이 자르르 흐를 정도로 가마솥을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면서 혹여(或如) 깨질세라 혹여 더럽혀질세라 자나깨나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사시사철 가마솥 관리의 시작과 끝은 모두 저희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농촌 출생인 저로서는 아침저녁으로 부엌에만 들어갔다 하면 노상 보던 가마솥이었지만, 1960년대 전반기에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저 홀로 서울에 유학(遊學)을 오면서부터 점차적으로 제 시야(視野)에서 가마솥은 아스라이 사라져갔습니다.


저는 10대 시절 중반기에서부터 30대 중반 나이에 결혼을 할 때까지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자취(自炊) 생활을 했는데,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자취방(自炊房)의 연탄(煉炭) 아궁이 위에다 앙증맞은 크기의 양은솥'을 떡하니 걸쳐 놓고 제가 직접 밥을 끓여 먹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전기밥솥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그것도 아주 훨씬 나중에 전기밥솥은 혼인할 때 제 아내가 일본에 살고 있는 자기 친정(親庭) 이모(姨母)님으로부터 선물 받은‘코끼리표(-) 밥솥’을 혼수(婚需)로 가져왔을 때 난생처음으로 구경을 했지요.


지난 6월 초하룻날 점심시간에 즈음하여 저와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넷째 처형(妻兄) 내외(內外)를 모시고 비록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京畿道) 화정(花井)에 있는 단골 음식점에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우연찮게 길가에 버려진 가마솥 세 개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저는 꽤나 한참 동안 서 있어야 했습니다. 십대(十代) 시절 이후 실로 오랜만에 보게 된 가마솥, 흘러가 버린 저의 어린 시절과 청춘 시절, 소양강(昭陽江)(-dam) 준공(竣工)으로 수몰 지구(水沒地區)가 되어 버린 옛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 집 부뚜막에 놓여 있던 크고 작은 가마솥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 열여섯 나이에 저희 집에 시집 오셔서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홀몸이 되신 채 이 못난 아들 녀석 때문에 재혼(再婚)도 단념하시고 평생(平生)토록 희생적 삶을 사시다가 춘추(春秋) 예순다섯에 소천(召天)하신 우리 어머니 한()마리아 여사(女史)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어느새 우리 어머니가 사셨던 예순다섯 해라는 생애(生涯)보다 더 긴 세월을 여태껏 살아남아 일흔 살을 훌쩍 넘겨 버린 저의 ‘인생살이(人生-)’에 대한 자괴감(自愧感) 내지 무상감(無常感)…… 이런저런 상념들로 해서 저는 길가에 버려진 가마솥 앞에서 꽤나 한참 동안 장승처럼 서 있어야 했습니다.


제 아내는 걸핏하면 저에게 말하기를 인간은 모름지기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항상 진취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야 내일의 희망찬 발전을 기약(期約)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만, 요즘에는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할 날들이 지금껏 살아온 나날보다 짧게 남아서 그런지) 내일(來日)을 꿈꾸기보다는 자꾸 과거회상적(過去回想的)인 생각에 사로잡혀 지낼 때가 더 많습니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옛 사람들, 옛 영광(榮光),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센티멘털(sentimental)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 이른바 사추기(思秋期)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0^;;]


아무튼 지난 6월 초하룻날 저녁에 처형(妻兄)ㆍ동서(同壻) 양주(兩主)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저는 낮에 교외(郊外)에서 우연히 본 가마솥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斷想)들 때문에 감상적(感傷的)인 마음이 되어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답니다.


허허허! 배꽃이 달빛에 더욱 희게 보이고 은하수(銀河水)가 깊은 밤에 오히려 새록새록 보이는 등등(等等)……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종종 애를 태웠다는 옛날 옛적 시인(詩人) 이조년(李兆年 : 1269~1343) 선생이 그날 밤 혹시 저 하늘나라에서 저를 내려다 보시고 웃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2019 6 23 일 밤 삼경(三更)


박 노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