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동본(同姓同本) 사이의 혼인(婚姻)
글 / 박 노 들
법적(法的)으로 허용(許容)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동성동본(同姓同本) 간(間)이라 할지라도 8촌 이상(以上)만 되면 혼인(婚姻)할 수 있습니다.
신라(新羅)나 고려(高麗) 시대까지는 근친혼(近親婚)이 다반사였는데, 고려 말(末)에 중국(中國)의 성리학(性理學)이 도입되었고, 유교(儒敎)를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 왕조 시대부터는 윤리(倫理)의 중요성을 내세워 근친혼을 금지(禁止)시켰습니다.
즉, 사람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지키기 때문에 만물(萬物) 중에 가장 존귀한 존재[天地間 萬物中 唯人最貴]가 되었는데, 남녀유별(男女有別)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윤리가 바로 동물적 성욕의 자제(自制)이고, 그것을 깨트릴 수 있는 요인이 근친혼(近親婚)이므로 이를 금지(禁止)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주 접촉하게 되는 근친간(近親間)에도 남녀유별(男女有別)을 지키게 하기 위해 자녀(子女)들에게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윤리 사상을 철저히 주입(注入)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동성동본(同姓同本) 겨레 역시 각자(各自) 사는 곳만 다를 뿐 한 조상(祖上)을 모신 혈족(血族) 내지 친족(親族)으로 보았기 때문에 근친혼 금지의 연장선(延長線)에서 서로 혼인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동성동본(同姓同本) 사이는 서로 뿌리가 같기 때문에, 혼인을 할 경우 이는 가문(家門) 안에서 지켜야 할 윤리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풍기문란(風紀紊亂)한 일이자, 동물적인 성욕(性慾)을 자제(自制)하지 못하고 금수(禽獸 : 짐승)와 같은 패륜(悖倫)을 저지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국법(國法)으로 동성동본 혼인을 엄금하여 500년 동안 이를 지키게 함으로써 어느 사이에 우리 나라의 전통(傳統)으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박씨(朴氏) 성(姓)을 가진 집안의 경우에는 동본(同本)이 아니라도 무조건 박씨(朴氏)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어서 지금도 '진짜 박씨 성(朴氏姓)'을 가진 집안에서는 불문율(不文律)로 지키고 있습니다.
개화(開化) 이후 모든 백성은 성(姓)을 갖도록 하는 호적법(戶籍法)이 생기면서, 그 이전까지 성씨(姓氏)가 없던 수많은 상민(常民)들이 창씨(創氏)를 하였는데, 생소한 성씨를 붙였다가는 스스로 상민(常民)임을 드러내는 것 같아 새로운 성씨를 만든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남산(南山)에서 종로(鐘路)를 향해 돌을 던지면 박씨 아니면 김씨나 이씨가 돌을 맞을 만큼 대성(大姓)인 '박(朴)-김(金)-이(李)씨' 성(姓)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고려(高麗) 개국(開國) 이래(以來) 명가(名家)로 행세하여 온 실제(實際)의 '박(朴)-김(金)-이(李)씨' 가문(家門)들은 나름대로 가법(家法)과 전통(傳統)이 있어서, 이를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힐 만큼 가르쳤는데, 그 중 하나가 박씨 집안에서의 동성금혼(同姓禁婚)에 대한 철저한 '의식화(意識化) 교육(敎育)'입니다.
박씨(朴氏)는 모두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자손인데, 신라 말기에 경명왕(景明王)이 여덟 분의 아드님들을 대군(大君)으로 봉(封)하면서 밀성대군(密城大君)-고령대군(高靈大君) 등 8대군(大君)의 군호(君號)를 지어 줌에 따라 그때부터 밀성(密城-密陽) 박씨(朴氏)-고령(高靈) 박씨(朴氏) 등(等)으로 여덟 본(本)이 갈라지고 더 분파(分派)를 하게 된 것이므로, 설령(設令) 서로 본(本)이 다르다고 해서 원래의 동족(同族)이 남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서로 혼인을 하지 못하게 이른바 '상피(相避)'의 불문율을 정하여, 대대손손(代代孫孫) 의식화 교육을 행하였습니다.
'상피(相避)'란 서로 피해야 할 혼인이나 성적(性的)인 금기(禁忌) 관계를 일컫는 말인데, 이를 어기고 혼인을 하거나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었을 경우, 이를 가리켜 "상피(相避) 붙다", "상피 나다"라고 말합니다.
정통(正統) 박씨(朴氏)들은 박씨(朴氏)끼리의 동성금혼(同姓禁婚)의 전통을 모르거나 한 번도 자기 부모(父母)에게서 들어본 기억조차 없는 박씨성(朴氏姓)을 가진 사람들끼리 혼인을 할 경우, 이들을 가리켜 상피 붙은 '돌 박가(朴哥)'라고 하여, 그들을 동성(同姓)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습이 있습니다. 즉 박씨의 가법과 전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히 개화 이후 원래 상민(常民)이었던 사람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성씨(姓氏)를 박씨(朴氏)로 삼은 '가짜 성씨(姓氏)', 즉 '돌 박가(朴哥)'라며, 그들을 지칭(指稱)할 때 '박씨(朴氏)'도 아닌 '박가(朴哥)'라고 하대(下待)를 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김해 김씨(金氏)와 김해 허씨(許氏) 및 인천 이씨(李氏) 가문(家門)에도 있습니다. 이 세 성씨(姓氏)의 조상이 모두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옥(許黃玉) 공주(公主)이기 때문에 이 세 성씨(姓氏)끼리는 동성(同姓)이 아닌 타성(他姓)이긴 하지만 서로의 혼인을 피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맏아들은 김해 김씨(金氏)로, 그 다음 아드님은 애처가(愛妻家)였던 수로왕(首露王)이 왕후(王后)인 허씨(許氏)의 성씨(姓氏)를 사성(賜姓)하여 창씨(創氏)하였기 때문에 서로 성씨(姓氏)가 달라진 것이지 그 근본(根本)은 한 조상(祖上)입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의 후손 중 '허기(許奇)'라는 분이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신라 경덕왕의 사신(使臣)으로 중국에 갔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만났는데, 황제가 서촉(西蜀) 땅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할 때 상당수의 당나라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도망을 갔지만 신라(新羅)의 사신이었던 허기(許奇)는 외신(外臣)으로서 황제의 피난을 끝까지 수행(隨行)하여, 나중에 난리가 평정되자 황실(皇室)에서는 이 신라 사신(使臣)의 의리(義理)를 상찬(賞讚)하여 그에게 신라(新羅)의 인천(仁川)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당나라 황제와 동성(同姓)인 이씨(李氏) 성(姓)을 사성(賜姓)하여, 이 분이 그 후 귀국(歸國)하여 새로이 '인천 이씨(李氏)' 가문(家門)을 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천 이씨(李氏) 가문에서는 타성(他姓)인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와의 혼인을 상피(相避)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의 우리 나라는 농경사회(農耕社會) 중심의 국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촌이 씨족(氏族) 중심으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 남녀유별의 윤리 교육과 동성동본 혼인 금지 정책의 철저한 시행으로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성윤리(性倫理)가 초동급부(樵童汲婦)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지켜졌으며, '이슬람(Islam)' 문화권(文化圈)을 제외(除外)하고는 성범죄(性犯罪)가 가장 적은 나라였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불륜이나 패륜 행위를 저지르면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으로 지탄(指彈)과 처벌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매장(埋藏 : ꃚ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
유교(儒敎)의 원산지(原産地)라고 할 수 있는 중국(中國)만 해도 워낙 나라의 덩치가 크고 인구가 많아 '통치 이데올로기(Ideologie)'인 '주자학(朱子學) 이념(理念)'이 방방곡곡(坊坊曲曲)에까지 미칠 수 없었고, '무(武)'를 숭상하는 전통이 있었던 일본(日本)의 경우는 '쇼군(將軍)'과 사무라이(武士)들에 의해 칼로 나라를 통치하여 우리 나라만큼 윤리적(倫理的) 이념이 체제(體制)의 근간(根幹)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빚에 몰리거나 패전(敗戰)할 경우, 처자식(妻子息)을 채권자(債權者)나 적장(敵將)에게 넘김으로써 채무(債務)나 목숨을 보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이 최근세까지도 흔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제(日帝) 시절 만주(滿洲)에 가서 살던 우리 동포(同胞) 중에서 중국인에 대한 채무(債務) 문제가 생겼을 경우 색욕(色慾)이 강한 중국인 채권자가 빚 변제(辨濟) 대신 아내를 넘겨 달라 하여 곤혹을 치른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하며, 일본(日本)의 근세(近世) 영웅(英雄)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경우에는 그가 어릴 때 아버지가 다른 사무라이 영주(領主)와의 싸움에서 패전하여, 성민(城民) 전체와 처자(妻子)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지만, 아름다운 부인(夫人)을 적장(敵將)에게 넘김으로 해서 자신의 핏줄인 '이에야쓰'의 생명과 자신을 따르던 백성들의 떼죽음을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야쓰'는 아버지가 할복자살(割腹自殺)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아름다운 어머니와 함께 적장(敵將)에게 의탁(依託)하여 그의 의붓아들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른 인내심(忍耐心)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마침내 200여년에 걸친 '도꾸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를 열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우리 나라 같으면, 빚을 갚거나 생존(生存)을 위해 처자식을 채권자에게 넘기거나 적장(敵將)에게 처자식을 넘길 경우, 그런 사람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놈이라며 빗발치는 사회적 여론(輿論)의 지탄(指彈)은 말할 나위도 없이 당장(當場)에 국법(國法)에 의해 처단(處斷)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남의 처자식을 돈 대신 요구한 인간 또한 강상(綱常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삼강과 오상)을 어긴 놈이라며, 조리돌림과 돌팔매질을 당하고 처단(處斷)을 받았을 것이고요.
유교적(儒敎的) 윤리(倫理)가 인간을 질곡(桎梏)에 시달리게 하는 면도 다분(多分)하였지만, 어떤 면에서 성범죄나 가족(家族)의 성(性)을 매개로 한 거래(去來)를 사갈시(蛇蝎視)하는 풍토를 조성(助成)하는 데 크게(?) 기여(寄與)한 점만은 현대(現代)를 살고 있는 우리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유교적 윤리가 비록 중국에서 유래(由來)한 것이긴 하나 고려말(高麗末) 이후 600년 동안 완전히 토착화(土着化)되어,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代)까지 생활 윤리의 규범이 되어 왔기 때문에, 법(法)이 바뀌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동성동본 혼인이 확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동성동본 혼인을 한 부부(夫婦)가 소수(少數)에 지나지 않으나, 그 동안 이를 허용하지 않아 동성부부(同姓夫婦)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출생신고가 여의(如意)치 못하였고, 그로 인해 자녀들의 진학(進學) 문제나 의료보험(醫療保險) 가입 문제 등 법적 · 사회적 고충(苦衷)이 너무 많아, 이를 구제(救濟)하는 과정에서 인권단체(人權團體)의 호소와 법률 개정 운동이 먹혀들어 이른바 민주화(民主化)의 일환(一環)으로 법(法)이 개정되었습니다만, 이를 보수적인 기성세대(旣成世代)가 아직도 환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동성동본 혼인이 이루어지려면 앞으로 좀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동성동본 부부(夫婦) 사이에서 기형아(畸形兒)가 태어난다는 속설(俗說)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4촌 이상(以上)의 근친혼(近親婚)이 전통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웃 나라 일본(日本)의 경우, 기형아(畸形兒)나 지진아(遲進兒)의 출생률이 우리 나라보다 몇 배 높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꼭 근친혼 때문인지 여부(與否)는 규명되지 않았으나, 근친혼을 반대하는 단체(團體)에서 즐겨 인용하는 반대 명분의 단골 근거(根據)가 되곤 하지요.
서양 명언(名言) 중에 ‘사랑에는 국경선(國境線)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과연 우리 나라에서는 동성동본 혼인 허용에 대한 윤리적(倫理的) 왈시왈비(曰是曰非)가 언제쯤 사라지게 될 것인지, 그것이 자못 궁금합니다.
2005 년 9 월 1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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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 : Daum 신지식 홈의 '사회, 공공> 상식> 어원, 유래' 항목(項目)에 필자(筆者)가 '한림학사' 라는 ID로 탑재(2005-09-16 20:19)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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