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에게
━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졌다가 기사회생한 후 ━
病(병)이여, 자네
진정 내 친구가 되려나?
내 나이 쉰다섯을
넘기던 해부터
자네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작년부터 부쩍 내게 가까이 다가서는
자네를 보고
각오는 하고 있었네.
내 비록 친구 사귀기 힘든
강원도 감자바위 출신이지만
이제는 그만 까탈 부릴 나이도 되잖았는가.
다가오려면 다가오게나.
더 이상 자네를 피하지 않으리니.
사람들은 자네를 두려워하지만
난 자네가 두렵지 않네.
우리도 서로 사귀고 정이 들다 보면
남은 餘生(여생)이 과히 심심치는 않을 것 같으이.
내 아내와 아이들 셋이
자네를 반기진 않겠지만
명색이 家長(가장) 친구인데
자네를 무시하진 못할 걸세.
그러니 너무 노여워하진 마시게.
내가 자네와 벗하여 인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나서려면
아무래도 ‘정리’의 시간이 걸릴 테니
그 때까지는 내 가족과의 시간을 좀
許與(허여)하여 주시게나.
제발 나한테
성화 부리진 마시게.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는데
망설이는 것처럼
꼴 보기 싫은 것은 없을 걸세.
누구나 자네와 함께 마지막 인생길을 가야 한다면
좋은 친구가 되어 자네와 동행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격조 높은 삶의 정리라는 것쯤은
旣往(기왕)에 깨달은 ‘나’라네.
친구여!
내 식구(食口)들과
이야기를 다 끝낼 때까지
얼마 동안만
우리 집 대문 밖에서
좀 진득하게 기다려 줄 수 없겠나?
진정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동안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았듯이
바로 그대로
조금만 더 지켜 주시게나.
어느 날 그대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면
내가 달려나가 곧바로 그대를 포옹은 못하겠지만
그 때 가서 내가 그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뭬 있으랴!……
내 당당히
그대를 맞이하리니,
우리 그 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 벌겋게 노을 진 저녁 언덕을 향해
함께 걸어 보세나.
2006년 1월 31일 (음력 정월 초사흗날)
병원(病院) 휴게실 PC 앞에서
박 노 들
□ 出典 : 拙稿 ‘병(病)에게’, 畏友 제비의 Daum blog 《우리집 정원》━ 교감 게시판.
http://blog.daum.net/greenhouse1, 2006.01.3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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