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시(追慕詩)

육촌 누이동생

noddle0610 2006. 5. 9. 13:25

 

 

 

육촌 누이동생  


 


1

 

오늘 육촌 여동생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그것도 한 달이나 늦게…….

 

심장(心臟) 약한 내가 충격 받을까 저어한 나머지

이제사 내게 알린 문중(門中) 처사(處事)가 야속ㅎ다.

 

쉰 넷의 나이에

이승을 떠난 누이동생!

 

바로 그 나이에 세종대왕(世宗大王)

이충무공(李忠武公)께서도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분명 요절(夭折)은 아니련만,

 

어이하여

요즘 세상엔

 

50(五十代) 사망이

요절(夭折)로 여겨지는 걸까.

 

2

 

어릴 적 누이와 내가

고향 마을 이웃집에서 살았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나는 부음(訃音)을 전하는

육촌 남동생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채신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 항렬(行列)에서 오라비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세상을 등진 여동생에게

 

이렇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친형제 없이 홀로 자란 내게는

 

가장 빨리 태어난 손아래 여동생이

바로 육촌 누이였기에

 

촌수(寸數)에 상관없이 가까이 지낸

정리(情理)가 생각나

 

소리 내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3

 

몇 달 전에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

가 보았던 나로서는

 

누이동생의 부음(訃音)을 듣고

 

분명 요절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나이 순서와 다르게

 

우리 항렬(行列)에서

 

자기 오라비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세상을 등진 여동생이 마음에 걸려 

 

호곡(號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대구(大邱)로 시집 가 살다가

지난 4월에 갑작스레 죽은

 

육촌 누이를

 

생전에 두어 번 밖에 못 만난

내 아내는

 

낯선 시누이의 부음(訃音)

호곡(號哭)하는 남편을

 

의아(疑訝)해하였다.

 

만약에 우리 누이가

굵고 짧게 이승을 살다가 갔다면

 

남은 사람들이

크게 설워하진 않았을 텐데,

 

이제사 겨우 딸 하나 여의고

 

그래도 개똥밭에 구를망정

저승보다 낫다는 이승을

 

등지고 만

 

육촌 누이의

거칠고 짧았던 삶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서럽게

호곡(號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오늘 육촌 여동생의 부음(訃音)을 듣고

내가 받은 충격은

 

지난 3월 장모(丈母)님을 여읠 때만큼이나 컸다.

 

쉰 넷의 나이에

이승을 떠난 누이동생과

 

구순(九旬)이 다 되시어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장모(丈母),

 

내 곁을 하나 둘 씩 떠나가는

가까운 이들을 보내면서

 

그 어느 해보다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올해 초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 가 보았던 나로서는

 

결코 죽음이 무서워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님을 비롯해

 

베트남(Viet Nam)전쟁에서 전사(戰死)

죽마고우(竹馬故友),

 

꽃다운 나이에 산업재해(産業災害)

죽어간 친지(親知)들에 이어

 

이제 우리 항렬(行列) 손아래 누이동생까지

내 곁을 떠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 사랑했던 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버린 곳에

 

외려 나 홀로 덩그러니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슬퍼져

자꾸 눈물이 났다.

 

죽음이 무서워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2006 5 7 23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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