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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당호(堂號) 시비(是非)에 대한 소견

noddle0610 2006. 6. 8. 02:41

 

사임당 당호(堂號) 시비(是非)에 대한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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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의 '사대주의(?)'중국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은 ´사임당´이라는 호가 마음에 걸려,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삶과 꿈, 데일리안 칼럼(2005-06-10 22:01:08 게재) 내용에 대한 반론(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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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노  들  

 

 과거사(過去事)를 오늘의 잣대로만 가늠하려는 것은 억설(臆說) 아닐까요?


 사임당 당호(堂號)가 우리 나라 어머니가 아닌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를 존경해 지은 이름이라고 해서, 사대주의(?) 같아 마음에 걸리다뇨?


 허허,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의 훌륭한 위인(偉人)이나 성인(聖人)들에 대한 교육도 하지 말아야 하겠군요. 혹여(或如) 아이들에게 사대주의 사상을 길러 줄지도 모르니까요.


 알렉산더(Alexander)는 그리스의 영웅이지만, 러시아의 역대 '차르(tsar)' 황제들도 그를 숭앙하여 알렉산드르 1-2-3 세(世)라 자칭하였고, 사도(使徒) 요한(Johannes)의 이름은 서구(西歐) 여러 나라에서 죤(John), 죤슨(Johnson), 엔센(Jensen), 요한센(Johansen)을 파생시켰으며, 그리스 신(神) '아폴로(Apollon)''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Apollinaire) 이름의 모태(母胎)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使徒)였던 시몬(Simon)의 이름은 프랑스의 비평가 시몽(Pierre, Simon)과 노르망디 출신 영국의 정치가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와 영국 시인 시먼즈(Symons),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남성 보컬이었던 '사이몬과 가펑클'의 일원(一員)인 사이몬(Simon)의 이름을 지구촌(地球村)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하게 하였고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구약(舊約)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제2대 왕이었던 다윗(Dawid)의 이름은 영어권(英語圈)의 데이비드(David)와 데이비(Davy), 데이비스(Davis), 데이비슨(Davisson)이란 이름을 파생(派生)시켰고, 불어권(佛語圈)의 다비(Dabit), 다비드(David), 독어권(獨語圈)의 다비트(David) 등의 성씨(姓氏)나 이름의 원류(源流)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들을 주체성 없는 사람이라거나, 사대주의자라 여기지 않습니다.


 신사임당은 결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발로(發露)에서가 아니라, 요즘 여성들이 국적불문하고 나이팅게일이나 헬렌켈러를 존경하듯이 태임(太任)과 같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자 당호(堂號)까지 '사임당'으로 지었던 것으로 사료(思料)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사임당(師任堂-思任堂)' 당호는 그 분의 시아버지께서 며느리를 위해 별당을 지어 주시면서, 태교(胎敎)로 유명한 태임(太任)과 같은 현모양처가 되라며 손수 지어준 당호라고 합니다. 시아버지 또한 당신의 며느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그녀가 오직 훌륭한 현모양처가 되길 소망하였기에 '사임당'이란 이름을 지 어 주었던 것이지, 고작 집 한 채 이름 지어 주는 일에 무슨 거창한 의도가 따로 더 개재(介在)되었겠습니까.


 중세(中世)의 서구 제국(西歐諸國) 사람들이 라틴어로만 씌어진 고전(古典)을 읽어야 했듯이, 한적(漢籍)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통하여 소양(素養)을 쌓아야 했던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들은 그들 중 누구를 특별히 가려내어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 또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물든 사람이라고 거론(擧論)할 수 없을 만큼 중국 역사에 정통했으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언급된 성현(聖賢)들의 생활을 본받고 생활화(生活化)하고자 했습니다.


 단군(檀君) 이래(以來) 우리 나라의 국력이 최대로 급성장한 오늘날, 우리의 잣대로 가늠해 본다면 다소 아쉬운 감도 없지 않으나, 한국의 축구 신동(神童) 박주영이 프랑스의 '지단' 선수를 흠모(欽慕)한다거나 '아이티(IT)' 분야(分野)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미국의 '빌게이츠'를 흠모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듯이, 훌륭한 인물은 국적(國籍)을 가릴 것 없이 존경하게 되어 있으며, 이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삼천지교(三遷之敎)를 행하여 현모(賢母)의 귀감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단지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가 조선시대 우리 나라 양반(兩班) 집안 여인들의 이상형(理想型)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사임당 당호에 대해 꺼림칙하게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다른 나라 것이라도 좋은 것을 본받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우리가 고개를 흔들고 싶어도 우리 민족 문화는 배달민족 홀로 이룩한 것이 아니고, 동양 문화의 거대한 테두리 속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파급되어 이루어진 것이므로, 외래문화의 영향에 대한 지나친 국수주의적 내지 배타적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시대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지금처럼 한자식(漢字式) 성명(姓名) 3자(三字)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흑치상지, 박혁거세, 석탈해, 을파소, 대조영, 검모잠, 사다함, 윤충, 성충, 흥수, 가실, 계백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 바 4자 성명, 3자 성명, 2자 성명 등 다양했음을 알 수 있고, 성씨(姓氏) 또한 오늘날 보기 힘든 성씨(姓氏)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삼국의 통일과 중국 문화의 유입 및 중국과 북쪽 오랑캐 출신 역대 왕조(王朝)의 무수한 침입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인구(人口)의 유입(流入)으로 고려 중기 이후 완전히 우리 조상들의 이름이 중국식 성명 3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박씨나 김씨 등 극소수의 토착 고유 성씨를 제외한 거개(擧皆)의 성씨가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들의 성씨 아니면, 애초 성씨가 없었던 하층민(인구의 3분지 1 이상)들이 중국식으로 창씨(創氏)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 장군도 평민 출신이라 초명은 성씨도 없는 능산(能山)이었는데, 고려 개국 공신이 되어 태조 왕건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아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은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여 이 나라 최고의 명문(名門)을 열지 않았습니까.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이름에 보이는 '혁거세'는 분명 오늘날과 같은 작명(作名)이 아닌데, 지금 우리 박씨들은 모두 이름을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박정희(朴正熙)' 아니면 '박영수(朴英秀)' 식(式)으로 작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는 그대로이되, '박한별' '박초롱이' '박차고나온노미새미나' 식으로 차츰 바뀌어 나가겠지요.


 실례가 될지 모르오나, 김위원님의 존함 또한 외국인이 보면 중국식 성명과 하등의 구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1992년 8월까지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주한(駐韓) '자유중국(自由中國)' 대사(大使) '진수지(金樹基)' 씨의 성씨도 김씨(金氏)였는데, 조선족(朝鮮族) 출신은 아니더군요. 그 분의 성명 3자와 김위원님의 성명을 한자(漢字)로 나란히 써 놓으면, 서구인들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두 분을 한 집안으로 보지 않을까요?


 시생(侍生)의 비유가 불쾌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시생 또한 외국인이 보면 중국인으로 오해할 수 있는 성명 3자를 지니고 있으니,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온즉, 신사임당의 당호를 대상으로 하여 시비하지는 맙시다.


 신사임당의 당호에만 옥(玉)의 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이름에 티가 있는 걸요.


 유럽인들의 이름은 나라마다 발음만 다를 뿐 철자까지 비슷한 이름이 많고, 아랍인들의 이름엔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이집트나 사우디 또는 이란이나 방글라데시 및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마호멧' '무하마드''알리'가 들어 있어도 누구 하나 그 이름을 옥(玉)의 티로 생각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위원님의 글을 읽고 깨달은 점이 많습니다. 시생이 오늘 말씀드린 논지(論旨)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론(現實論)에 입각해서 말씀드린 것이고, 실은 김위원님 글을 읽고 나서 앞으로 시생의 후손 이름은 좋은 뜻이 담긴 순 한글 이름으로 지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족(蛇足)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요즘 순 한글 이름인 가수(歌手) '장나라'가 중국에 가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용(龍)사마' 못지않게 중국인들에게서 '천후(天后)'란 존호(尊號)까지 받았다는데, 과연 중국인들은 그녀의 이름 '나라'를 한자(漢字)로 어떻게 표기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사람의 이름엔 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서구인들에게는 기독교적 색채가, 아랍인들에게는 아슬람적 색채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엔 중국적 색채가, 그리고 한국인(韓國人) 50대 이상의 세대(世代) 이름에는 일본 식민지 통치의 잔재(殘滓)인 '-웅(雄), 부(夫), 랑(郞), 산(山)' 자(字)가 남아 있고, 우리 나라 중년 이상(中年以上) 여자들의 경우에는 '미자(美子), 정자(貞子), 명자(明子)'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직도 숱한 '요시꼬''사다꼬' '아끼꼬'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는 바, 이름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 민족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받아들인 외래문화 수용을 아직 우리 자신들마저 많은 자체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 무조건 과거 역사를 사갈시(蛇蝎視)하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어떤 이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란 책까지 써서 지금의 잣대로 과거사를 모조리 비틀어 보려고 합디다만, 그것이 전부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꼭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우리 민생(民生)이 한가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우리 민족 문화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좀 긍정적으로 넉넉하게 해석해서 한꺼번에 개혁할 것이 아니라 집을 보수(補修)하듯이 '보수'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신숙자(申淑子)나 신춘화(申春花) 또는 신말숙(申末淑) 같은 이름보다는 신사임당(申師任堂-申思任堂) 같은 멋진 이름을 가진 분의 훌륭한 그림이 새 돈에 실린다니, 저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그 돈의 그림 내용을 설명하며, 자랑하고 싶습니다. 비록 중국의 주자학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성리학을 대성한 이율곡 선생과 그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시서화(詩書畵)의 세계 및 자녀교육에 대해서 말입니다.


 각설(却說)하고, 시생의 글이 너무 장황하게 길어진 감(感)이 있습니다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김위원님 고견(高見) 가운데 이것만은 꼭 짚고 졸고(拙稿)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김위원님의 옥고(玉稿) 말미(末尾)에서 신사임당의 아드님 이율곡(李栗谷) 선생을 '소중화(小中華)'에 젖었던 인물로 언급(言及)하였는데, 이 율곡 선생은 주자(朱子) 등(等)의 호발설(互發說)을 비판하여 새로운 이기설(理氣說)을 내세운 분으로서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확립하였으며,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을 만들어 백성을 이롭게 하려던 분이었고, 왜구(倭寇)의 발호(跋扈)를 예견(豫見)하여 '십만 양병(十萬養兵)'을 주장했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는 덕수 이씨(德水李氏) 19촌 숙질간(叔姪間)으로 일찌감치 그의 장재(將材)를 알아보았으나 당신이 판서(判書)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팔품(從八品) 하급(下級) 무관(武官) 이순신을 친척(親戚)이라는 이유 때문에 직접 고위직에 등용은 못했지만, 충무공과 가까웠던 도승지(都承旨) 유성룡(柳成龍)에게 "장차 삼한(三韓)을 구할 인물이니, 후일 기회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일러 두어, 임진왜란(壬辰倭亂) 전년(前年)에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발탁하게 하여 미래의 국난(國難)을 미리 대비하게 한 위인(偉人)이십니다.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누가 보아도 율곡(栗谷)은 애국(愛國) 애민(愛民)하던 자랑스러운 한국인(韓國人)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소중화(小中華)'에 젖은 인물로 간주하기엔 어딘가 석연(釋然)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시생이 생각하기엔 김위원님이 율곡 선생의 전부(全部)를 살피지 않고 어느 일면(一面)만 보고 너무 가벼이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젖은 사람으로 치부(置簿)하는 것 같아, 상당히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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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김위원님의 옥고(玉稿)를 감명 깊게 읽는 사람이오니, 오늘 졸고(拙稿)에서 본의 아니게 용훼(容喙)한 점이 있다면, 그냥 허허 웃으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여불비례(餘不備禮) ━━━━━

 

 

   이 글은 필자 '강원생'이라는 ID '인터넷 신문데일리안' '삶과 꿈' 코너(2005-06-10 19:25:43)반박(反駁) 댓글 투고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