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아버지와 같으셨던 스승님을 그리며

noddle0610 2007. 5. 15. 01:46

 

 

 

아버지와 같으셨던 스승님을 그리며

                        

/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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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스승님을 師父님이라 일컫기도 했었다. 아버지와 같이 우러러 존경하는 스승이란 의미에서 일컬었던 尊稱이었다. 이 말을 지금은『九雲夢』같은 古代 小說類 아니면 中國 武術 映畵에서나 口語(입말)로 對할 수 있어서,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란 의미의 스승님이란 존칭도 이제는 古語化하여 口語로는 거의 안 쓰는 낱말이 되고 말았다. 스승님이나 師父님이란 존칭은 이제 過去 속으로 사라져 간 그리운 낱말들이 되고 말았다.

  筆者가 대학을 다니던 1960年代 後半期만 해도 교수님들에 대한 호칭은 스승님의 전통적 입말(口語)선생님이었다. 입말은 선생님이었지만, 우리 학생들에게 비쳐진 교수님들의 이미지(image)는 전통적인 師父님이시자 스승님들이셨다.  

  그 때, 筆者의 母校인 ○○大學校 國語國文學科에는 學界에서도 아주 錚錚한 분들이 敎授陣을 構成하여, 갓 入學한 우리 新入生들을 가슴 설레게 하였다. 現代 評論文學의 泰斗이셨던 白鐵 스승님, 國語國文學會를 창설하신 바 있는 古典文學의 友鶴 梁在淵 스승님, 『古語辭典』編纂과『東國正韻式 漢字音 硏究』刊行으로 學界에서 이미 큰 위치를 차지하고 계셨던 蘭汀 南廣祐 스승님 等이 바로 그분들이셨다. 그 當時, 蘭汀 선생님께선 國文科 主任敎授(지금의 學科長 敎授)로 在職中이셨다.

  蘭汀 선생님께선 筆者가 대학에 갓 入學하였을 때에도 主任敎授이셨고, 필자가 軍服務를 마치고 復學하였을 때에도, 卒業할 때에도 우리들의 主任敎授이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선 筆者를 졸업시키시자마자 이듬해 봄에 다른 大學校 師範大學長으로 가셨으니, 結果的으로 筆者는 선생님의 ○○대학교 마지막 弟子인 셈이다.

  筆者에게 있어서, 선생님은 요즘 대학생들처럼 그저 儀禮的으로 교수님이라고 불러 드리기엔 너무 큰 스승님이시자 진정한 의미의 師父님이셨다. 마음 속으로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바치는 것조차 罪悚하게 여겨질 정도로 巨人이셨던 어른…….  이런 표현을 선생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했다면 筆者를 阿諛苟容하는 小人輩라고 흉보는 분도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따로 謝恩의 술 한 잔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였으니…….  

       

 

  1960年代만 해도, 大學 敎授는 學問的 權威말고도 當時까지 君師父一體라는 儒敎 文化的 傳統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한 집안에 있어서의 家父長과 같은 至嚴한 師父로서의 威嚴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가 學問과 講義는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師表를 보여 주신 蘭汀 선생님의 경우, 학생들은 無條件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국문과의 學風 形成은 아무래도 學科 運營의 責任을 맡고 계셨던 蘭汀 선생님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主任敎授이신 선생님께선 勉學 雰圍氣 造成을 위해 每月 학생들에게 빠짐없이 實力考査를 치르게 하셨다. 말이 실력고사였지, 사실은 定期的인 月例考査였다. 그 때도 지금처럼 定期 考査는 한 學期에 中間考査와 期末考査를 각각 한 번씩 치르게 되어 있었지만, 우리 국문과는 全大學 唯一의 月例考査를 實施하여 막상 학생들로서는 負擔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弟子들의 實力 向上을 위해 主導하시는 일인데, 그 누가 감히 싫다고 拒逆할 수 있으랴?…… 考査 實施 後에는 반드시 採點 結果를 個人別로 알려 주셨고, 優秀 學生들 名單을 複道의 左右 壁 上段에 榜文 붙이듯이 揭示하셨다. 學年別 시험이 아니고 全學年 共通 試驗이라서 低學年 때에는 先輩들을 제치고 後輩들 이름이 가끔씩 優秀者 名單에 올라 우쭐해 한 적도 있었지만, 高學年이 되고 나서는 후배들에게 밀릴까 봐 밤새껏 공부를 해야 했다. 실력 고사 시험 범위는 미리 豫示해 주셨기 때문에 具體的으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지금도 선생님의 細心하신 配慮에 머리가 숙여진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공부를 참말로 많이 시키셨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엮으신『새 精選 古典』이란 冊子에 나오는 原文을 全部 語學的 註釋을 달고 뜻풀이를 하도록 宿題를 내주시어, 더운 여름 放學 中에 비지땀 흘려 가며 同期生들과 함께 숙제를 풀던 일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記憶난다. 朴正熙 大統領 三選 改憲 反對 데모(demo)로 인해 休校令이 내려졌던 해의 일인데, 그 해에는 잦은 휴교령으로 인해 正常的인 講義는 1年 동안에 통틀어 3個月도 제대로 못 하였지만, 우리 국문과 학생들은 이른바 家庭 學習을 통해서 정상 강의 때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선생님께서 여러 교수님들을 督勵하시어 엄청나게 많은 分量의 課題를 내주셨던 것이다.  그 때 공들였던 課題帳이 짐은 되었지만 버리기에 너무 아까워서, 筆者는 大學 卒業 後 숱하게 移徙를 다녔으나, 지금껏 그 과제장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正常 講義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長江大河와 같으신 名講義로 우리 제자들을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셨지만, 그냥 一方的인 강의만 하신 것은 아니고, 자주 無作爲로 指名을 하시어,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月印千江之曲』이나『釋譜詳節』,『龍飛御天歌』등에 대한 講讀을 하도록 시키셨다.

  國文科의 特性上 大部分의 학생들은 졸업 후 中高敎 敎師로 進出을 하게 마련인데, 선생님의 강의를 받은 우리 同期生들은 지금도 선생님의 嚴父와 같으셨던 가르치심 德分에 一線 敎壇에서 실력 없는 선생이란 소리는 듣지 않고 있다.

  筆者는 個人的으로 선생님의 力著이신『古語辭典』補訂版 刊行을 위한 準備 作業에 參與할 기회가 있었는데, 軍에 入隊할 때까지 선생님께서 蒐集하신 古語 資料를 카드(card)化하면서 많은 古語들을 接해, 졸업 후에 高等學校에서 古文 指導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필자를 爲始해 못난 제자들을 薰陶하시느라 무척 애를 쓰셨던 것 같다. 學科 工夫보다 課外 活動(文學 同人會 活動 · 學生會 會長 選擧 運動 等)에 열심이었던 필자를 붙잡아 두시고자, 실력이 형편없이 모자란 이 못난 弟子에게 『古語辭典』補訂版 準備 作業에 참여하도록 하셨고, 필자는 선생님의 威嚴에 눌려 軍에 入隊할 때까지 꼼짝없이 古語 카드(card)와 씨름을 해야 했는데, 필자에게는 몹시 버거웠던 그 일이 大學 卒業 後 大學院에 進學하여 古典을 專攻하고 남을 가르치는 일을 平生의 業으로 擇한 以來 아주 큰 힘이 되었음은 毋論이다. 그 때 古語 카드 作成員들 中에는 在學生 以外에 軍에서 除隊한 復學生도 있었는데, 복학생이 끼어들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緣由가 있었다. 古語 카드 作成組가 구성되기 바로 얼마 전에, 재학생과 복학생들 사이에 先後輩 待接 問題로 衝突 事件이 있었는데, 서로 間에 여전히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는 걸 아신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和合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配慮하셨던 것이다. 學科 工夫보다 課外 活動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3학년에 進級하자, ○○大學校 學報였던 大學新聞의 責任을 맡고 있는 분으로부터 學報 4면(四面) 즉 文化面을 擔當해 달라는 提議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所屬 學科 주임교수님의 許諾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蘭汀 선생님께 新聞社의 文化部長으로 特採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그럴 바에야 아예 新聞放送學科로 進學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國文科에 入學했느냐고 크게 叱責하시면서 허락을 영 안 해 주시는 것이었다. 當時 學報 主筆이셨던 崔埈 교수님께 손수 電話를 하시어 不許 通報를 하시고는, 大學 4 年은 전공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外道할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해 장차 훌륭하고 실력 있는 先生님이 되라.는 要旨의 말씀으로 필자를 誨諭하시는 것이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던 필자는 嚴父와도 같으신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때로는 謹嚴하게, 때로는 慈愛로서 제자들을 상대하시고 걱정해 주시는 분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 제자들은 蘭汀 선생님을 畏敬의 대상으로 우러르며, 감히 선생님 앞에서 딴마음들을 먹을 수가 없었다.

  學報社 記者가 되기를 抛棄한 필자는 전공 공부에 매달리면서, 한편으로는 마침 學科에 助敎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後任으로 당시 國文科 大學院生(李明宰 現 ○○大 敎授님)이 결정될 때까지 相當期間에 걸쳐서 主任敎授님의 일을 도와 드리게 되었다. 선생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면서부터 필자는 그 동안 皮相的으로만 알고 있던 蘭汀 선생님에게서 그저 단순한 敎授像이 아닌 아버지와 같으신 스승像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弟子들의 學力말고도 家庭環境, 性格의 長短點, 交友關係 等까지 훤히 꿰뚫고 계셨으며, 특히 4學年 弟子들의 就業 問題에 對한 關心이 至大하셨다. 敎育界 知人들에게 隨時로 電話를 통해 제자들의 就業을 付託하시거나, 直接 제자들을 위해 關係 人士를 만나시는 等 번거로움을 마다 안 하시는 것이었다. IMF 時代인 요즈음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금방 就業하기가 어려운 때였던 當時에, 우리 國文科 就業率은 文科大學內에서 最高였었다. 오죽하면 國文科와 가장 가까운 이웃 學科였던 英文科 학생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다못해 或者는 國文科 編入까지 考慮했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의 공부나 進路에만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人性涵養과 禮儀凡節에도 恪別한 관심을 두시어, 仔詳하게 챙겨 주셨다. 어떤 제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거나 道理에 어긋난 失手를 저지르면, 반드시 질책을 하시되 두고두고 미워하지 않으셨으며, 예의에 어긋난 言行을 하는 제자가 있으면 特有의 卽席 講義로 바로잡아 주셨다.  어느 해인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으나, 선생님께서 眼疾에 걸리신 적이 있었는데, 우리 同期生 가운데 촉새같이 촐랑거리기 잘하는 한 친구가 대뜸 선생님 눈알이 빨개지셨네요.라고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선 이놈 봐라,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허허허! 그럴 땐, 눈이 충혈되셨다고 해야지. 이 녀석!이라고 대꾸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 날, 우리들은 蘭汀 선생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히 들었을 법한,


  나이보다는 연세(年歲)’, 춘추(春秋), 아프다보다는 편(便)찮다, 나 이빨보다는 치아(齒牙)가…….


  等의 言語禮節에 關한 講義를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의 失言을 薰陶를 통해 깨우쳐 주셨던 것이다.

  필자도 선생님 앞에서 촉새 친구와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어른 앞에서 酒道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필자는 어느 날 선생님 宅을 친구들과 함께 찾아갔다가 술을 주시기에 한 盞 받아 들고 약간 몸을 돌린 채 마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선생님께 술잔을 올릴 때 왼손잡이도 아니면서 無心히 왼손으로 盞에다 술을 따라 드렸다. 이 녀석, 祭祀床에 술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왼손으로 하다니…… 쯧쯧! 하시면서, 선생님께서는 그 특유의 哄笑를 터뜨리신 후에, 어른 앞에서의 酒道에 관해 一場 講義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필자는 술자리에만 가면, 그 때 선생님 앞에서의 缺禮를 떠올리곤 한다.

  술자리 逸話를 애기하다 보니 또 떠오르는 것은 선생님께선 恒常 旺盛하신 硏究 活動과 各種 學會 活動 및 講義 · 講演 以外에도 國漢文 混用 敎育 運動 等으로 아주 바쁘셨지만, 可及的이면 우리 제자들과 師弟同行하시려고 애쓰셨다는 점이다. 新入生 歡迎會, 學年別 野遊會, 學科 體育大會, 文科大學 體育大會, 各種 學生 學術行事에 不參하신 적이 거의 없으셨고, 行事 後 으레 이어지게 마련인 술자리에서는 平素 선생님을 어려워하기만 하던 제자들에게 胸襟을 털어 놓으시며 特有의 傑傑하신 웃음으로 座中의 雰圍氣를 薰薰하게 만드셨다. 그런 자리에서 으레 일어나게 마련인 一部 술 취한 제자들의 철없는 망나니짓까지도 後日의 傳說로 바래지도록 넉넉하게 다 받아 주셨다. 선생님은 實로 局量이 크신 大人이셨다. 선생님께서 TV에 여러 차례 出演하셔서 한글 專用 問題’ ‘國漢文 混用 敎育 問題로 討論을 하셨을 적에, 선생님의 反對 討論者가 興奮하여 途中에 退場을 할 만큼 토론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相對方보다 먼저 흥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大笑하시는 것을 보고, 그 때도 필자는 蘭汀 선생님께서야말로 참으로 局量이 큰선비시란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同期生들은 모이기만 하면, 각종 행사 뒤풀이에서 있었던 선생님과의 逸話와 TV 討論時에 선생님이 보여 주신 毅然하셨던 모습들을 巨人의 傳說을 이야기하듯이, 자랑스러운 武勇談을 이야기하듯이 中心話題로 떠올리곤 한다. 어디 그뿐이랴. 名門 大邱師範 出身이신데다가 往年에 初等學校 선생님을 歷任하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體育大會時 학생들과 함께 蹴球나 排球 競技에 꼭 參加하시어 猛活躍하시던 모습이며, 間或 드물게나마 어떤 때는 손수 風琴을 치시면서 女學生들과 함께 노래도 들려 주시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셨던 일들을 선생님의 ○○大學校 막내 제자들은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記憶하고들 있다. 제자들의 就職을 위해서라면 멀리 地方에까지 同行하여 주셨던 선생님, 제자들의 여러 가지 哀歡이 섞인 얘기를 다 들어 주시고 助言을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 숱한 제자들의 婚姻 主禮를 조금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기꺼이 맡으셔서 懇曲하신 말씀으로 祝賀를 해 주셨던 선생님께서야말로 師弟同行의 아름다운 정신을 師表로서 實踐해 보여 주신 참스승님이셨다.

  필자가 蘭汀 선생님을 참스승님으로 心悅誠服하게 된 또 하나의 逸話가 있다.

  軍에서 除隊한 後에도 선생님의 일을 도와 드리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선생님의 私的인 일이 아니고 國家的인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1970年代 初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當時 國會 文公委員會의 委囑을 받아 文公委員長이셨던 劉鳳榮 議員의 主管 아래 蘭汀 선생님께서 「大學生의 國語實力 調査」를 하시고, 이를 數個月에 걸쳐서 統計分析하여 冊子로 國會에 報告한 然後에 다시 新聞會館 講堂에서 報告 및 講演會를 한 적이 있다. 이 조사는 서울大, 延世大, 高麗大, 中央大, 慶北大 등 全國 12個 大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그 때 필자는 母校와 淑明女大, 祥明女師大 4학년 학생들 20餘名으로 이루어진 分析 팀(team)을 이끌고, 여러 달 동안에 걸쳐「大學生의 國語實力 調査」에 應했던 設問紙 答案을 採點하고 統計分析 · 綜合하는 일을 하였는데, 일의 內容도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率直하게 말해 當時로서는 큰돈에 해당하는 報酬를 받게 되어, 선생님의 필자에 대한 配慮에 內心 感激해 마지아니하였다. 모든 統計分析 作業을 다 끝내게 되자, 劉鳳榮 議員께서 그 동안의 勞苦에 고마워하시면서 蘭汀 선생님과 필자, 그리고 分析 팀(team)의 一員이었던 필자의 大學後輩 姜錫潤 君(現 慶北 浦港市 某高校 校監)을 조촐한 韓定食 집으로 招待하시어 한턱 내셨다. 朝鮮日報 主筆을 歷任하신 元老 言論人이시자 白山學會 副會長을 兼任하셨던 元老 史學者 劉鳳榮 議員의 午餐 招待를 받았다는 事實만으로도, 當時 年少沒覺했던 필자와 姜君으로서는 充分히 興奮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날 午餐을 끝내고 劉議員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일어났던 일인데,  劉議員께서 우리들에게 손을 내미시며 열심히 공부하여, 훗날 여기 계신 南博士님보다 더 훌륭한 學者가 되라.는 德談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 後輩 姜錫潤 君이 謙讓의 뜻으로 議員님, 저희들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도저히 우리 선생님을 따를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니, 그 말은 謙辭가 아니라 솔직한 우리의 心情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때, 蘭汀 선생님께서 聽罷에 성을 내시며 姜君을 크게 나무라셨다.

 

  이놈아, 靑出於藍이란 말도 못 들어 보았느냐? 四寸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소리는 들어 보았어도, 제 子息이 나보다 잘 되거나 弟子가 나보다 出世를 해서, 그 때문에 배 아파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느니라. 나만 못한 제자를 가르칠 바에야 무슨 보람으로 先生 노릇을 할까?


  大綱은 이런 內容의 나무람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께서는 靑出於藍의 뜻을 昭詳히 일러 주시는 것이었다. 그 날,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는 바람에 姜君과 필자는 좀 머쓱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참스승님으로서의 선생님의 眞面目을 비로소 確然히 알게 되어, 절로 선생님 앞에 고개가 숙여짐을 느꼈다. 대학 졸업 후, 어느 새 知命의 나이가 넘도록 남을 가르치는 일에 從事해 온 필자는 가끔씩 放送이나 新聞을 通해 필자의 제자가 有名人이 되어 있는 모습을 對하게 될 때마다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다가도, 26年前 그 날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며 靑出於藍의 참뜻을 가르쳐 주시던 일을 문득 떠올리고는, 學問뿐만 아니라 사람의 姿勢나 道理까지 일깨워 주신 큰스승의 가르치심에 새삼 再三 고개를 숙이곤 한다. 

  

3


  선생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이런저런 過去之事들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蘭汀 선생님께서야말로 그저 敎授님이라고만 불러 드리기엔 너무 큰 스승님이시자, 진정한 의미의 師父님이셨다고 생각된다. 마음 속으로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바치는 것조차 罪悚하게 여겨질 정도로 巨人이셨던 어른…….

                     

  別世하시기 直前 무렵, 患候中이심에도 不拘하고 나라의 語文政策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걱정하시어, 高建 國務總理에게 衷情 어린 呼訴文을 보내신 일은 蘭汀 선생님만이 보여 주실 수 있었던 大學者로서의 마지막 모습이시자, 象牙塔 속에 安住한 채 行動하지 않는 蒼白한 知性들과는 對照的인 憂國志士로서의 마지막 모습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언론의 큰 反響 속에서 國民들에게 잔잔한 感動을 주시면서, 우리 제자들 곁을 떠나가셨다. 哀悼해 마지않는 後學들에게는 敎外別傳의 독특하신 방법으로 진정한 학자적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일세.” 하시면서, 그렇게 떠나가셨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恪別한 恩顧를 입은 필자는 마치 아버지를 여읜 느낌으로 선생님의 諱音에 接했었는데,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이렇듯 追慕의 글을 쓰게 되니, 새삼 선생님이 그리워져서 마음이 무척 愁愁롭다.    



                                   1998515스승의 날



出典 : 拙稿, 蘭汀 南廣祐博士 追慕 文集 《蘭汀의 삶과 學問》, 韓國語文敎育硏究會, 1998.12.1, PP.5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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