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가을과 문학(文學)

noddle0610 2007. 10. 20. 23:24

 

 

      예전에 써 놓아 둔 수필(隨筆)

 

가을 문학(文學)

                                   

 

 

   

 

 1. 가을의 문턱을 넘기고 나니

 

 문득 붓을 드니 가을이 깊어 가는 소리 들리네.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 밤이면 뜻있는 이들 책장 넘기는 소리 얼핏 들리는 듯도 하다.

 붓을 든 자(者)의 온갖 회포(懷抱)를 글로 풀어 쓰기에는 가을밤이 너무 짧건만, 어떤 이는 자신의 필력(筆力)이 모자라서 그냥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구나.

 수확의 충만함, 다가오는 겨울맞이, 교차하는 계절에 슬쩍 스며드는 허전한 마음그늘이 노란 단풍 잎사귀와 더불어 자꾸 바람에 흔들거리는 이유 때문일까?……

 이 가을을 그냥 보내기에는 무언지 아쉬워서 책장을 뒤적거리고, 무언가 골똘히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오고 글발도 생각만큼 잘 서지 않는구나.

 봄여름 내내 찌들었던 마음이 서늘한 가을바람을 너무 많이 탄 까닭인가 보다.

 

 

 2. 가을에 하고 싶은 이야기

 

 빈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 하듯이, 으레 가을이 되면 계절이 주는 분위기로 인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글깨나 배운 사람이라면 책을 가까이하게 마련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책을 열심히 읽던 사람들조차 예전에 비해 그 열도(熱度)가 식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연례행사처럼 가을만 되면 각종 매스미디어(mass media)와 각급 학교(各級學校)의 독서 캠페인(campaign) 덕분에, 누구나 가을하면 독서의 계절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을 한다.

 왜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할까?

 봄철에는 한 해를 시작하는 분주함 때문에 미처 책을 읽을 여유가 없을 것이고, 한여름에는 섭씨(攝氏) 35도(度)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로 인해 어딘가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며, 가을이 되어서야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며 비로소 독서를 통한 정신적 충만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대학입시(大學入試)의 논술 시험 비중 강화로 인해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들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여, 그들이야말로 바야흐로 가을을 맞이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독서의 계절을 피부로 실감하게 된다.

 책은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정신의 양식이 될 수 있고, 지식의 기반이 될 수 있는데, 아무리 입시를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성화에 의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독서가 과연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다소(多少) 의문스럽다.

 

 이왕 독서의 계절을 맞아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권장할 바에는 처음부터 입시(入試)와 결부한 딱딱한 교양서적을 읽게 할 것이 아니라 우선은 문학서적을 가까이 하여 독서에 취미를 붙이도록 권유하고 싶다.

 

 역사의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만인의 심금을 가장 많이 울린 책은 문학서적들이다.

 문학의 세계에 담겨진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 희한(稀罕)하면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서(情緖)의 세계는 깊어 가는 가을에 붉게 물드는 단풍(丹楓)잎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을 아름답고도 정치(精緻)하게 흠뻑 물들여 놓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문학작품은 꼭 밤새워 읽지 않아도 좋다. 청명(淸明)한 날씨에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야외(野外)도 좋고 공원(公園)도 좋고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가을은 봄날처럼 춘곤증(春困症)도 없고 가슴 설레는 계절도 아니지만, 수확과 성숙의 시기여서 그런지 정서(情緖)가 매우 안정되고, 날씨가 무덥지도 춥지도 않아 차분한 마음으로 아무데서나 책을 읽을 수가 있어서 좋다. 

 딱딱한 이론(理論)이 아닌 우리가 일상(日常)으로 느끼는 것들과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허구(虛構)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바로 문학의 세계이므로, 아무 곳에서나 큰 부담 없이 편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어 좋다.

 문학작품은 전문적인 학술 논문과는 달리 때로 방바닥에 드러누워 읽을 수도 있고, 그냥 엎드려 읽어도 된다. 그만큼 부담이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의 세계이다.

 이모저모로 문학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절이 바로 가을이므로, 이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올해부터는 지금까지와 달리 우리 모두 인생의 자양분(滋養分)을 공급해 주는 문학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보자. 

 누가 맨 처음 말했는지 모르지만 가을을 흔히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별다른 수확 없이 가을을 헛되이 보낸 사람들이 한 말임에 분명하다.

 풍성한 가을걷이를 한 농부는 늦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결코 감상(感傷)에 젖지 않는다.

 올 가을에는 우리도 알찬 독서로 정신의 알곡을 충만하게 거두어서 좀더 여유로운 마음의 눈으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관조(觀照)하고 음미해 보자.

 그리고 당신(當身)이 관조하고 음미한 내용을 크게 욕심 부리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몇 줄 씩만 간략한 글로 옮겨 적어 보자.

 큰 문장가가 되겠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진솔하고 순수하게 아름다운 당신의 글을 얻을 수 있다.

 

 이 가을에는 독서를 통하여 문학의 세계와 가까워지고, 올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비문학(非文學)의 세계까지 충분히 섭렵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독서 습관을 한번 길러 보자.

 

 

 3. 가을이 주는 의미

 

 문득 옛 시인의 글귀가 생각난다.

 

  彩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悠然見南山  조용히 남산을 바라보니,

  山氣日夕佳  해질 무렵 산 경치는 아름답고

  飛鳥相與還  나르는 새는 짝지어 함께 둥지로 돌아가니,

  此中有眞意  이 가운데 참다운 의미가 있어

  欲辨已忘言  말하고픈 심정이 떠오르나 문득 할 말을 잊었네.

 

                                           ━━━━ 도연명(陶淵明 : 365-427)

 

 옛 시인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인 저녁노을이 질 무렵에 둥지로 돌아가는 미물(微物) 의 모습을 관조하고 그 가운데서 의 참다운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는데, 우리도 이 가을이 깊어 가는 것을 보고 마냥 얄팍한 감상(感傷)에만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사소(些少)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를 깨우쳐서 좀더 완숙(完熟)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문학과 독서가 계절을 탄다면 우스갯소리로 여기겠지만, 가을이 깊어 가는 모습을 눈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이 좋은 계절을 그냥 헛되이 보내지 말고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문학과 독서에 빠져들어, 가을이 우리 인생에 주는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건듯 부니 내 서안(書案) 위에 놓인 책도 이젠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문득 붓을 드니, 어느 사이에 새벽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겠네.

 아뿔싸! 읽으려던 책도 못다 읽었고 글도 마음에 쏙 들게는 못 썼지만, 괜스레 가슴이 뿌듯하다. 그 까닭은 나변(那邊)에 있을까?……

 

 

2005 10 15 토요일 밤 새벽 3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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