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사람이 저 소만큼도 못함을 슬퍼하노라

noddle0610 2007. 10. 4. 15:25

 

사람이 저 소만큼도 못함을 슬퍼하노라  

 

황희(黃喜) 황정승과 시골 밭갈아비의 겨릿소 이야기 유감(有感)

 


/  박   노   들  

 

 

  ‘우덕송(牛德頌)은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선생의 명수필(名隨筆) 제목(題目)입니다. 저 역시 춘원(春園) 선생 못지않게 소를 좋아하고 소의 정직하고 근면한 성품, 아니 사람보다 더 고결한 소의 덕성(德性)에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매료(魅了)된 사람이라, 오늘은 소를 예찬(禮讚)하는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른바 덕(德)이란 것은 식자(識者)나 고귀(高貴)한 사람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닙니다. 소를 비롯한 짐승들도 나름대로 덕(德)을 지닐 수 있고, 한미(寒微)한 학력(學歷)이나 신분(身分)을 지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덕(德)을 갖출 수 있습니다.

  조선(朝鮮) 후기(後期) 정조(正祖) 때 인물로서 보통 사람들이 기휘(忌諱)하는 직업이었던 인분수거업(人糞收去業)에 종사(從事)한 엄행수(嚴行首)라는 사람은 매일 악취(惡臭) 나는 똥을 퍼 나르는 일을 하였지만 항상 정의(正義)를 지키고 행실이 조촐하여, 당대(當代) 발군(拔群)의 실학자(實學者)였던 선귤자(蟬橘子) 이덕무(李德懋) 선생으로부터 예덕선생(穢德先生)이란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덕(德)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자(漢字) 더러울 자(字)이고, 자(字)입니다. 이 엄행수의 덕행(德行)을 예찬(禮讚)한 소설(小說)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은 선귤자(蟬橘子)와 절친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쓴 『연암외집(燕巖外集)』『방격각외전(放璚閣外傳)』에 수록(收錄)되어 더욱 유명(有名)해졌지요.


  일찍이 이광수 선생은 예(例)의 우덕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의 덕(德)을 논(論)한 적이 있습니다.


  만물에는 각각 다소의 덕(德)이 있다. 쥐 같은 놈까지도 밤새도록 반자위에서 바스락거려서 사람에게,

  “바쁘다!

 

  하는 교훈을 주는 덕이 있다. 하물며 소는 짐승 중에 군자다. 그에게서 어찌해 배울 것이 없을까.


  소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뭐니 뭐니 해도 농부(農夫), 그 중에서도 논밭에서 직접 소를 부려 경작(耕作)하는 농군(農軍)일 것입니다.

  조선(朝鮮) 최고의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 황정승이 소싯적에 무명(無名)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은 한 농부와 소에 관(關)한 실없는 수작(酬酌)을 걸다가 크게 깨우쳐, 이로 인해 후일(後日)에 큰 인물이 되었다는 일화(逸話)가 야사(野史)에 전래(傳來)하고 있습니다. 젊은 선비 황희(黃喜)와 두 마리 소로 밭을 가는 농부(農夫)의 이야기 말입니다.

 

 

  오늘날 농촌에서는 대부분 경운기(耕耘機)나 트랙터(tractor)로 농사를 지어 이제는 한우(韓牛)가 농우(農牛)가 아닌, 육우(肉牛)로서만 사육되고 있지요.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시골에서 코뚜레를 꿰차지 않은 소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간혹 소규모 농지(農地)에선 아직도 소를 이용해 밭갈이나 논갈이를 하는데, 남한(南韓)에서는 강원도(江原道)만 빼놓고 거의 전부 소 한 마리로 호리라는 쟁기를 사용해 밭갈이를 합니다.

  그런데 지대(地帶)가 높고 땅이 거칠고 성질이 강한 강원도에서는 대부분 두 마리 소가 겨리라는 쟁기를 함께 끌어 논갈이와 밭갈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소를 모는 농부(農夫)의 숙련된 전문성(專門性)이 요구됩니다. 그들을 밭갈아비라고 하는데, 농번기(農繁期)에는 밭갈아비들의 이른바끗발이란 것이 대단히 셌지요.

  저는 황희 정승 고사(故事)를 읽을 때마다 겨리질하는 강원도 우리 고향 밭갈아비 아저씨들의 굵은 팔뚝과 선하게 웃는 모습을 아련하게 떠올리곤 한답니다.[;;^-^;;]

  황정승은 호리를 사용하던 경기도(京畿道) 개성(開城) 태생입니다만, 경기도라고 할지라도 지대(地帶)가 높은 곳은 땅의 성질이 거칠고 강해서 두 마리 소가겨리를 부리어 논밭을 갈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보다 쇠[]의 질(質)이 훨씬 조악(粗惡)한 농기구(農器具)를 사용해야 했던 여말선초(麗末鮮初) 시대에는 웬만한 평지(平地)도 대부분 겨릿소로 경작(耕作)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양반(兩班) 선비를 일컬어 수재(秀才)라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무조건 반가(班家) 출신 선비를 통틀어 아무개 수재(秀才)라고 호칭(呼稱)해 주었지요.

  방촌(庬村) 황희 정승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오백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명재상(名宰相)으로 추앙받는 큰사람입니다만, 소시(少時)에는 다소 지적(知的)인 오만(傲慢)과 경박(輕薄)한 일면(一面)을 지닌 수재(秀才)였다고 합니다.

  청년 선비 황희 황수재(黃秀才)가 소싯적에 평안도(平安道)로 여행을 하기 위해 송도(松都)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겪은 일화(逸話)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조 오백년 야사(李朝五百年野史, 서울 大一出版社, 1974, PP.104~108)』에 나온 내용을 요약(要約) 내지(乃至) 발췌(拔萃)한 것입니다.


  어느 날 황수재(黃秀才)는 산비탈에서 소 두 마리에게 겨리를 부리어 밭을 갈고 있는 한 늙은 농부(農夫)를 발견했습니다.


   이랴, 이랴! 마라, 마라! 이랴앗!……

   안~소야, 와와! 워워!……

   이랴, 이랴아, 이랴앗!……


  밭갈아비 농군(農軍)은 검정소와 누렁소 두 마리의 목덜미 위에 겨리 쟁기를 메게 하고는 마치 창(唱)을 하듯이 구성진 목소리로 겨릿소들을 신명나게 독려(督勵)하여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선 채 밭갈이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황수재(黃秀才)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 농부를 향해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여보, 여보슈! 날 좀 보오.

  농부는 두 마리 소를 그 자리에 멈추어 서게 하고 황수재를 향해 돌아섰습니다.

  “지금 그대가 몰고 있는 그 소 두 마리 중에 어느 소가 힘이 더 세오?

  그랬더니 농부는 소와 쟁기를 세워 놓은 채 밭에서 뛰쳐나오더니 황수재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그의 귀에 거의 들릴락 말락 하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기 저 검정소가 누렁이 소보다 좀 낫소이다.

  이 말을 들은 황수재는 손뼉을 치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습니다.

  “예끼, 여보시우! 겨우 그 말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왔단 말이오? 그냥 그 자리에서 말해도 되는 것을…….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정색(正色)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젊으신 양반네라 어쩔 수 없군요.

  “아니, 밭을 갈다 말고 여기까지 뛰어와서 귓속말을 할 필요가 있소? 그냥 그 자리에서 조금 큰소리로 대답하면 될 것을 말이오.

  농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팔을 내저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니올시다. 그런 게 아니올시다. 아무리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 짐승이지만 자기가 동무 소보다 못하다고 하면 기분 좋아할 리가 있사옵니까?

  “아니, 그럼 저 소들이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단 얘기요?

  황수재가 묻자, 농부는 더욱 정색(正色)을 하며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끄덕였습니다.

  “아, 그럼요. 알아듣고 말굽쇼. 제가 이랴! 하면 앞으로 가고, 워이, 워이! 하면 그 자리에 서고……. 그렇지 않사옵니까?

  “허허, 거……참!……

  황수재는 농군(農軍)에게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차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그였지만, 한갓 늙은 촌부(村夫)에 지나지 않는 밭갈아비보다도 생각이 짧았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던 것이지요.

  황수재는 자기보다 신분(身分)이 한미(寒微)했던 농부 앞에 머리 숙이며, 자신의 오만방자(傲慢放恣)하고도 경박(輕薄)했던 처신(處身)에 대해 진솔(眞率)하게 사과(謝過)한 다음에, 밭머리를 물러나 애초의 행선지(行先地)인 평안도(平安道)를 향해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은 후부터 황희 황수재는 그와 마주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신분의 지위고하(地位高下)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겸손하고도 너그럽게 상대(相對)하였으며, 어질고 지혜롭게 처신하여, 나중에 이 나라 최고의 정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고향 강원도에서 농사꾼 자식으로 태어나 열다섯 살까지 홀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성장기(成長期)를 보냈는데, 그 때 저희 집에서 소를 키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 역시 겨릿소들이 사람 말을 알아듣고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황희 황정승과 겨릿소에 얽힌 고사(故事) 따위는 전혀 몰랐지요.

  저희 집에서 기르던 암소는 바로 이웃집 암소와 겨릿소 짝을 맺어, 저희 집과 이웃집은 밭을 갈거나 논을 갈 때마다 두 집의 소를 함께 부리곤 했습니다. 우리 집 암소는 송아지 티를 벗어나면서부터 옆집 암소와 파트너(partner)로 길들여져서, 만약 우리 소가 병(病)이 들거나 옆집 소가 병이 나서 일을 못할 경우가 생기면, 금방 다른 소로 대체(代替)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 소가 함께 일하면서 공유(共有)한 정서(情緖)가 끈끈하고도 도타워서, 기계 부속품 갈아 치우듯 파트너 관계를 임의(任意)로 해지(解止)하기가 용이(容易)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두 마리 소가 짝을 이루어 논밭을 갈 때마다 한 마리는 항상 안쪽을 맡고, 나머지 한 마리는 항상 바깥쪽을 맡아 능숙하게 겨리질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두 마리 소가 밭고랑 끝까지 밭갈이를 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 때, 밭갈아비 아저씨가 안~소야!하고 외치면 안쪽에 있던 소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바깥쪽에 있던 소는 큰걸음으로 왼쪽을 향해 방향전환을 하여 성큼성큼 걸어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눈치챘습니다.^^*


  그건 그렇고…….

  

  황희 황정승의 고사(故事)에서 알 수 있는 바, 소나 개 따위 짐승도 사람이 가르치거나 훈련을 하면 훌륭히 순치(馴致)되어 어느 정도는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집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이 사용하는 말귀를 알아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 중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속출(續出)하고 있어 무척 개탄(慨歎)스럽습니다. 

  짐승, 즉(卽)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들을 한자어(漢字語)로 야만인(野蠻人)이라 일컫고, 순 우리말로는 오랑캐라고 하며, 영어(英語)로는savage 또는barbarian이라고 합니다.

 

  의무교육(義務敎育)을 이수(履修)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지킬 줄 아는 기본윤리(基本倫理)와 기초생활에 필요한 법률(法律)조차 상습적(常習的)으로 어기고, 더러는 파렴치한 패륜(悖倫)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野蠻的) 인간들이 요즘 부쩍 증가하여 TV와 신문(新聞)의 머릿기사[Top News]를 요란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例)컨대 어린이 유괴범(誘拐犯), 인신매매범(人身賣買犯), 성범죄자(性犯罪者), 직계존비속(直系尊卑屬) 상해범(傷害犯) 내지 직계존비속 살인범(殺人犯) 등(等)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도 분명 교육기간(敎育期間)이 길었든 짧았든 간에 나름대로 각자(各自) 가정교육(家庭敎育)과 학교교육(學校敎育), 사회교육(社會敎育)의 과정을 거쳤을 터인데 말입니다. 아마 그들은 소나 개, 또는 앵무새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는 기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을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그들은 저 황희 황정승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검정소 누렁소만도 못한 자(者)들입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의(禮義)와 염치(廉恥)를 모르는 뻔뻔한 종자(種者)들이니, 그들은 저 아프리카(Africa)와 남양군도(南洋群島)의 밀림(密林) 속에 살고 있는 미개인(未開人)들, 즉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오지(奧地)의 야만인(野蠻人)들과 하등(何等)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선진국(先進國) 중심의경제협력 개발 기구, 즉 OECD 가입(加入) 국가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 살면서 악질적인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니, 야만인(野蠻人)들만도 못한 정말 나쁜 놈들입니다.

   

  아, 문득 조선 말엽(朝鮮末葉)의 출중(出衆)한 가객(歌客)이었던 운애(雲崖) 박효관(朴孝寬 : 1781~1880) 선생의 시조(時調) 한 수(首)가 뇌리(腦裏)에 떠오르는군요.

 

    뉘라셔 가마귀를 검고

    흉(凶)타 하닷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긔 아니 아름다온가


    사람이 뎌 새만 못험울

    못내 슬허 하노라  

출전(出典) : ≪화원악보(花源樂譜) 380      

 


   <현대문(現代文) 풀이>

 


    누가 까마귀를 검고

    흉하다고 하였던가.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것이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 반포보은(反哺報恩) : (되돌릴 ) 哺(머금을 (갚을 ) 恩(은혜 ) :

                                입에 머금은 것을 되돌려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 

 

  까마귀는 성장 후에 반드시 먹이를 물어다가(또는 입에 있는 것을 씹어내어) 늙은 어미를 먹이는 습성이 있어, 일명(一名) 반포조(反哺鳥)라고 합니다. 또는 대성(大聖) 공자(孔子)님의 제자 중 효자(孝子)로 유명한 증삼(曾參)과 같은 효자(孝子) 새라 하여, 예로부터 동양(東洋) 삼국(三國)에서는 까마귀를 일러 증삼조(曾參鳥)라고도 합니다.

 

  저는 오늘 박효관 선생의 교훈적인 시조(時調)를 제가 직접 패러디(Parody)하여, 오늘날 도처(到處)에 속출(續出)하고 있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을 널리 경계(警戒)하고자 합니다.

  

    뉘라서 겨릿소를

    힘만 세다 하였는고.


    밭갈아비 말귀를

    알아듣고 일을 하니.


    사람이 소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2007103 개천절(開天節) 아침


도덕(道德)이 제대로 지켜지는 나라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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