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고무신 추억

noddle0610 2008. 5. 14. 13:31

 

 

  

 

     

   


  예전에 우리가 시골에서 자랄 때 노상 신고 다닌 고무신!……  이제는 세월이 변하여 그 흔하디흔하던 고무신을 구경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향 강원도(江原道)에서는 검정 고무신보다 흰 고무신을 선호(選好)하여가정 형편이 몹시 어려운 집 아이들 일부만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동네 아이들 십중팔구는 사시사철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흰 색깔의 단점(短點)은 금세 더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국민학교 운동회(運動會) 무렵이나 되어야 비로소 검정색 천으로 만든 싸구려 운동화(運動靴)를 신을 뿐,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나 너나없이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국민학교 때와 달리 학교에서 지정해 준 교복(校服)과 교모(校帽)를 착용하고, 운동화(運動靴)를 항상 신은 채 등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값비싼 운동화를 아껴 신기 위해 다시 고무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저는 중학생이 되는 첫날, 그 무엇보다도 새 교복과 교모를 쓴 채 진솔 운동화를 신게 된 것 때문에 온종일 가슴 설레었던 기억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서울에 유학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제가 다니던 학교는 공립학교라서 사치 풍조를 배격하는 의미에서학생용 구두, 학생화(學生靴) 착용을 엄하게 금지했었습니다.

 

  제가 구두를 신게 된 것은 대학교(大學校)에 합격하고 나서가 처음입니다.

  1960년대 후반기만 해도 구두는 대부분 수제화(手製靴)를 주문해야 자기 발에 맞는 구두를 신을 수가 있었는데, 저는 다행이 고향 선배 한 분이 제가 살고 있던 돈암동(敦岩洞)에서 양화점(洋靴店)을 운영했기 때문에 항상 제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강원도 오지(奧地) 마을에서는 5일장(五日場)이 서는 장터[신남장(新南場)]까지 거리가 먼데다가 집에서 내다 팔 물건조차 넉넉하게 있지 못해 고무신을 사 신는 대신에 짚신이나 -노끈 따위로 엮은 미투리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학자(漢學者)이셨던 저희 할아버지께서 6.25 전쟁 이후에 고향 마을에서 여러 해 동안 서당(書堂)을 여셨는데, 저희 서당에 다니던 막둥이 학동(學童) 한 명이 바로 미투리를 신고 다녔습니다. 샛골이라는 오지(奧地)에서 우리 동네안마을까지 통학을 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짚신보다 질긴 삼이나 노끈 따위로 엮은 미투리를 신고 다녔습니다.

  짚신은 초혜(草鞋)라고 하며, 삼으로 엮은 미투리는 마혜(麻鞋), 노끈으로 엮은 미투리는 승혜(繩鞋)라고도 했는데,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의 구시대적(舊時代的)인 신발은 6.25 전쟁을 계기로 사라지기 시작해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완전히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짚신과 미투리를 승계(承繼)한 서민들의 신발인 고무신의 생명은 제법 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중고등학교 때는 물론이요, 구두를 신고 다니던 대학 시절에도 집에만 오면 흰 고무신을 신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희 집에서는 일제(日帝)의 잔재(殘滓)인 이른바쓰레빠, 아니 슬리퍼(slipper)를 신지 않고 노상 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부산(釜山)왕자표(王者標) 고무신 재벌(財閥)이 쇠락하면서부터 차츰 재래시장(在來市場)에서 고무신 모습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리더군요. 단독주택이 주거 생활(住居生活)의 중심을 이루던 시절까지는 집에서 신는 신발로 고무신이 제격이었지만, 근자(近者)에 이르러 실내화(室內靴)가 필수적인 아파트(Apart) 생활이 보편화되자 고무신은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단독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이제는 시대의 추세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습니다. 마당에서 물청소를 하거나 화단(花壇)에 호스(hose)를 사용해 물을 줄 때, 물에 젖은 슬리퍼를 통해 감촉(感觸)하는 맨발의 느낌은 물에 젖은 고무신을 신었을 때의 맨발의 촉감(觸感)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물에 젖은 고무신을 신고 철벅거릴 때의 상쾌함과는 달리 물에 젖은 슬리퍼를 신었을 때 발가락들 사이로 느껴지는 그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더러운(?) 기분은 정말 너무너무 싫어서, 저는 언젠가부터 가급적(可及的) 물에 젖은 슬리퍼를 신고 마당 청소를 하는 일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제 고무신은 서울에서는 어쩌다 인사동(仁寺洞) 골목의 좌판(坐板)에서 간혹 구경할 수 있고, 아니면 멀리 시골 장터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십 년째 살고 있는 우리 동네는 대형 마트(mart) 때문에 재래시장이 죽어 버려, 고무신 따위는 아예 매물(賣物)로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고무신을 신은 채 산과 들과 물가를 누비던 그 시절이 말입니다.

고무신 앞부분을 손가락으로 푹 질러 움푹 들어가게 하고는 그것을 지엠시 트럭(GMC-truck)이나 지프(jeep), 또는 스리쿼터(three-quarter) 자동차라면서 장난감 대용(代用)으로 삼은 채우리 동네 불알친구들과 함께 모래밭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진종일(盡終日) 뒹굴던 시절이 눈물겹게 기억납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를 파()하고 귀갓길에 아직 해는 중천(中天)에 떠 있고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어른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집안일을 도와 드려야 하기 때문에 꾀쟁이 친구들은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해 저물 녘까지 신작로(新作路)나 개울가에서 각자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서 발끝으로 공중을 향해 높이 던지거나 멀리 던지기 시합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런 아주 소소한 일들까지도 저희 또래 시골 출신들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향 마을 상수내리(上水內里)의 그 이름도 정겨운 부못골-억산악골-새장터 골짜기에서 흐르던 개울과 골안-샛골-장수바위 밑-경수(鏡水)-웃버덩-더톳골-살때울 등지(等地)에서 흘러내리던 개울들, 강남소(江南沼)  벌판을 가로 질러 소양강(昭陽江)으로 흐르던 큰 개울, 그리고 안마을안산(案山) 밑 성황당(城隍堂)께를 휘감아 흐르던 실개천에서 쉬리(*강원도 방언 : 세리/쉐리)-버들치(*강원도 방언 : 버드쟁이)-기름종개 등의 민물고기들을 잡으며 해마다 한여름을 보내곤 했는데, 어른들은 족대그물따위로 물고기를 잡으셨지만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던 저희는 유리알같이 맑은 개울물에 뛰어들어 손바닥을 웅크려서 잡거나 흰 고무신을 조심조심 사용해 용케 물고기를 잡곤 했습니다물고기를 잡으면 어항(魚缸)’에 집어넣어야 하는데만약 준비가 안 되었을 경우에는 흰 고무신을 어항 대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우리가 늘 신던 고무신은 다용도(多用途) 제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이처럼 다용도로 사용한 신발이 우리 나라 고무신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고무신은 외출용 신발 겸(실내용 신발, 장난감 자동차 대용품(代用品), 높이 던지기와 멀리 던지기 놀이에 쓰이는 소도구(小道具), 갓 잡은 물고기를 담는 어항(魚缸) 대용품 따위로 사용하는 등 그 용도가 실()로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고무신을 신고 논밭에 들어가 농사일을 했으며, 때로는 고무신을 신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간단히 감발(발감개)한 고무신 차림으로 집에서 기르는 누에를 먹이기 위해 산뽕을 따러 이 산 저 산을 누비기도 하였고, 산비탈에서 고들빼기 등 산나물도 잔뜩 캐고, 화전(火田) 근처에서는 고사리고비를 꺾기도 했지요

 

  어린 시절에 동네 누나들을 따라 고무신을 신은 채 산에 올라가서 달래를 캘 때 청승맞게 부르던 노래가 한 대목 생각나는군요.

  

  찔령 줄 게달령 다오!……

  찔령 줄 게달령 다오!……    

 

  찔령 찔레의 강원도 영서지방(嶺西地方) 사투리요, 달령달래의 강원도 영서 지방(嶺西地方) 사투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찔레달래는 모두 강원도 산비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野生)의 식용식물(食用植物)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찔령(찔레) 그 줄기에 작은 가시가 무수히 달려 있어서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봄철에는 갓 자라난 줄기가 아직 여리고 야들야들하여 어린아이들이 꺾어먹기에 아주 좋은 군것질 감이었고, 달령  달래 국거리나 반찬거리로 아주 훌륭한 재료였습니다요즘에는 달래 따위의 산나물 정도야 얼마든지 남새밭(채소밭)에서 길러 먹을 수 있고, 한겨울에도 비닐하우스(vinyl house)에서 재배(栽培)를 하여 언제든지 식탁(食卓)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농업 기술이 발달해 있지만, 저희가 자랄 때만 해도 달래고들빼기 등은 봄철에나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고산지대(高山地帶)가 많은 강원도에서는 들판에 자라는 것들보다 양지(陽地)바른 산기슭에 자생(自生)나물들이 특히 싱싱하고 맛이 있었지요.

 

  어쨌든 간에 우리 동네 누나들과 저는 산에 오르기만 하면 산신령님에게 찔령을 줄 테니, 그것을 받아먹고 그 대신에 달령을 달라는 뜻에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며 나물을 캤습니다

 

  ~려어엉~ , 다알려어엉~ ~!……

 

  저는 누나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앵무새처럼 일일이 따라 부르면서도, 왜 산신령님에게 버릇없이 반말로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의아(疑訝)해하였는데, 그 의문(疑問)은 나중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고문(古文) 시간에 비로소 풀 수 있었습니다우리 조상들은 산신(山神)이나 용왕신(龍王神) 따위에게 집단적(集團的)으로 어떤 소원을 빌 때에는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때때로 비격식체(非格式體)반말로 주술적(呪術的)이고 위압적인 내용의 합창(合唱)을 해서 효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구지가(龜旨歌)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아니 내면은

          구워서 먹으리라.

 

 

해가사(海歌詞)

 

          거북아, 거북아

          수로 부인(水路夫人)을 내놓아라.

 

          남의 여자를 빼앗아 간 죄()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해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서 먹으리라.

                     

  위의 두 노래는 모두 일연(一然) 스님이 엮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되어 있는 고대 가요(古代歌謠)입니다.

  구지가(龜旨歌)는 가야(伽倻)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임금으로 맞이하기 위해 아홉 명의 추장(酋長)들이 부른 합창곡(合唱曲) 노랫말이고, 해가사(海歌詞)는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팜므파탈[femme fatale]이었던 수로부인(水路夫人)이 용왕(龍王)에게 납치되자 군중이 다 함께 부른 합창곡 노랫말입니다.

  구지가(龜旨歌)해가사(海歌詞)는 당시(當時)의 군중(群衆)이 흙을 파헤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누나들과 저는 왕자표(王者標) 고무신을 신고 앞산 뒷산에 올라가 호미와 꼬챙이로 산기슭을 파헤치며, 찔령 줄 게, 달령 다오!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겹도록 오래 신었기에, 한때는 아예 찢어 버리고도 싶었던 고무신!……  이제는 세월이 변하여 그 흔하디흔하던 고무신을 구경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문득 장순하(張諄河) 시인의 향토적이면서도 파격적인 현대시조(現代時調) 고무신 명구(名句)들이 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군요. 

  

       

 

          눈보라 비껴 나는

          -()-()-()-()-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 

 

          외딴 집 섬돌에 놓인     

 

          

      


   얼핏 보면 시조(時調) 같지 않은 듯한(?) 이 파격적 현대시조 고무신 시구()들은 그 이미지(image)가 저의 어린 시절 추억들과 오버랩(ovetlap)되면서,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제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정경(情景)들이 떠올려지곤 합니다           


          눈보라 비껴 나부끼는

          한겨울에  


          삭막한 전주(全州)-군산(群山) 사이의

           도로(道路)를 


          자동차를 탄 채 쌩쌩 달린다. 


          퍼뜩 차창(車窓)에 비친 채

          스쳐 지나가는 

          따스한 정경(情景)이여! 


          그건 바로  


          길가 외딴 농가(農家)

          섬돌 위에 놓인             


            --------------------

           아버지 고무신,

              아이 신발,   

           어머니 고무신!……

          -------------------- 

                       

          [!  식구가

          오순도순 

          단란하게 사는구나.] 


  이 시조(時調)의 종장(終章) 보이는 세 식구가 사는 외딴 집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세 켤레 풍경처럼 비록 가난하지만 단란하고도 따스해 보이는 정경(情景)이나 인정(人情)은 과거의 우리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시골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기 힘든 옛 풍속도(風俗圖) 속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고향 마을은 20세기 산업화(産業化)의 도도한 물결에 의해 1970년대 초반에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인 양강(Dam)이 건설되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도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제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팔도강산(八道江山)으로 각기 흩어지고요그래도 제 가슴 속에는 고향 풍물(風物)이 아스라이 남아 있습니다. 


  오랜 도시생활, 특히 현대화된 생활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어쩔 수 없이 고무신도 벗어 버렸지만, 지금도 고무신소양강 다목적 댐(Dam)으로 인해 사라진 저희 고향 마을과 더불어 아련한 추억(追憶)으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2008 5

 박         


출처 : Daum cafe '수내국민학교 동문들 사랑방', 6 이야기방,

2008.05.14 03:21. http://cafe.daum.net/wkdrbgud2002/JSoH/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