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요즘 소주(燒酒) 도수(度數)가 낮아졌다고들 하는데

noddle0610 2018. 5. 22. 08:28




요즘 소주(燒酒) 도수(度數)가 낮아졌다고들 하는데





  지난 주말(週末)에 읽은 신문 기사(新聞記事) 가운데 제 눈에 확 띈 기사가 한 개() 있었는데, 그 제목은 또 묽어진 소주, 애주가들 뿔났다였습니다. 기사 내용의 골자(骨子)는 소주(燒酒)의 도수(度數)4년 만에 하락하여 이제 17() 짜리 소주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 소주의 평균 도수가 17도라는 사실에 먼저 놀랐고, 그것도 4년 전에는 17.8도 짜리와 17.5도였는데 0.5~0.6도씩 떨어졌다는 사실에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소주 도수(度數)가 너무 낮아져 이제는 마셔도 '~'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애주가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기사 내용에 저 또한 충분히 공감하였습니다.


그 신문 기사에 의하면 2006년 이후부터 3~4년마다 소주 도수가 하락하고 있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저는 2006년부터 의사 선생님의 강력한 권유로 술을 끊었기 때문에 그동안에 소주 도수가 그처럼 많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놈들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 35도였던 소주가 1973~1998 25년 동안에는 25도를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2006년부터는 3~4년마다 본격적으로 도수 하락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인데, 이미 술을 끊은 저는 여태껏 소주는 평균적으로 25도 그대로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강원도 산골짝 태생으로 인제군(麟蹄郡)에 있는 신남중학교(新南中學校)를 졸업하고 서울에 유학(遊學)하여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할아버지와 어머니 슬하(膝下)를 떠나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저의 처지가 너무 외롭고 미래가 불안한 나머지 자취방(自炊房)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 나중에 성인(成人)이 되고 나서는 하루에 담배를 2~4갑씩 태웠으며, 불면증(不眠症)에 걸려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술을 한두 잔씩 마시고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술도 제 또래 친구들보다는 조금 일찍 배우고 익혔던 것 같습니다.


40여 년간의 흡연과 음주는 저의 건강을 해쳐, 결국 2006 1월 영하(零下)의 혹독한 날씨 속에 해후(邂逅)한 옛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신 후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생사(生死)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제 심장의 3분의 2가 괴사(壞死)하여 현재는 심장의 3분의 1로만 숨을 쉬면서 근근득생(僅僅得生)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나친 흡연과 음주는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진짜 사실이라는 것은 제가 쓰러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 병원 측에서는 제 가족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이야기까지 했던 것으로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여름에는 더위가 섭씨(攝氏) 28()가 넘으면 외출 금지고, 겨울엔 기온(氣溫)이 영하 8도 이하(以下)로 내려가면 외출 금지이며, 미세(微細) 먼지가 나쁨 상태일 때도 외출을 삼가야 하는 생활을 여태껏 12년째 이어 오고 있습니다.


이러니 제가 우리나라 소주의 평균 도수가 아직도 예전처럼 25도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대장(大腸), 그러니까 큰창자가 허약한 편이었습니다. 저의 고향 강원도 영서지방의 전형적 가옥 구조(家屋構造)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감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는 따뜻하게 겨울철을 보내는 편이었지만, 저는 밤에 잠을 잘 때 새벽녘이면 뜨끈뜨끈하던 방바닥 아랫목이 차갑게 느껴지고 그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하여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 전전반측(輾轉反側)해야 했습니다 


저희 집이 가난해 땔감이 떨어져서 그랬냐고요? 천만(千萬), 그게 아니라 제 아버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집에 젊은 남자가 안 계셨고, 우리 할아버님이 직접 도끼로 '장작(長斫)'을 패야 아궁이에 불을 넉넉히 지필 수 있었는데, 효심(孝心)이 지극하신 제 어머니가 연로(年老)하신 선비 출신(出身) 시아버님을 배려(配慮)하여 장작을 아껴 쓰셨기 때문이지요.




  악산(惡山)이긴 하지만 수만 평(數萬坪)이 넘는 산()을 할아버님 명의(名義)로 소유하고 있었고, 그 산은 지금도 제 명의로 상속을 받아 아직껏 소유하고 있으니까 땔감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산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님의 양해를 얻어 자기네 땔감을 우리 산에서 채취해 가고 그 대가(代價)로 우리 집이 겨울 내내 불을 때고도 남을 정도의 소나무와 참나무 땔감들을 산에서 베어다가 우리 집 마당 한구석, 뒤뜰, 담벼락, 지붕 처마 밑에 가득 쌓아 주었으니까요.


그 원목(原木)들을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개고 패야 하는데 연약한 어머니께옵서 도끼질을 하실 수는 없었고, 제 할아버님이 도끼질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가급적 겨울철엔 안방과 떨어져 있는 빈 방[공방(空房)]’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지피는 아궁이 수를 줄이고자 어머니와 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무시는 안방과 직접 이어져 있는 윗방에서 겨울철을 보냈습니다.


저희 고향인 강원도 영서 지방(嶺西地方)의 전통 가옥(傳統家屋)에는 대부분 안방에는 윗방이 이어져 있고, ‘안방의 맞은편엔 이른바 건넌방이 있으며,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가 따로 있는데, 그 사랑채에도 윗방이 한두 개가 더 이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정말 가난한 집은 땔감 문제가 심각해서 아예 윗방은 없이 안방건넌방만 있는 가옥(家屋)을 짓고 살아야 했습니다.


제사(祭祀)를 수시로 지내야 하는 종갓집이나 맏이의 집, 이른바 큰집[큰댁]’은 일가친척이 모여서 밤늦게 첫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지내고 아예 큰댁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안방에도 윗방이 붙어 있고, 건넌방에도 윗방이 붙어 있으며, 사랑채에도 윗방이 붙어 있고, 대문 옆 문간방에도 윗방들이 좌우로 여러 칸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윗방과 이어져 있는 방들은 일명 아랫방이라고도 불렀지요.


  여하간 안방과 이어진 윗방이든 아랫방과 이어진 윗방이든 간에 모두 한 아궁이에 불을 지펴 그 불길이 ‘구들장’ 밑 ‘방고래’를 통해 윗방까지 따끈따끈하게 미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가옥들은 땔나무, 장작(長斫)’이 많이 소용(所用)되었습니다. 그래도 새벽녘이면 윗방은 아랫방들보다 빨리 구들장이 식어 버리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부엌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만 했습니다.


  제 어머니께옵서는 시아버님이 장작을 패실 때마다 힘 부쳐 하시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새벽녘 군불은 아주 혹독한 추위 때가 아니면 잘 지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강원도 지방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새벽녘의 저는 차가워진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오들오들 떨어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머니가 제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시기도 했지만 집안일로 늘 고단하신 어머니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셨기 때문에 저의 아랫배는 차츰차츰 ()가 되어갔고, 저는 나중에 만성적인 냉증(冷症)’ 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인(成人)이 되고 나서 겨울철에 고향에 가면 불알친구들과 반갑게 해후(邂逅)하여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 마신 술은 대부분 집에서 몰래 담근 농주(農酒)’, 그것도 진짜 쌀 막걸리’, 이른바 동동주였습니다.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였기 때문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쌀로 막걸리를 만들지 못하게 엄하게 규제를 했던 시절이라서 도회지(都會地)에서는 진짜 동동주를 마시기가 힘들었는데, 저희 고향은 자동차도 안 드나들던 전형적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야금야금 동동주를 담가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개 너머 신남리(新南里)에 있는 장터에 가서 중학교 동창들과 만나 마신 술은 양조장(釀造場)에서 담근 막걸리라 그런지 너무 맛이 싱거웠고, 무슨 물을 탔는지, 무슨 누룩이나 쌀로 빚었는지는 몰라도 마셨다 하면 술에 취하기 전에 이미 뱃속에서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나며 화장실 드나드느라 몹시 분주(奔走)했답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데 저만 홀로 화장실을 드나들기에 바빴으니, 저는 그때가 한창 나이인 스무 살 남짓한 대학생 시절이었는데도 이미 대장(大腸)이 안 좋아져서 막걸리 술에 매우 취약(脆弱)했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가 인제군(麟蹄郡)에 있는 신남중학교를 다닐 때 5.16 쿠데타(coup dEtat)로 집권해서 제가 30대 나이의 사회인(社會人)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를 통치하다가 서거(逝去)하였고, ‘박정희 정부(政府)’ 통치 시절 내내 저는 쌀로 빚은 막걸리가 아닌 양조장 막걸리를 마시며 늘 배가 아파 화장실을 부지런히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빚어 주신 동동주를 마시면 아주 마음이 푸근해지고 배도 안 아프고, 기분 좋게 밤에 숙면(熟眠)을 취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저의 대학생 시절, 서울에는 무교동(武橋洞) 막걸리 골목이 아주 유명했었지요. 다닥다닥 붙어 있는 1~2층 짜리 낡은 술집 건물들이 골목길마다 양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초저녁에는 낙지 백반을 안주(按酒)로 시켜 놓고 식사를 하면서 반주(飯酒)로 막걸리를 마시다가 나중에는 질탕(佚蕩)한 술자리로 변질이 되어 통행금지 시간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던 그 시절이 지금도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비록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저 아프리카(Africa)에 있는 가나(Ghana) 공화국보다도 더 가난했던 우리나라, 필리핀(Philippines)과 인도네시아(Indonesia)와 버마(Burma : Myanmar)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로 알려졌던 그 시절에 제 또래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위로해 준 것은 막걸리 뿐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1.21 사태(事態)’가 일어났고,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 개헌(三選改憲) 파동(波動)’이 일어났으며, ‘프에블로호(Pueblo) 사건’이 일어났고, 향토예비군(鄕土豫備軍)이 창설되었고, 군대에는 ‘유격훈련(遊擊訓練)’이란 것이 새로 생겼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막걸리를 엄청나게 많이 마셨고 그때마다 저의 장()은 점점 망가졌습니다. 얼마 후 저는 육군(陸軍)에 용약 입대(勇躍入隊)하여 ‘제1사단(第一師團 전진부대(前進部隊)’에서 복무하였는데, 너무 망가져 버린 장() 때문에 경기도 파주군(坡州郡)에 있던 한 야전병원(野戰病院)에 후송(後送)되어 아랫배를 가르고 대장(大腸)을 수술(手術)해야 했습니다. 제가 육군의 이동외과병원(移動外科病院)에서 수술을 마치고 회복 과정(回復過程)에 있을 때, 전군(全軍)에 비상(非常) 조처가 내려져 병원에 입원 중이던 모든 군인 환자들이 허둥지둥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저 유명했던 ‘실미도(實尾島) 사태’ 때문이었지요.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육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는 바야흐로 1970년대가 되어 있었고, 저는 군복무 시절에 대장(大腸) 수술을 받긴 했지만 시설이 열악한 야전병원에서 경험마저 부족한 군의관(軍醫官)의 집도(執刀)로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대장(大腸) 상태가 안 좋아 더 이상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는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집에서 어머니가 저의 생일(生日) 때마다 담가 주신 진짜 동동주는 후유증 없이 마실 수 있었지만, 당시의 여건상(與件上) 집에서 남몰래 담근 동동주를 일상적(日常的)으로 마실 수는 없었지요. 


막걸리를 마실 수 없게 되자 그 대신에 제가 마시기 시작한 것이 바로 소주(燒酒)였습니다.


저희 집에서 가끔씩 집안 제사나 할아버지 생신 때 올리려고 저희 어머니께옵서 손수 집에서 빚은 소주(燒酒)를 마셔 본 적도 있기 때문에, 막걸리보다 소주가 저의 체질에 맞는 것을 알고부터는 회식(會食) 자리에서도 몇 년 동안 소주를 선택하여 마셨습니다만, 소주(燒酒)의 도수(度數)가 야금야금 낮아져서인지 아니면 저희 어머니가 집에서 찹쌀로 빚어 주신 소주가 아닌 주정(酒精) 소주라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인가 소주를 마시고도 예전에 막걸리를 마셨을 때처럼 화장실을 빈번하게 드나들고 설사(泄瀉)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소주 대신에 맥주(麥酒)를 마실 수는 없었으니, 그것은 맥주(麥酒)란 술 자체가 장()에 안 좋은 보리[]’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소주(燒酒)가 지역마다 특화(特化)되어 생산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도수(度數)에도 지역별로 차이가 다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 지역에서 마시던 ‘진로(眞露) 소주(燒酒)’는 제 입에는 맞았는데 나중에 저의 장()에서 거부(拒否)를 하는 바람에 더는 안 마시게 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이른바 돗수[度數]’가 높은 소주, 문자(文字) 그대로 속칭(俗稱) ‘쏘주내지 쐬주를 구해다가 마셨습니다. 이를테면 경상도의 ‘안동(安東) 소주’나 전라도의 ‘영광(靈光) 소주’ 등을 친지(親知)들을 통해 어렵사리 구해 마시게 되었는데, 이 술들은 저희 집에서 시쳇말로 혼술을 할 경우에나 마실 수 있는 술들이었습니다  


직장(職場)의 회식(會食) 자리나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특정 지역 생산의 소주를 대량(大量)으로 주문(注文)해 마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때부터 가급적 여러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절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는 그들의 양해를 얻어 중화요리(中華料理) 전문점에 가서 도수가 높은 ‘배갈[白干兀]’류()의 술들을 사서 마셨으며, 집에 와서는 어머니가 담가 주신 동동주나 장모(丈母)님이 구해다 주시는 도수(度數)가 높은 양주(洋酒)를 홀로 자작(自酌)하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순한 술만 마셨다 하면 화장실 출입이 잦아지는 저를 지켜 보신 장모님이 저에게 양주洋酒)의 세계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딸부자(富者) 집 그것도 9공주(九公主)집에 장가를 갔는데, 처갓집 사위들이 대부분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우리 장모님은 여러 딸들 집에 있는 고급 양주(高級洋酒)들을 발견하시면 곧바로 우리 집으로 가져 오셔서 여섯 째 사위인 저에게 주셨지요. 저는 장모님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시바스 리갈(Chivas Regal)’은 물론이요, ‘조니 워커(Johnnie Walker)’ 등의 위스키(whiskey) 종류 술들과 나폴레옹 코냑(Napoleon Cognac) 따위의 술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루는 장모님께옵서 어느 사위 집에서  ‘문배주’를 한 병 가져 오셔서 강원도 촌놈인 저는 그때 처음으로 장모님 덕분에 ‘문배주’라는 고급 소주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 그때 맛본 ‘문배주’ 소주는 도수(度數) 50도였던 것 같은데 저한테 딱 맞는 술이었습니다. 같은 50도 짜리 소주라도 ‘안동 소주’나 ‘영광 소주’는 맛이 소박하면서 텁텁하다고나 할까 바로 그런 맛이었는데, 이 문배술은 목 넘김이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역시 50도 짜리 술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캬!’ 소리를 내면서 술잔을 내려 놓게 만드는 문자(文字) 그대로 명주(名酒)였습니다.





  ‘안동 소주’와 ‘영광 소주’를 남성적인 호기(浩氣)를 확 불러 일으키는 명주라고 평()한다면, 문배주는 담백하면서도 절조와 기품을 알싸하게 느끼게 해 주는 명주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청와대(靑瓦臺) 국빈 만찬(國賓晩餐)공식(公式) 건배(乾杯酒)로 자주 ‘문배주’가 선정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4 27일 판문점(板門店)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南北頂上會談)만찬 석상(晩餐席上)에서도 ‘문배주’가 건배술로 채택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2006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에는 제 큰딸에게 '농담 반(弄談 진담 반(眞談半)'으로 이런 말을 가끔씩 한 적이 있습니다.


  “너 이 다음에 시집 가서 오랜만에 친정(親庭)에 올 때는 다른 선물 따위는 필요 없으니 반드시 문배주를 사 오너라. 제일 좋은 고급 담배 한 보루(board)와 함께 말이다.”


오호 통재(嗚呼痛哉)제가 큰딸내미한테 한 말이 이제는 다 소용 없게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인생(人生)이 대체(大體)로 허망하고 유감천만(遺憾千萬)이로소이다. 


저의 현재 건강 상태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앞으로 10년 이상은 못 살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시력(視力)도 극도로 나빠지고, 치아(齒牙)도 잇몸도 다 망가지고, 다리 상태도 안 좋고, 심장 상태도 작년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느껴지고, 위장(胃腸)과 대장(大腸) 상태도 안 좋아져서 한 달에도 여러 번씩 오늘은 이 대학 병원, 내일은 저 대학 병원에 가서 각각 다른 병명(病名)으로 검사 받고 진료(診療) 받느라 절친했던 친구나 친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조차 거의 다 잃어가고 있는 처지(處地)에 놓여 있습니다.  


10여 년 전 제가 병마(病魔)로 쓰러지기 전에도 저는 25도 짜리 소주가 너무 싱거워 못 마시고 그 대신에 비싼 양주(洋酒) 50도 짜리 술만 마셨는데, 요즘 소주의 도수가 해마다 낮아진다고 하니 제 가슴속에는 갖가지의 상념(想念) 교차(交叉)하는군요,


요즘 싱거워졌다는 소주는 과연 얼마나 싱거워졌을까 그 맛이 자못 궁금합니다. 내가 즐기던 50도 짜리 소주들은 어느 정도로 술 맛이 진화(進化)되었을 것이며, 그 도수는 얼마나 다양화되어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얼마 안 남은 생()이지만 저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저는 죽기 전에 제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50도 짜리 ‘쏘한 잔을 마시고, 그러고는 요즘 나온 담배 중에 최고급 담배 한 개피만 얻어 입에 피워 물고 담배 연기를 후유!~~’하며  멋지게 한번 내뿜은 연후(然後)에 제 아내의 배웅 속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습니다. 과연 그런 순간(瞬間)을 제가 맞이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2018 5 21 (월요일)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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