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편지
━ 백년가약(百年佳約) 27주년에 부쳐 ━
내 앞에서
당신은 언제나
동안(童顔)의 얼굴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당신 손결이
예전보다 많이
거칠어졌구려.
스물일곱 해 전(前)
바로 오늘
당신에게
평생 나의 여왕(女王)으로
모시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건만
내 나이 환갑(還甲) 넘도록
줄곧 고생만 시켰구려.
그러고 보니
당신한테
그 흔한 화장품
선물 한번 안 했구려.
당신은 화장을 안 해도
언제나 예쁠 줄만 알았소.
당신만은 언제나
안 늙을 줄 알았소.
아이 셋 낳아
바삐 기르느라
우리 둘이 오붓하게
여행 한 번 못 했는데,
요즘 들어 부쩍
병원 출입이 잦은
당신을 보노라니
문득 지난날이
후회스럽소.
이번 세상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지만
스물일곱 해 동안
나는 오로지 당신을
망가지게 한
죄인(罪人)의 삶을
살아온 것 같소.
너무도 곱던 당신이
시나브로 병들어
무너져 가는 동안
나는 줄곧
행복하였나니,
이 무슨 역설(逆說)이오니까.
스물일곱 해 전
바로 오늘
당신에게
일평생 나의 여왕으로
모시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이
아무래도
세월의 바람결에
나부끼다가
하얗게 바래졌나 보오.
당신 손마디는 굵어지고
손등은 거칠어졌어도
당신은 여전히
스물일곱 해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곱고 여린 마음씨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오.
여보, 고맙소.
너무 고맙소.
당신에게 진 죄(罪)를
절반이라도 갚기 위해
우리한테 남겨진
시간들을
알뜰살뜰 살아갈 것이니,
당신도 열심히 운동해서
언제나 내 곁을 지켜 주시오.
여보, 사랑하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오.
2009 년 9 월 26 일
당신의 모자란 남편
박 노 들
※ ‘시나브로’의 뜻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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