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食道樂

내가 싫어하는 다섯 가지 음식에 대한 추억담(追憶談)

noddle0610 2017. 6. 2. 02:41




 

내가 싫어하는 다섯 가지 음식에 대한 추억담(追憶談)


 

내 아내는 군것질하기를 너무 좋아한다 


시골의 엄격한 유교(儒敎)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아내와 달리 매일 밥상머리에서 할아버님과 어머니로부터 사내 자식이 먹는 것을 너무 즐기거나 탐하면 훌륭한 군자(君子)가 못 된다는 말씀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군것질이란 것을 멀리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육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과자나 사탕, 빵 따위의 달착지근한 먹거리들을 모른 채 살았다.


내가 군복무를 하던 제삼공화국(第三共和國) 시절엔 우리 나라의 경제 사정이 너무 안 좋아 하루 세끼 급식이 백 퍼센트 꽁보리밥과 콩나물국이었고 반찬이라곤 아예 없었다. 졸병(卒兵) 시절에는 꽁보리밥조차도 양껏 먹을 수 없어서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장교ㆍ하사관ㆍ고참병들 몰래 잔반(殘飯)을 버리는 드럼통(drum) 곁으로 다가가 잔반통 속에 한 팔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어 국물 찌꺼기 속에서 음식물 건더기를 어렵사리 건져 먹곤 했다.   

6.25 동란 이후 계속되어 오던 미국의 무상 원조가 하필이면 내가 군복무를 하던 도중에 이른바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여파(餘波)로 끊어지고, 한국 군대에 대한 미군의 군사 원조마저 대폭 감소되어 먹거리 문제를 비롯해 피복 사정(被服事情)이나 장비(裝備) 사정 등 장병들의 급양(給養) 사정이 너무 열악해졌기 때문에 당시 군복무를 하던 병사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늘 허기증(虛飢症)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휴식 시간만 되면 피엑스(PX : 군부대 기지 내 매점 : Post Exchange)로 달려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잘 사 먹지도 않던 달착지근한 빵이며 과자 따위 등을 내 수중(手中)에 감추어 둔 비상금이 다 떨어지는 날까지 거의 매일 사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 인생에서 가장 군것질을 많이 한 때가 바로 군복무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시절에 가장 자주 사 먹은 것은 단팥빵과 영양갱[鍊羊羹 : 일명 양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즐긴 것은 영양갱이었으며, 당시의 군인들은 이 영양갱을 너나없이 일본말 명칭요깡이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심한 훈련과 허기로 탈진 상태가 되었을 때 이 영양갱은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 군인들의 몸속에 신속히 당분(糖分)을 제공해 주는 긴급 구난식품(救難食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같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우리나라 중산층 국민들의 일반적 식단(食單)에 의해 차려진 세끼 식사를 나 또한 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군것질을 하지 않게 되었다 


군것질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군복무 시절 매일매일 먹어야 했던 콩나물국에 완전히 질려서 어머니께 이 아들의 밥상에는 콩나물국이나 콩나물을 주재료로 한 반찬을 절대 내놓지 마시라고 시시때때로 말씀드렸다. 나의 어머니께옵서는 돌아가시지 전까지 이 아들의 당부를 어기신 적이 한번도 없으셨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유학을 와서 삼십 대 중반에 혼인을 할 때까지 거의 이십 년 동안 자취생활을 한 나는 밥하기가 너무 싫어서 걸핏하면 친척집이나 식당에 들러서 외식(外食)을 하곤 했기 때문에 지금껏 몇몇 식품을 빼놓고는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축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아내는 남편의 식성이 비교적 까다롭지 않고 자기가 해 주는 대로 음식을 맛있게 들기 때문에 항상 고맙게 여긴다며 늘 나를 칭찬하곤 한다. 그렇긴 하지만 콩나물국을 비롯해 내가 평소에 싫어하는 음식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릴 때 콩나물 음식을 비롯해 몇 가지 기피식품(忌避食品)의 이름들을 열거해 주면서 제발 내 밥상에 올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내 아내는 평소에 자기가 해 주는 대로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남편의 부탁인지라 군말 없이 내가 지적한 음식들은 식탁(食卓) 위에 올려 놓지 않았다.


  내가 첫 번째로 싫어한 음식은 콩나물국이었고, 두 번째는 보리밥이었고, 세 번째는 감자였으며, 네 번째는 돼지고기였고, 다섯 번째가 번데기 음식이었다.

 

콩나물국과 보리밥은 군대 생활 내내 먹어야 했기 때문에 입대한 지 몇 달 안 가 일병(一兵) 계급장을 달면서부터 금세 질려 버렸다. 일식 삼찬(一食三饌)이니 일식 오찬(一食五饌)이니 하는 말은 요즈음 군대 급식에서 쓰는 용어(用語)이고 당시만 해도 반찬 없이 매일 콩나물국과 보리밥만 먹어야 했기 때문에, 졸병인 나는 발효 조미료인 이른바 MSG 제품미원(味元)’을 부대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구입해서 식사 시간만 되면 고참병들 식판(食板) 위에 제공했고, 나도 콩나물국에 보리밥을 말아 놓은 그릇에다 미원을 뿌려 먹곤 했다. 덕분에 고참병사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긴 했지만, 어느 날 내무반에서 빡빡하기로 유명한갑종 간부후보생(甲種幹部候補生)’ 출신 장교로부터 이른바대가리 박기란 단체기합을 받는 도중에 내 군복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미원의 분말(粉末)이 침상(寢牀) 마루 바닥에 쏟아지는 바람에 중대본부(中隊本部)로 끌려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혼이 난 적도 있다. 어떤 고참병이 졸병으로 하여금 식사 때마다 부당하게 미원을 제공하도록 시켰느냐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해서 나는 콩나물국과 보리밥을 수십 년 동안 싫어하게 되었으며, 이 식성(食性) 50대 나이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는데 환갑 진갑이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해 요즘에는 일부러 꽁보리밥을 전문으로 하는 단골 식당을 아내와 함께 자주 찾게 되었고, 집에서는 한겨울에 가끔 콩나물을 손수 길러 먹기도 할 만큼 식성이 많이 변했다


강원도 출신인 내가 감자를 싫어하게 된 데는 어쩔 수 없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내 어린 시절에 겪어야 했던 우리 고향 마을의 가슴 아픈 역사와 환경 때문이다.


강원도 영서지방(嶺西地方)을 관통하는 소양강(昭陽江) 기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6.25 사변’으로 인해 유년시절(幼年時節)을 남도지방(南道地方)의 피란지(避亂地)에서 보내고 1954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 마을은 강원도 양구군(楊口郡) 소속이었는데, 8.15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남북(南北)으로 분단되는 바람에 양구군에서는 우리 동네만 유일하게 대한민국 땅으로 남았고 나머지 마을들은 전부 다 ‘삼팔선(三八線)’ 이북(以北)에 위치해 있어서 북한(北韓)의 땅이 되고 말았다. 나의 고향 마을은 애초에 양구군(楊口郡)에 속해 있다가 해방 이후 남북분단의 여파로 춘성군(春城郡)에 속하게 되었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 다시 양구군으로 복귀했다가 1970년대 초에 소양강에 다목적댐(多目的 Dam)이 준공되어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水沒)되는 바람에 다시 행정구역이 바뀌어 지금 현재의 행정구역은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에 속하게 되었다. 6.25 당시 북위(北緯) 삼팔도선(三八度線) 바로 밑에 위치해 있어서 대한민국 최전방(最前方) 지역이었던 우리 마을은 전쟁 중에 무수히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상처와 후유증은 너무 컸고 오래오래 갈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산()들은 전쟁 중의 비행기 폭격과 치열한 고지(高地) 탈환 전투의 여파로 벌거숭이 붉은 산이 되었고, 그 결과 숲은 있으되 큰 나무들은 별로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산과 언덕, 들판 여기저기에는 전쟁 중에 사용되었던 포탄(砲彈)들의 잔해(殘骸)는 물론이요, 불발탄(不發彈)과 지뢰(地雷)가 무수히 깔려 있었다. 방망이처럼 생긴 불발탄과 수류탄(手榴彈) 등 다양하게 생긴 폭탄(爆彈)들이 풀덤불과 숲 속에 무수히 숨어 있어서, 평소에 지리(地理)를 잘 알던 어른들조차 자기들의 고향 마을이건만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피란지(避亂地)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재건하고 농사를 지르려 했지만, 상당수의 마을 주민들이 불발탄과 지뢰 따위 때문에 꽤 여러 해 동안 본격적인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도 바로 집 앞과 뒤에 있던 텃밭과부못골(父母谷)’이라는 곳에 있던 소규모 논의 농사는 지을 수가 있었지만, ‘된모퉁이라는 곳을 지나삼팔선바로 밑강남소(江南沼)’ 들판 근처에 있던 우리 집 논 수십 마지기 농사는 아예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 고향 최고의 높은 산이자 전쟁 중 최고의 격전지(激戰地)였던일어서기산봉우리 밑에 있던강남소들판 일대(一帶)는 우리 마을 최고의 평야이자 젖줄 역할을 했지만, 전쟁의 여파로 폭발물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몇 년 동안은 그곳에 들어가 농사 지을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우리 마을은 지역에 따라 2~3년을, 어떤 곳은 무려 4~5년 가까이 폭발물이 완전 제거될 때까지 본격적인 농사는 못 짓고, 대부분이 우리 집처럼 텃밭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밭에다가 다른 농작물들에 비해 수확하기 쉽고 빠른 감자와 옥수수 등을 심어 겨우 목숨들을 이어 나갔다.

우리 집은 전쟁 전까지 그리 부자는 아니었지만 중농(中農) 정도의 규모로 농사를 지어 밥은 굶지 않고 살았는데, 막상 귀향을 하고 나서 2~3년 동안에는 폭발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논농사보다는 텃밭 농사에 의지해 주로 감자와 옥수수 위주로 식생활을 해결해야 했다. 감자밥에 섞인 쌀은 손으로 일일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얼마 안 되었고, 그런 감자밥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일 먹어야 했으니 그 당시 나이 어린 내가 밥투정을 안 할 리가 없었다.

 감자밥이 먹기 싫다고 눈물을 뿌리며 발버둥치다가 어머니한테 싸리나무 회초리로 종아리에 핏줄기가 선명히 맺히도록 매를 무수히 맞아야 했다.

   처음 한 해 동안에는 미군들이 마을에 주둔해 폭발물 제거를 하였고, 미군들이 물러간 후에는 우리나라 군대가 마을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텐트(tent)를 치고 야영(野營)을 하며 폭발물을 제거하여, 비로소 지긋지긋한 감자밥과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65세 이전까지는 감자를 전혀 안 먹었다.

  그런데 사오 년 전부터 내 입맛에 회귀현상이 일어났는지 그토록 싫어하던 꽁보리밥과 콩나물국, 콩나물무침은 물론이요 감자도 다시 먹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한식(韓食) 중에서 감자요리를 가장 좋아한다. 감자밥, 감잣국, 감자조림, 감자볶음 반찬, 감자 넣고 조린 꽁치통조림, 감자샐러드, 감자구이, 감자버터구이, 감자탕, 감자를 채에 썰어 부친 감자전(), 감자튀김, 감자팬케이크, 감자가루로 빚은 감자송편, 감자수제비, 포테이토 피자, 감자국수(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배합하고 감자녹말을 섞어서 만든 국수) 등등(等等) 말이다.


 신혼 초에 내 아내에게 제발 밥상에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다섯 가지 음식 중 하나였던 돼지고기는 2~3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즐겨 먹게 되었다.

 6.25사변으로 인해 유년시절을 피란지(避亂地)에서 보내고 1954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전쟁 후유증으로 여기저기 폭발물이 남아 있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던 터라 겨우 텃밭 농사에 의지해 주로 감자와 옥수수 위주로 식생활을 했기 때문에 밥상에서 고기구경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민물고기 종류는 개울이나 강물 속에 많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때 미군 전투기가 투하했던 불발탄이나 이른바방망이 수류탄지뢰따위가 숱하게 물속에도 깔려 있어서 어지간한 용기 아니고선 낚시도구나, 작살, 족대, 그물 따위를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제군 남면 신남리(新南里) 5일장(五日場)이 서곤 했는데,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신남 장터에 갔다가 미군부대(美軍部隊)에서 흘러나온 이른바부대(部隊)고기를 커다란 가마솥에다 끓여서 파는 일명(一名) ‘꿀꿀이탕이란 음식을 난생 처음 사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식중독(食中毒)에 걸렸던 것 같은데, 현대식 병원이나 약국 비슷한 시설도 없었던 시절이라 혹심하게 고생을 한 나는 그 뒤로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갈 때까지 민물고기와 해물(海物) 및 닭고기를 제외하고는 일체 육류(肉類) 음식을 기피하게 되었다. 어린 내가 고기를 너무 안 먹어 그로 인해 신체 성장이나 건강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하신 나의 할아버지와 어머니께옵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거의 극복해 가던 1950년대 후반기부터 집에서 토종닭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 닭들 중에서 가장 빠릿빠릿해 보이는 영계를 골라 봄가을에 백숙(白熟)을 해 주시거나 삼계탕(蔘鷄湯) 등 보양식(保養食)을 만들어 억지로나마 먹게 해 주셨고, 급기야(及其也) 나는 중학교[新南中學校]에 입학한 이후 비로소 앉은자리에서 큰 닭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닭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기타 육류(肉類)는 누군가 내게 강권하면 겨우 입에 대는 시늉만 하였고 그다지 즐겨 하지 않아서 내 어머니께옵서 항상 안타깝게 여기곤 하셨다.

 

   군대에 입대하고서도 실제로 고기를 먹을 기회는 없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데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6.25 동란 이후 계속되어 오던 미국의 무상 원조가 내가 군복무를 하던 도중에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여파(餘波)로 끊어지는 바람에 장병들의 먹거리 사정은 너무 열악해졌다.

쫄병 시절, 오죽하면 식사시간이 끝난 후 잔반(殘飯)을 버리는 드럼통(drum)에 남모르게 다가가서 그 속에 한 팔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어 국물 찌꺼기 속에서 음식물 건더기를 건져 허겁지겁 먹어야 했을까.

일식 삼찬(一食三饌)은커녕 깡보리밥에다가 콩나물국이 당시 군대 식사 내용의 전부이긴 했지만, 우스운 것은 당시 졸병들이 먹었던 국물이 비록 고기 건더기는 구경할 수 없었을망정 고깃국 국물이었다는 점이다. 쇠고깃국, 돼지고깃국, 닭고깃국 국물 말이다. 고기 없는 고깃국 국물을 떠먹다가 어쩌다 고기 토막 하나가 숟가락 위에 걸리면왕거니[살코기 : 은어(隱語)]”가 걸렸다며 환호작약(歡呼雀躍)했지만, 식탁 앞에 고참병이 식사를 함께 할 경우에는 그에게 넌지시 자진상납(自進上納)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고깃덩어리 구경도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식기(食器)를 세척해야 했는데, 비록 고기 구경은 못했지만 고기 기름이 잔뜩 배어 있는 식판(食板)을 닦느라 고생깨나 했다. 특히 온수시설(溫水施設)이 전혀 안 되어 있는 한겨울엔 차가운 수돗물에 고기기름이 잘 안 닦여져서 너무너무 애먹곤 했다.

군에 입대(入隊)하기 전까지 육식(肉食)을 전혀 안 했지만 군복무 기간 내내 고기 없는 고깃국을 매끼마다 먹어야 했던 나는 결국 자연스레 고깃국 국물에 익숙해졌고 그 결과 제대(除隊) 후부터는 진짜 고기가 들어 있는 고깃국을 먹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육식까지 즐기게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회식(會食)도 자주 하게 되어 자연스레 육식을 할 기회가 늘어났고 특히나 술자리에서 안주(按酒)를 먹게 되면서부터 어느새 나도 차츰차츰 초식남(草食男)에서 육식을 즐기는 마초이스트(machoist)로 변모해 갔다.

 

웬만한 육류는 다 섭취하게 되었지만 2~3년 전까지 나는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음식은 여전히 꺼려했다. 그 까닭인즉슨 내가 서울로 유학을 오기 전, 그러니까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향집에서 해마다 토종돼지 2, 3 마리씩 길렀는데 그 당시에 생긴 일종의 트라우마(trauma)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서 돼지를 기른 것은 팔아먹기 위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일 년에 한 두어 차례 정도 봄가을에 걸쳐 집에서 기른 돼지를 잡아 평소 육미(
肉味)에 굶주렸던 이웃들과 함께 추렴[出斂] 형식으로 고기를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는데, 나는 동네 청년들(우리 이웃 아재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돼지를 잡을 때 처음으로 그 잔인한 도살(屠殺) 과정을 지켜 보면서 너무 적나라한 장면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른바돼지 멱따는 소리의 엄청난 소음에 더더욱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후 어른이 되고 나서도 도저히 돼지고기를 입에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돼지들은 늘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상태의 재래식 돼지우리 안에서 성장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가축들과 달리 너무 더럽다는 인상을 주어 결벽증이 다소 있었던 나로서는 결국 그런 돼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내 아내가 불에 잘 구운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내 입 속에 넣어 준 것을 계기로 신세계를 느낀 나는 2~3년 전부터 삼겹살을 즐기게 되었으나, 아직도 돼지 족()발이나 보쌈 같은 것은 입에 대지 않는다. 내가 돼지고기를 하도 싫어해서 결혼 이후 30여 년 이상을 해로(偕老)한 내 아내는 우리 집 식탁 위에 돼지 고기를 절대 내놓지 않았는데, 작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이상씩 삼겹살 요리를 내놓곤 한다.

 

내가 신혼 초에 제발 밥상에 올리지 말라고 아내에게 신신당부했던 다섯 가지 음식 중에 이제는 딱 한 가지만 빼고는 다 잘 먹는다.

 

아직도 내가 입에 대는 것은 고사하고 냄새조차 맡기를 꺼리는 기피음식은 바로번데기.

번데기는 근래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혐오하는 식품일 만큼 그 생긴 것 자체가 징그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번데기 가공식품을 좋아해서 요즘에는 큰 규모의 마트(mart) 같은 데서 번데기 통조림 따위를 쉽게 사서 즐길 수 있다.

나는 번데기가 징그럽게 생겨서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번데기를 물리도록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다.

6.25사변이 끝나고 1954년에 피란지(避亂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전쟁 후유증으로 우리 집 주변 여기저기에 폭발물이 남아 있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텃밭과 그 아래쪽[下側] 비탈진 둔덕에 뽕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던 터라 그 당시 국가에서 농촌 가계(家計)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해 권장했던누에 치기’, 즉 잠농(蠶農)에 매달렸는데, 그 시절 농림부(農林部)에서는 누에고치 전량을 수매(收買)했지만 나의 어머니께옵서는 생산량의 절반만 신남면(新南面) 면사무소(面事務所)에 가셔서 파셨고, 나머지 누에고치 절반은 직접 집에서 명주(明紬) 옷감을 짜는 일에 쓰셨다.

명주 실을 뽑아내기 위해 어머니께옵서는 누에고치들을 부엌 가마솥에다 가득 삶으셨고, 가마솥 곁에자새라는 틀을 설치하시곤 솥뚜껑을 여신 후 푹 삶아진 누에고치들을 그 틀에다가 연결해 대망(待望)의 명주실을 뽑아내셨다. 누에고치 하나하나가자새틀을 통해 명주실로 뽑혀져서 누에고치 특유의 둥그런 형태가 해체(解體) 되면 그 안에 숨어 있던 누에가 잘 익혀진 상태의 모습, 즉 잘 익은 짙은 갈색(褐色)을 띤 번데기의 자태를 매번 드러냈고, 그럴 때마다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군것질에 잔뜩 굶주렸던 나는 손으로 집어서 허겁지겁 입에 넣었던 것이다. 그 맛은 너무나 고소했고, 그 냄새는 나이 어린 나를 너무나 행복한 감동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번데기 모양이 징그럽다고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번데기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군것질 음식이었고, 최고의 심심풀이 음식이었다.

1950년대 중반기를 지나 후반기에 이르게 되자 6.25 전쟁의 폐해도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되었고, 우리 집에서도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경제적 궁핍상태가 말끔히 해소되기 시작해 나로서도 더 이상은 그전처럼 군것질에 허겁지겁하지 않았다. 끼니 때마다 꼬박꼬박 먹어야 했던 그 지긋지긋한 감자 때문에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이에 누에철마다 즐겨 먹던 번데기에도 서서히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1960년대가 시작 될 무렵에는 번데기라면 아예 질려서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으며, 나도 남들처럼 번데기 모습이 징그럽게 느껴지기 시작해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려했다.

1950년대 중반기와 하반기에 걸쳐서 내가 먹었던 번데기의 양()은 번데기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도회지(都會地) 사람들이 일평생 먹은 양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혼 초기에 내 아내에게 제발 밥상에 번데기 음식을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고단했던 나의 성장과정과 군대생활의 후유증으로 콩나물국, 보리밥, 감자, 돼지고기는 몇 십 년 동안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인데, 아직도 나는 번데기 음식을 싫어한다.

 

시골의 엄격한 유교(儒敎)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아내와 달리 매일 밥상머리에서 할아버님과 어머니로부터 사내 자식이 먹는 것을 너무 즐기거나 탐하면 훌륭한 군자(君子)가 못 된다는 말씀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으며 성장했기에 기본적으로 미식(美食)을 즐기거나 군것질을 즐기진 않았는데, 요즘에는 내 아내의 영향으로 가끔씩 동반(同伴)해서 유명한 맛집에 가서 외식(外食)도 즐기고, 군것질도 즐기곤 한다.

   아내의 지속적이고 정성스런 권유로 그토록 기피했던 식품, 특히 감자와 돼지고기는 먹게 되었지만, 아직도 내가 아내의 애교 섞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번데기 음식을 싫어하는 까닭은 지금으로부터 스물 두 해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에 대한 아픈 추억 때문이다.

 

   열다섯 살에 우리 집안에 시집 오셔서 열여덟 살에 나를 낳으시고 스무살 젊디젊은 연세에 청상(靑孀)의 몸이 되신 내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지성껏 모시며 나를 키우셨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너무 엄혹(嚴酷)했던 시절에 어린 아들과 연로하신 시부모님을 모시며 굳세게 사셔야만 했던 내 어머니는 195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다시 예전처럼 본격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쁜 농사철에 가계(家計)를 위해서 누에치기, 즉 잠농(蠶農)까지 하셨으니, 오늘날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투잡[two job]을 하셨다.

 

부지런한 우리 어머니는 바로 우리 집 앞 텃밭에다 목화(木花)밭을 가꾸셔서 거기서 수확한면솜씨아질물레질의 과정을 거쳐무명실을 자아내어, 그 무명실로베틀위에서 무명옷감을 만드셨고, 그 옷감으로 우리 식구들의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 두루마기 옷을 지어 입히셨다. 목화송이에서 따낸 햇솜은 무명옷과 이불, 버선 속에 넣어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게 했고, 여러 해를 묵힌묵솜은 이불 밑 방바닥에 까는나 두꺼운보료방석안에다 넣어 사용하셨다.

어디 그뿐이었으랴.

우리 어머니께옵선삼베길쌈도 열심히 하셨다. 직접 밭에다 삼[]을 재배하셔서 그 껍질을 벗겨 길게 찢은 연후(然後)에 삼베실을 만들어날고르기’ ‘베매기등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베틀 위에 올라가서 손수 짠 삼베로 여름옷을 만들어 그 옷을 착용한 우리 집 네 식구가 한여름을 시원히 지나게끔 하셨다.

누에는 자기가 토해 낸 실로 제 몸을 싸서 고치를 짓기 전에 네 번에 걸친 잠을 자는데, 그때까지 뽕나무 잎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내 어머니께서는 충분한 뽕잎을 확보하시기 위해 늘 분주하셨으며 때때로 잠실(蠶室)에서 밤잠을 설치면서누에채반(蠶箔)’ 위에다 정성껏 뽕잎을 뿌려 주시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항상 애틋한 심정으로 지켜 보아야만 했다.

누에들이 완전히 자기 집, 즉 고치를 다 짓고침묵 모드(mode)’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를 기뻐했다. 머지 않아 고치를 수확해 면사무소(面事務所)에 가지고 가서 수매(收買)를 하고 나면 거기서 받은 돈으로 어머니께옵선 분명히 내 옷이나 운동화, 아니면 학용품 따위를 사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면사무소에서 수매를 하고 남은 누에고치들은 가마솥에다 푹 삶아 명주실을 뽑아낼 것이고, 그때마다 나는으로 번데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목화에서 뽑아 낸 무명실이나 삼베껍질을 벗겨서 거기서 길게 찢어낸 삼베 실로 옷감을 만들기 위해 베틀 위에 올라가셨을 때처럼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실 모랭이가 충분하게 마련될 때마다 고방(庫房) 깊숙이 넣어 두었던 베틀을 다시 꺼내다가 대청마루 한옆에 설치하셨으며, 우리 집 식구들이 입을 명주옷 옷감들을 베틀 위에서 종횡무진 정성을 다해 짜셨다.

어머니 덕분에 나는 국민학교 다닐 때 집에선 무명 바지저고리를, 학교에 갈 때나 읍내(邑內) 나들이를 할 때는 명주로 지어 주신 바지저고리에다 비단조끼를 걸쳐 입곤 했다.

누에고치 중에 누에 두 마리가 얼러서 하나를 짓거나 흐물흐물하게 잘못 지은 고치를무리고치라고 하는데, 이 무리고치는 명주실 뽑는 소용(所用)으로는 쓰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는 이 무리고치를 뜯어 펴서 목화 솜처럼으로 만들어 쓴다. ‘무리고치 솜’, () ‘누에고치 솜’은 너무 부드럽고 풀같이 붙는다 해서풀솜이라고 하며, 가볍고 따뜻해서 겨울 옷 속에 채워 넣는옷솜으로 사용하거나 이불 속, 또는 버선 속에 솜을 끼워 넣을 때 ‘목화솜’ 대신(代身) 사용하였다. 항상 부지런하시고 아들을 지극히 아껴 주시는 어머니를 모신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나는 무거운 목화 솜 대신 누에고치에서 부산물로 얻어낸 풀솜을 넣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풀솜을 넣은 버선을 신었으며, 풀솜을 넣고 기운 이불을 덮고 지낼 수 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 태어나 시대적으로 궁핍하고 어려운 1950년대 중반 시절을 넘기며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나만큼 복을 받고 성장한 사람은 대한민국 땅에서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요즘도 나는 번데기 음식을 보면 어린 시절에 우리 어머님이 누에를 치시던 모습과 누에고치를 가마솥에 삶아 명주실을 뽑아내시던 모습, 그리고 베틀 앞에 앉아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명주 옷감을 만들어 내시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들이 애틋이 머릿속에 떠올려진다.

어린 시절 너무 많이 번데기를 먹었기 때문에 어쩌다 번데기를 보기만 해도 미리 질려서 기피(忌避)하긴 하지만, 한때 그토록 먹기 싫어했던 콩나물과 보리밥, 감자, 돼지고기를 즐겨 먹게 된 내가 유독(唯獨) 번데기를 여전히 싫어하는 까닭인즉슨 어머니와의 애달픈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腦裏)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군것질하기를 워낙 좋아하는 내 아내는 요즈막에도 손위 처형(妻兄)과 더불어 유별나게 번데기 식품을 즐겨 하여 통조림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가끔씩 재래시장에서 번데기를 사다가 집에서 다시 여러 가지 다양한 메뉴(menu)로 변용시켜 먹곤 한다.

 내가 싫어하던 기피 식품, 특히 돼지고기를 즐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의 아내였지만, 나는 여전히 번데기만은 결코 입에 대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스물두 해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과의 애달픈 추억이 떠올려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2017 6 2

 

박 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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