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한국(韓國)의 서사시(敍事詩)

noddle0610 2006. 1. 11. 03:15

 

 

한국(韓國)의 서사시(敍事詩)

 

申東曄 錦江 毛允淑 論介 中心으로

                
                                                                                                      

박   노   들  

    


Ⅰ. 들어가는 말


  시문학(詩文學)을 논(論)할 때 흔히 한국에는 서사시(敍事詩)가 없다고들 말한다. 사실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서사시(敍事詩)에 대한 관심을 보인 부분은 눈을 치켜뜨고 찾아보려 해도 별로 찾아볼 수 없거니와, 작품도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문학 풍토는 서사시가 발을 붙이기 힘든 불모지대(不毛地帶)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구구(區區)하겠지만, 서사시에서 출발한 서구(西歐)의 문학 전통과 무가(巫歌)나 노동요(勞動謠)에서 출발한 단시(短詩) 형태의 우리 문학 전통의 판이성(判異性), 그리고 잡다(雜多)한 서구의 문예사조(文藝思潮)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느라 소화불량증(消化不良症)에 걸렸던 우리의 신문학(新文學)이 이미 한물 가버린 셈인 서구(西歐)의 서사시에까지 눈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서사시 형태를 갖춘 한 두 편의 작품을 찾아본다면, 1924년 시단(詩壇)에 등단(登壇)한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국경(國境)의 밤》과 1968년 전문단(全文壇)의 주목을 받았던 신동엽(申東曄)의 《금강(錦江)》을 거론(擧論)할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몇몇 시인(詩人)이 서사시(敍事詩)랍시고 시도하여 간간(間間)이 작품을 발표는 했지만, 이렇다 할 주목(注目)이나 평가(評價)는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論外)로 하기로 한다.


  전술(前述)한 김동환(金東煥)은 향토적이요 애국적인 시인(詩人)으로서 원시적인 등잔불을 사랑하고 민요적인 색조를 농후하게 표현하여, 《국경(國境)의 밤》에서는 밀수(密輸)꾼으로 남편을 보낸 처녀(妻女)의 심정을 황량(荒凉)한 북국(北國)의 정서(情緖)로 서사시적(敍事詩的) 형태를 빌어 유감없이 노래1)하였다.

  그러나 김동환(金東煥)의 《국경(國境)의 밤》은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 보면 「보통 서사시(敍事詩)라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담화시형(譚話詩型)에 가까운 것」2)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파인(巴人) 자신(自身)은 해동(海東) 최초로 시도(試圖)한다는 자부심(自負心)으로 서사시집(敍事詩集)이라 이름 지어 《국경(國境)의 밤》을 발표했지만, 우리 문학사상(文學史上)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한 의미에서의 서사시가 될 수 없는 한계성(限界性)을 스스로 지녔던 것이다.

  신동엽(申東曄)의 《금강(錦江)》역시 마찬가지다. 파인(巴人)의 뒤를 이어 면면(綿綿)히 서사시의 줄기를 수립하지도 못한 우리의 풍토(風土) 위에 오래간만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금강(錦江)》은 동학란(東學亂)을 소재(素材)로 한 살아 움직이는 역사(歷史)를 취급하여 작자(作者)의 왕성한 역사의식(歷史意識)을 보여 준 역작(力作)이긴 하다. 그러나 동작품(同作品)도 제목(題目)에 그 장르를 밝혀 서사시(敍事詩)란 한정사(限定詞)를 붙이고 있지만, 전편(全篇)을 훑어보면 「이 시(詩)는 차라리 한 편의 서정시(抒情詩)」3)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사가(好事家)인 우리 문학도(文學徒)들은 항시 서사시(敍事詩) 부재(不在)의 우리 문학사(文學史)에 또다시 이정표(里程標)를 세울 새로운 서사시집(敍事詩集)의 출현(出現)을 목마르게 기대해 왔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우리의 요구(要求)에 수응(酬應)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번에 우리 시단(詩壇)에 새로 상재(上梓)되어 빛을 보게 된 것이, 역시 서슴지 않고 서사시집(敍事詩集)이란 한정사(限定詞)를 당당히 붙인 여류(女流) 모윤숙(毛允淑)의 《논개(論介)》이다.


  본고(本稿)에서는 바로 이 《논개(論介)》를 텍스트(Text)로 《금강(錦江)》과 함께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장시 형태(長詩形態)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우리의 문학적 관심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本論)


  한국문학에서도 「어느 분야에서나 역사적 관심은 눈에 띄는 경향의 하나다. 이제 우리는 申東曄 씨의 《錦江》에서 詩에 도입된 역사의 예를 보게 되었다.」4)

  마찬가지로 모윤숙의 《논개(論介)》도 한 역사(歷史)의 몸부림에서 그 일부(一部)를 서사시(敍事詩)의 형태로 표현해 보려 시도(試圖)하고 있다.

《금강(錦江)》이 동학란(東學亂)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 시(詩)이긴 하나 이야기의 전개만을 주안(主眼)으로 하지는 않듯이5) 《논개(論介)》역시 지은이가 서문(序文)에서 「이 글은 論介의 傳記가 아니다」라고 밝힐 만큼 스토리(Story)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고대(古代)의 서사시(敍事詩)가 지니는 스토리의 중요성(重要性)과 현대시(現代詩) ━━ 이를테면 T. S. Eliot의 《Waste Land(1922)》의 경우처럼 복잡다단(複雜多端)한 현대(現代)의 감성(感性)이 스토리 위주로 치우치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아 자연발생(自然發生)으로 특수한 상징법(象徵法)과 상상력(想像力)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신동엽(申東曄)의 《금강(錦江)》이 동학란(東學亂)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일직선적(一直線的)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필요할 만큼 허구상(虛構上)의 인물로 보이는 ‘신(申)하늬’를 등장시켜 명목상의 주인공으로 현실감 있는 허구(虛構)를 구성하려는 데 비해, 모윤숙의 《논개(論介)》는 비교적 일관(一貫)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역사적 사건 중 가장 큰 싸움이었던 진주대첩(晋州大捷) 전후(前後)의 추이(推移)를 순서대로 기술(記述)하면서 실재 인물(實在人物)이었던 두 영웅(英雄) ‘논개(論介)’와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주연(主演)으로 사실(史實)에 어긋나지 않도록 서술(敍述)해 나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나중에 상재(上梓)된 《논개(論介)》가 《금강(錦江)》보다도 진주성(晋州城) 싸움의 군관민(軍官民) 집단의 의지적(意志的) 영웅(英雄)이었던 실질적(實質的) 주인공(主人公) ‘김시민(金時敏)’과 ‘논개(論介)’를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일차(一次) 이차(二次)에 걸쳐 벌어졌던 대첩(大捷) 및 진주성(晋州城) 함락의 전말(顚末)을 모티프(motif)로 하여 영웅(英雄)의 운명(運命)을 일관성(一貫性)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될 수 있는 한(限) 과거사(過去事)의 서술을 사실(史實)에 어긋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하였다는 점 등(等)에서 고대(古代) 서사시(敍事詩)의 전통(傳統)이나 특질(特質)에 보다 더 충실(充實)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논개(論介)》로 하여금 반드시《금강(錦江)》보다 더 우리의 문학적(文學的) 욕구(慾求)를 충분히 충족(充足)시켜 줄 수 있는 유리(有利)한 고지(高地)를 차지했다고는 볼 수 없다.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금강(錦江)》은 「단순하고 억제된 묘사를 통해」6),「東學의 이야기에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7)하는 데 비해, 모윤숙의 《논개(論介)》는 「內部와의 對話者」8)로서 시종(始終) 긴 ‘스란치마’처럼 우아한 그녀의 소리를 통해 ‘논개(論介)’의 역사적 카리스마(charisma)를 다시 확인하고 재발견(再發見)시켜 준다.


  적어도 현대시(現代詩)라면, 역사적(歷史的) 사실(史實)에서 테마(Theme)를 구한다면, 전편(全篇)에 번뜩이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이 보여야 할 것이다. 역사(歷史)는 단순히 노래되어져서는 안 된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닌, 목구멍 너머 저 안쪽에서 육화(肉化)되어 울려 나오는 심혼(心魂)을 때리는 노래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詩人)이 해야 할 작업(作業)이요, 시인만이 구사(驅使)할 수 있는 테크닉(technic)이 아니던가.

  신동엽의 《금강(錦江)》은 1862년 진주민요(晋州民擾) 이후(以後) 양반계급 토색질의 대표적인 예(例)에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전관료(全官僚) 조직을 흡혈(吸血) 조직으로 확인하고, 그 조직의 맨 꼭대기에서 외세(外勢)를 보면서 1894년의 동학란(東學亂)을 중심으로 혁명(革命)의 의지(意志)를 그렸고,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상호(相互) 조명(照明) 및 때때로 시(詩)의 렌즈(Lens)를 현대(現代)로 맞추어 ━━ 작자(作者)의 의식(意識)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원근법(遠近法)」9) 을 사용하여 ━━ 그의 왕성한 역사의식을 나타냈다.

  이에 비해 모윤숙의 《논개(論介)》는 충실히 진주성(晋州城)에만 무대(舞臺)를 국한(局限)하여, 외세(外勢)에 항거해 일어선 민중(民衆)의 총화(總和)가 얼마나 장(壯)하고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가를 하향식(下向式) 애국(愛國)이 아닌 상향식(上向式) 애국심(愛國心)으로 유도(誘導)해 가는 서민적(庶民的) 지도자상(指導者像)을 보여 준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행동을 통하여 보여 주고 있다. 모윤숙은 《논개(論介)》를 통하여 당시(當時)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부(一部) 비민족적(非民族的) 부류(部類)들의 추악한 행태(行態)를, 적(敵)에게 짓밟히는 여성(女性)의 비극(悲劇)을 통한 민족수난(民族受難)의 상징을, 특히 꺾이지 않는 논개(論介)의 의지(意志)를 통한 승화(昇華)된 민족혼(民族魂)을 노래함으로써 여성(女性)다운 역사의식(歷史意識)과 반전의지(反戰意志)를 서술(敍述)하고자 했다.


  과연 신동엽과 모윤숙 두 시인이 얼마만큼 육화(肉化)된 역사의식을 경위(經緯)로 《금강(錦江)》과 《논개(論介)》를 상재(上梓)할 수 있었는지는 좀더 냉철히 분석(分析)할 필요가 있다.


  서정시(抒情詩)와 서사시(敍事詩)의 다른 점은 단순히 분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만큼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의 융합(融合)에 있어 객관성(客觀性)을 띠고 있느냐 여부(與否)에서도 판별(判別)되어질 수 있다. 물론 서정시(抒情詩)도 객관적(客觀的) 서정시와 주정적(主情的) 서정시로 분류(分類)가 가능하다. 그러나 서사시(敍事詩)는 서정시(抒情詩)에 비해 「본래 어떤 主觀的인 것이나 道德的인 것을 강요한 것이 아니고 客觀的이며 說明的인 敍述인 것」10)이다. 객관성(客觀性)은 주정(主情)의 절제(節制)에 의해서만이 가능(可能)하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경우에는 더욱 객관적이어야 역사의식(歷史意識)의 정곡(正鵠)을 찌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금강(錦江)》과 《논개(論介)》는 어떠한가.


《금강(錦江)》은 테마가 「분노와 抵抗의 詩」11)이다. 그러나 남성다운 투박하고 단순한 시어(詩語)를 사용하면서도 이 시(詩)의 전편(全篇)은 「憐憫이 이 詩의 열쇠가 되는 감정」12)이 되어「그것은 곧 분노로 이어지는데」13), 이 시의 「감정을 강렬하게 하는 것은 다분히 이 두 감정」14)에서 온다.

  바로 《금강(錦江)》의 ‘동학(東學) 이야기’는 「오늘날 작자가 느끼는 연민과 분노의 뜨거운 열 속에서 직관적으로 파악」15)되어, 한 편(篇)의 이 시(詩)를 완성시킬 수 있는 저력(底力)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민(憐憫)과 분노(忿怒)의 감정(感情)은 「값싼 극적 효과를 위한 小道具로 전락」16)해 버릴 위험성(危險性)을 내포(內包)하여, 비록 「探究의 수단으로 있는 한 효과적이긴 하지만」17) 지나친 감정(感情)의 분류(奔流)로 때로는 「歷史的 思考의 단순화」18)와 「멜로 드라마적인 플롯트」19)를 이루어, 작자(作者)의 역사(歷史)에 대한 진지한 성찰(省察) 가운데 자칫 초점(焦點)이 빗나갈 수 있는 소지(素地)를 짐짓 보이고 있다. 여기서 잘못하면 연민과 분노의 지나친 노출은 객관성(客觀性)을 쉬 잃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요인(要因)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한 편의 서정시’라고 하는 소리가 나옴직도 하다.

  모윤숙의 《논개(論介)》는 어떠한가.

  이 시 역시 임진란(壬辰亂)의 와중(渦中)에서 단연 우리의 피를 끓게 하고 있는 진주성(晋州城) 싸움을 무대로 하여 활약했던 김시민(金時敏) 장군, 그리고 논개(論介)를 등장시켜 시종(始終) 우리 편에 대한 연민과 적(敵)에 대한 분노, 때로는 민족 반역자와 조정(朝廷)의 붕당(朋黨) 싸움에 대한 분노가 전편(全篇)에 점철(點綴)되어 있다. 우리 편에 대한 연민과 적(敵)에 대한 분노는 이 시에서 시인(詩人) 자신(自身)의 말을 빌려 「內部와의 對話」20)를 통해 왜장(倭將) ‘게다니’를 유혹해 가듯 진주(晋州) 남강(南江)의 푸른 물 속까지 우리를 이끌고 간다.

  이 시인 특유(特有)의 화려한 시어(詩語)를 통해 우리는 이 시인에게 자칫하면 미혹(迷惑) 당하기 쉽다. 이 시인은 일찍이 산문시집(散文詩集) 《렌의 애가(哀歌)》에서 보여 준 우아한 목소리를 통하여, 때로 《국군(國軍)은 죽어서 말한다》에서 보여 준 절규를 통하여 필생(畢生)의 심혈(心血)을 기울여 ‘논개(論介)’를 육화(肉化)하려 했다.

  그러나 지나친 연민의 감정은 ‘논개(論介)’와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미화(美化)시키기에만 열중하였고, 언급(言及)되기만 한 ‘진주성(晋州城) 싸움’의 총체(總體)인 군관민(軍官民)의 자주적(自主的) 저항(抵抗)의 구체적인 면면(面面)은 그만 소홀히 다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종종 역사학계(歷史學界)에서 기왕(旣往)의 ‘사(史)’를 기술(記述)함에 있어서 ‘왕조사(王朝史)’ 위주로 재구(再構)하는 데 대한 비판과 함께 ‘서민사(庶民史)’에 대한 취급 소홀을 개탄(慨嘆)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 왔다. 따라서 문학(文學)에서야말로 이와 같은 면을 감안하여 이름 없는 초동급부(樵童汲婦)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기록(記錄)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윤숙 시인의 경우 시적(詩的) 대상(對象)은 어디까지나 ‘논개(論介)’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논개(論介)도 기실(其實) 사대부(士大夫)가 아닌 기생(妓生)의 신분(身分)이 아니던가. 상식적이다시피 한 기왕(旣往)에 알려진 논개(論介)의 상(像)보다 좀더 리얼(real)하게 그려진 인간적(人間的) 고뇌(苦惱)의 ‘논개(論介) 상(像)’이 이왕(已往) 서사시(敍事詩)의 주인공(主人公)으로 등장할 바에야 주변 인물(周邊人物)들과 함께 표현 가능(表現可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나친 연민의 감정은 자칫 대상(對象)을 미화(美化)시키기 쉽다. 논개(論介)의 ‘죽음’은 더욱 그렇다. 예술적 표현의 충동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논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논개’의 미화(美化)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서정시(抒情詩) 《논개(論介)》21) 한 편으로 충분(充分)하다.

  서정시(抒情詩)보다 객관적이고 서정시보다 구체적(具體的)인 것이 서사시(敍事詩)의 특징일진대, 더욱이 역사적 사실을 취급하였다면 좀더 총체적(總體的)인 역사에 대한 인식(認識)을 바탕으로 다루어졌어야 할 ‘논개’가 과연 우리의 문학사적(文學史的) 관점(觀點)에서 볼 때 그러한 소기(所期)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이는 앞으로 좀더 면밀히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Ⅲ. 맺는 말


  본고(本稿)는 짧은 현대시(現代詩)의 역사 위에 시도(試圖)해 본, 그것도 서사시(敍事詩) 불모지(不毛地)인 이 땅에 민족 수난의 역사를 제재(題材)로 택(擇)하여 분노와 저항의 무대를 연 신동엽(申東曄)의 《금강(錦江)》과 모윤숙(毛允淑)의 《논개(論介)》를 통해 제기(提起)된 여러 가지 문제점(問題點)을 살펴보았다.

  두 작품이 모두 근작(近作)으로 발표된 것들이기에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곧바로 우리 문학 전체가 안고 있는 제문제(諸問題)와 유형무형(有形無形)의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1924년에 이루어진 파인(巴人)의 서사시(敍事詩)와는 달리 《금강(錦江)》이나《논개(論介)》는 그간 꾸준히 발전해 온 서정시의 토양(土壤) 위에 사실상 우수한 서정시인(抒情詩人)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던 신(申)-모(毛) 두 시인(詩人)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록 모처럼 만에 그 방대(尨大)한 작업을 해냈다는 면에서는 노고(勞苦)를 치하(致賀)해 주어야 할 것이나, 앞으로의 한국 현대시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두 편의 시(詩)가 무비판적으로 시사(詩史)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도록 너무 과도(過度)한 대접을 해서는 안 되겠다. 

  전반적(全般的)인 문제에 관해 좀더 성실하고 끈기 있게 골고루 분석(分析)을 가(加)하지 못해 유감스럽긴 하나, 지금까지 두 작품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금강(錦江)》이나《논개(論介)》는 서사시의 형태를 빌리려고 무진 애를 쓴 흔적이 도처(到處)에 보이고 있으나, 지나친 연민이나 분노의 분출(奔出), 때로는 지나칠 만큼 대상(對象)의 미화(美化) ━━ 특히 《논개(論介)》의 미화(美化) ━━ 로 말미암아 총체적(總體的)인 면(面)에서의 냉철하고 면밀한 역사의식(歷史意識)이 부족하고, 육화(肉化)되지 못한 교과서적(敎科書的)인 인물 활동(人物活動) 내용의 확인(確認) 외(外)에 별로 두드러진 표현을 발견(發見)할 수 없다. 그것은 객관성(客觀性)의 부족(不足)으로 인(因)한 ‘사고(思考)의 미숙(未熟)’ 아니면 잘못된 인식(認識)에서 기인(基因)한 것이다. 차라리 《금강(錦江)》이나《논개(論介)》를 전혀 새로운 수법으로 소설화(小說化)하는 편이 어떤 면에서는 훨씬 진실감(眞實感)을 독자(讀者)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좀더 육화(肉化)된 노래, 구체화(具體化)된 서사시(敍事詩), 소설(小說)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서사시 특유의 감동(感動)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내밀(內密)한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의 융합(融合)이 앞으로 나올 한국(韓國) 서사시(敍事詩)들에 절실히 요청(要請)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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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白鐵, 新文學思潮史, 서울 新丘文化社 1974, PP.324~325.

      白鐵, 國文學全史, 서울 新丘文化社, 1969, PP.347~348.

  2) 白鐵, 文學槪論, 서울 新丘文化社, 1969, P.203.

  3) 金禹昌, 申東曄의 「錦江」에 대하여, 創作과 批評, 1968년 봄호 제3권 제1호, P.105.

  4) Ibid., P.105. 

  5) Loc.cit. 

  6) Ibid., P.106.

  7) Loc.cit.

  8) 毛允淑, 論介, 광명출판사, 1975, P.1.

  9) 金禹昌, op.cit., P.105.

10) 白鐵, 文學槪論, 서울 新丘文化社, 1969, P.217.

11) 金禹昌, op.cit., P.109.

12) Ibid., P.106.

13) Loc.cit.

14) Loc.cit.

15) Loc.cit.

16) Ibid., P.111.

17) Ibid., P.112.

18) Ibid., P.116.

19) Ibid., P.112.

20) 毛允淑, op.cit., 序文.

21) 卞榮魯, 論介, 新生活 제 3호,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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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 년 대학원(大學院) 제 3차 학기 레포트

 

                                 담당 교수 : 백철(白鐵) 博士

          

 

후기(後記) : 젊음이 남아 있던 시절에 밤새워 가며 벼락치기로 작성했던 과제(課題) 리포트(report)가 아직도 서재(書齋) 한 구석에 뒹굴고 있기에, 보잘것없는 내용의 졸문(拙文)이지만 추억거리로 삼고자 여기에 탑재(搭載)하였음.

 

출처 : 코리아닷컴 eroom noddle글광, 현대문학

Date 2005-12-21 오전 8:02:52

http://eroom.korea.com/nod_157446